in monologue

머리

가난한선비/과학자 2018. 12. 12. 01:26


머리.


머리를 자르고 있을 때였다. 어쨌거나 여러 번 이 미용실을 찾으며 취조심문을 당한 결과, 아주머니께선 내 직업이 과학자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다. 상대방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포박해 둔 채, 그것도 형편없는 망토를 둘러놓은 채로, 자유롭게 가위와 빗을 들고 먹이 주위를 왔다갔다하며 침을 삼키는 식인종처럼 먹이를 향해 끊임없이 퍼붓는 질문들에 사실 그 누가 당해낼 수 있겠는가. 그리고 자고로 질문과 답은 동등한 자리에서, 팔과 다리와 목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상황에서 해야 하는 법이지 않는가. 그러나 이미 어쩔 수 없는 피고의 위치에 놓인 채 나는 고개를 숙여 들어 하는 그 권세있는 말에 순종하며, 그 불평등한 취조에 계속 응답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아는 척은 안전한 범위 내에서 해야 하는 법. 내 직장을 칼텍으로 잘못 알고 계신 게 오늘 들통나버렸다. 잠시 당황한 채 상황을 어찌 됐든 얼버무리려는 아주머니. 내가 정정해드린 ‘시티 오브 호프’는 처음 들어보는 병원이었던 게 확실했다. 무슨 듣보잡 병원이야? 하는 듯한 아주머니의 얼굴 표정을 난 우스꽝스러운 망토를 걸치고 목에 꽁꽁 수건을 두른 채 경직된 상태에서도 내 앞에 커다랗게 놓인 거울을 통해 볼 수 있었다. 아, 어차피 상관 없는 거 그냥 칼텍이라 할 걸 그랬나... 하는 웃기지도 않은 배려의 생각을 잠시 하고 있을 무렵, 아주머니는 뜬금없이 황우석 얘기를 꺼내셨다. 나름 생물학자인 나를 배려해서 그와 관련된 화제거리를 생각해내신 모양이었다. 그런데 하필 많고 많은 유명한 생물학자들 중 황우석이 뭐람... 쩝. 하여튼 오늘 일진하곤... 하며 듣고 있자니, 황우석이 화장품을 만든대나 뭐래나 하시지 않겠는가. 아, 그래요? 처음 듣는 얘깁니다. 했더니, 과학자들 중에도 거짓말하는 자들이 많죠? 하시는 거였다. 네, 그렇죠. 과학자도 인간이니까요. 하며 약간은 철학적인 답변을 하던 차, 아주머니는 끝까지 들으려고 하지도 않으신 채, 기다렸다는 듯이, 나사도 거짓말을 얼마나 많이 하겠어요? 하시는 거였다. 무슨 말인가 하며 목을 약간 수그린 채 눈을 멀뚱멀뚱 하고 있는데, 아주머니 하시는 말씀. 아폴로가 달에 갔다는 거 설마 과학자이면서 믿으시진 않겠지요?


그렇잖아도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답답해하던 차였는데, 과학자라는 직업을 가진 것이 달착륙 음모론에 가담하지 않는 죄가 될 줄은 미처 몰랐었다. 아, 전 달 착륙했다는 사실을 역사적 사실로 알고 있는대요. 그랬더니 한 번 더 확인사살하시길, 아니, 어떻게 과학자이시면서 그런 거짓말을 믿어요? 하시는 거였다. 뜻밖의 황당함에 깜짝 놀라고 있을 무렵, 마침 다 됐으니 머리 감으러 가자는 말에 난 몸이 비로소 해방된 채 뭐라 답변을 할까 자유로운 몸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는데, 아주머니는 벌써 대화를 잊으신 듯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고 계시는 거였다. 머리를 뒤에 대고 누워 머리가 감겨지는 약 1분 간 난 내 머리를 재빨리 굴려 적당한 답변을 찾고 있었는데, 아주머니는 드라이하러 가자고 하시며 끊임없이 모든 대화를 리드하셨다. 답변을 하려고 해도 드라이기 소리에 시끄러워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머리에 뭐 발라드려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어때요, 가능한 많이 안 잘랐어요. 어디 가시나봐요? 아니요, 그냥 지저분해서요. 네, 호호호. 그새 아주머니는 돈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래서 난 준비했던 돈을 드리고 미용실을 나왔다. 똥을 덜 닦고 나온듯한 참으로 찝찝한 기분으로 말이다.


이 밤, 어정쩡했던 기분이 아직도 남아있다. 아... 난 듣보잡 병원 연구소에서 일하며, 달착륙을 역사적 사실로 거짓말 친 나사에 속아 넘어간, 무늬만 과학자, 아니 과학자도 아닌 그저 형편없는 아저씨였던가.... 아... 이 말로 표현 못할 자괴감이여... ㅋㅋㅋ


*사진은 어제 Huntington library에서 찍은 사진. 아마 화산 폭발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