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monologue

10년

가난한선비/과학자 2019. 2. 9. 04:56

10년.


이번 달로써 난 생물학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지 정확히 10년 째가 되었다. 10년 전 세대 (그러니까 현재 50대 이상의 교수들)보다 아카데미 안에서의 피라미드는 훨씬 더 높아졌고 더 미끄러워졌다. 그리고 그 피라미드를 오르는 자들은, 아이러니하게도, 훨씬 더 많아졌다.


미국에 있는 3개의 주 (오하이오, 인디애나, 캘리포니아)에서 포닥으로 일해 본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생물학 분야에서 포닥의 절반 정도는 중국인들이 차지하고 있으며, 나머지 절반의 절반은 인도인이나 중동인들이 차지하고 있다. 소위 와스프라고 하는 백인에다가 앵글로색슨 피가 흐르며 눈이 파란 이들은 전체의 5퍼센트도 안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와 유사한 비율로 한국인이 존재한다. 현재 내가 몸담고 있는 학과만 해도 한국인은 나 혼자다. 오하이오 클리블랜드에서도 그랬다. 인디애나에서는 규모가 좀 컸기 때문인지 나를 포함하여 셋이었다. 한국인은 절대 소수 민족인 것이다. 이런 인종 분포의 불균형 현상은 점점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고르게 될 확률은 없을 것 같다.


사실 알고보면 생물학 포닥이란 직업은 박사 학위라는 타이틀만 그나마 좀 있어보이지 현실적 대우는 형편없다. 참고로 2011년 9월 처음으로 클리블랜드 클리닉에서 미국 포닥을 시작했을 때, 놀라지 마시라, 나의 첫 연봉은 3만 4천 달러였다.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연봉이 3천 6백만원 정도가 되어 마치 괜찮은 연봉 같아 보이지만, 지출을 생각하면 한국의 연봉과 직접적인 숫자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 2011년만 해도 아파트 렌트비로 한 달에 천 달러 (약 백 십만원) 정도를 지출했으며, 현재 내가 사는 아파트는 두 배가 조금 넘는다. 한국에 사는 사람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한국에선 만원이면 평범한 점심과 커피나 디저트를 해결하고도 남길 수 있지만, 여기 미국에선 일부러 찾지 않는 이상 힘들다.


아무튼 포닥이란 직업은 간신히 먹고 살만한 돈으로 사는 직업인 것이다. 이런 돈 받으려고 그 힘든 박사과정을 6년 씩이나 했나 하고 생각하면 한 숨이 푹푹 나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름 합리화하는 방편으로 돈보단 명예를 중요시하게 되며, 아카데미에 남아 학자라는 포지션에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뿌듯해 해야하는 숙명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뿌듯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뿌듯해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생물학 포닥들은 그 괴리감의 어느 지점엔가 놓여 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한국인 포닥 수가 전체 미국 포닥 수에 비하면 형편없이 적겠지만, 그건 외국인이라든지 소수민족이라든지 하는 이유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의 와스프들의 포닥 수가 적은 것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여긴 자기네들의 국가 아닌가.


미국에서 태어난 백인들은 박사 학위 직후 포닥을 아예 하지 않거나, 한다고 해도 2-3년 실무경험을 쌓는 목적으로 한다. (물론 요즘 얘기다. 그리고 모두가 그렇다는 일반화를 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이라고 하면 틀리진 않을 것이다.) 아카데미가 아닌 인더스트리에서도 실무 경험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대학원생의 옷을 갓 벗은 애송이를 이윤을 추구하는 인더스트리에서 좋아할 리가 없을 것 같기 때문에 이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실제 내가 현재 일하고 있는 실험실에도 1년 반 쯤 전에 와스프 포닥이 새로 들어와서 일하고 있는데, 처음부터 자기는 아카데미에 남아 조교수-부교수-정교수 트랙으로 갈 생각이 전혀 없다고 했다. 이미 인더스트리를 알아봤고, 대부분의 회사들이 포닥 실무경험 2년 정도는 요구한다고 해서 포닥으로 일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교수나 그룹리더가 되기 위한 전단계였던 포닥이란 자리는 인더스트리 등 다른 본격적인 직업을 갖기 위한 준비 단계 같은 의미로 어느새 전락해 버린 것이다. 다시 말해, 미국 백인들의 포닥 수가 적은 이유는 그들이 아예 포닥으로 일하지 않기 때문도 있지만, 포닥으로 일하는 기간이 예전과는 다른 목적을 가지게 되었고, 그 기간이 짧기 때문인 이유도 있는 것이다. 나처럼 10년을 이 짓거리를 하고 있는 사람의 눈에는 이런 것들이 어느 정도 보인다.


