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monologue

아들러를 읽으며

가난한선비/과학자 2018. 12. 18. 02:26


아들러를 읽으며.


홧김에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은 원인과 결과의 문제가 아니다. 화가 난 것은 잘못된 게 아니다. 그러나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 폭력의 원인 역시 자신의 우월성을 입증하려는 의도라고 봐야 한다. 폭력 행사자는 언제나 어떤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이를테면 폭력 이후 피해자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키는 기술), 사실 그 명분은 폭력을 동원하지 않아도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다. 폭력은 결코 피해자의 변화를 앞당기는 촉진제가 될 수 없다. 피해자보다 가해자가 우위에 있어 피해자의 굴복을 강제하는 수단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폭력 이전과 이후의 영향과는 별개의 문제다.


홧김에 폭력을 행사했다고 해서 마치 이성을 잃은 것처럼, 감정에 북받쳐서 무력을 행사했다고 여기면 안 된다. 그 순간에도 이성은 작동했다. 다만 그 이성은 자신의 우월감을 증명하려는 의도 아래 종속되어 있었을 뿐이다. 다시 말해, 그 상황은 자신이 폭력을 행사해도 될만한 상황이라고 이성적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감정과 이성을 분리시키는 이원론의 해석은 구시대의 유물이다. 감정과 이성은 하나다. 그게 인간이다. 결코 환원론으로 인간의 행동을 설명할 수 없다.


핵심은 이렇게 해서 다시 나르시시즘에 귀착한다. 자신을 남보다 낫게 여기고, 그런 상황을 유지하기 위해 남을 죽일 수도 있는 자기애.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라는 개념과 상통한다. 그리고 만약 원죄를 자기애로 해석한다면, 원죄로부터의 해방, 즉 구원은 자기애에서의 해방을 의미해야만 한다. 예수의 복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면, 하나님나라가 그 구원이 이루어진 곳이라면, 하나님나라가 정의와 공의로 살아가는 곳이라면, 나를 넘어 남을 향하며 공동체를 위한 삶은 기독교가 추구하는 핵심과 맞닿아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사적인 유익을 추구하는 개인구원론에 천착한 복음은 복음이라 할 수 없다. 모순이다.


*동상은 지난 일요일 Huntington library 에서 사진으로 찍은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