인더스트리 이외에도 미국 백인들은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 실험을 하지 않는 분야로 가는 것을 선호한다. 사실 생물학 분야에도 실험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컨설팅, 롸이팅, 행정, 관리 업무 등등에 종사하는 박사학위 소유자가 많다. 알다시피 미국은 말빨이 굉장히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곳이기 때문에 실험을 하지 않는다면 자기네 언어로 충분히 자기의 가치를 뽐낼 수 있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아진다. 실험 쪽으로 오면 아무래도 한국인처럼 손 좋은 민족이 잘한다. 말을 잘 못하고 문화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해서 그렇지, 순수하게 과학적인 측면만 보자면 솔직히 한국인과 미국 백인들은 비교가 안 된다. 젓가락질의 힘은 생물학 실험 분야에서도 유효하다.


이런 경향과 잘 맞아 떨어지는 것이 앞서 말한 중국인과 인도, 중동인의 압도적인 인구분포 현상이다. 실험이라는 게 투자 대비 실속이 적고 그 실험을 했다고 해서 받는 대우가 형편없기 때문에 이미 자칭 선진국민이라 여기는 백인들은 특별한 뜻이 있지 않는 한 이런 포닥 자리를 이미 10년 이상 전부터 마다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난 이런 현상을 전혀 몰랐던데다 한국에서는 아카데미의 거짓된 우월성에 쪄들어 있었기 때문에 보다 더 큰 성공, 즉 선배 과학자들이 그리 어렵지 않게 거머쥐었던 명문대 교수로 금의환향하는 것을 꿈꾸며 미국행에 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이미 달랐다.


누군가는 이런 나의 썰을 읽고 실패자의 해괴한 변명이라느니, 합리화라느니 해댈지도 모른다. 특히 나와 비슷한 시기에 와서 선배들이 했던 수순을 그대로 밟아 교수가 된 사람들은 날 그저 싸잡아매는 열등감에 싸인 이상한 놈으로 여길 수도 있겠다. 이해할 수 있다. 아마 입장이 바뀌었다면 솔직히 나도 그랬을 것 같기 때문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과 아래에서 그 삶을 살아내는 것은 다른 것이다.


아카데미만이 과학을 할 수 있는 공간은 아니다. 인더스트리의 의미가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한국에서 배울 땐 인더스트리로 새는 사람을 마치 실패한 것처럼, 현실과 타협한 비겁한 자처럼 여기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여기 미국에 와서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내가 느낀 건 다양성이란 측면이 크다. 실험 파트에서 발을 일찌감치 뺀 백인들이 얄밉기도 하지만, 선견지명이라는 생각도 들고 다양성이란 측면으로 봤을 땐 과학이라는 더 큰 분야를 볼 수 있게 해주어 많은 도움이 된다. 머지않아 맞이하게 될 나의 제 2의 과학자로서의 인생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논문이 마무리되고 있다. 계획했던 마우스들을 이제 절반 이상 사용했다. 뭔가가 결론지어지고 있다. 윤곽이 잡힌다. 그러나 아카데미에서의 교수 트랙은 이 논문들이 마무리됨과 동시에 끝을 낼 것이다. 그게 올해가 되면 좋겠지만 내년이라도 상관없다. 내가 잘하는 것으로 먹고 살 수 있다는 사실 자체만 해도 위로가 되고, 예전에 가졌던 꿈이 무산되는 수 년 간의 세월동안 내가 좋아하는 것을 새롭게 발견하여 인생을 보다 풍성하게 즐길 수 있게 됨을 감사한다. 높고 좁은 인생보단 낮고 넓은, 그래서 풍성한 인생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