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monologue

관성: We are what we desire (or love)

가난한선비/과학자 2019. 2. 14. 07:53

관성: We are what we desire (or love).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 나는 무엇을 하며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가? 만약 누군가 몰래 설치해 놓은 cc 티비 덕분에 나중에 자신의 녹화된 모습을 보게 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평소에 시간이 나면 꼭 해야지 했던 것들을 과연 실행에 옮겼을까, 아님 창피할 정도로 엉뚱한 일에 시간을 또 낭비해버리고 말았을까? 나는 생각하고 계획한대로 살고 있을까, 그것과 무관하게 살아왔던대로 또 습관처럼 살아가고 있을까? 그리고 이 괴리감은 모순일까, 숙명일까, 아니면 한계일까?


바쁘게 쫓기는 일상을 살면서 우린 언제나 고질적으로 ‘시간이 필요해’ 라고 말하지만, 정작 시간이 주어지면, 좀처럼 우린 그 시간을 계획한대로 살아내지 못하고 물거품으로 날려버리는 경향이 있다. 왜 그럴까? 그리도 노래를 부르던 시간이 왔는데!


 ‘습관이 영성이다’라는 책을 읽고 감상문에 쓰지 않았던 부분을 여기에 나눠본다.


그 책에서 따끔하게 지적했던 부분이 있었다. ‘당신이 계획하거나 생각한 것을 당신이 실제로는 사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 “난 이러이러한 걸 좋아해.” “난 이렇게 이렇게 됐으면 좋겠어.” “난 꼭 이러이러하게 할 거야.” 등 우리가 타인 앞에서 말하거나 주장하는대로 과연 우리가 계획하거나 생각한 것을 진짜 원할까? 진짜 하고 싶어하는 걸까? 만약 금도끼 은도끼의 산신령이 나타나 소원 한 가지만 말해보라고 한다면, 과연 우리는 우리가 그 동안 남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떠벌렸던, 우리가 계획했거나 생각했던 것을 이뤄달라고 주저없이 말할 수 있을까? 여기서 망설이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그것이 진짜 내가 원했던 것인지, 아니면 남들에게 비춰진 내가 원했던 것인지, 스스로만 알 수 있는 은밀한 답에 깊숙이 접근했기 때문일 것이다.


‘타인에게 비춰진 내 모습’과 ‘진짜 내 모습’ 간의 괴리. 서두에 언급했듯, ‘진짜 내 모습’을 쉽게 관찰할 수 있는 시간은 혼자 있는 시간일 가능성이 높다. 그때는 이성과 논리로 보기 좋게 잘 짜여진 지성적인 모습이 아닌 습관과 관성에 쪄든, 갑옷을 입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이 도드라질 때이기 때문이다. 


솔직함. 원하는 것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용기. 현실에선 물론 백퍼센트 투명한 인간이 어디 있겠냐마는, 그래도 우린 ‘진정성’이란 가치를 본능적으로 좋아하며 그런 사람을 만나길 원하고 그런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남들 앞에서 치장한 모습이 너무나 커져버린 사람들을 본다. 제 2의 천성이 되어버릴 정도로 생각한 것과 원하는 것의 괴리를 느끼며, 남들 앞에 선 자신의 모습과 홀로 있을 때의 자신의 모습의 괴리를 느끼는 사람들을 본다. 


슬픈 일은 불의를 멀리하고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에게서조차 이런 괴리 현상을 목도하기 때문이다. 정의를 실컷 부르짖어놓고 퇴근하고 집에 가선 습관에 물든 불의에 몸을 맡기는 사람들. 일터에선 여성의 인권을 외치다가 집에 가선 아내에게 청소도 안했냐고 잔소리하는 인간들. 예수의 사랑을 설교해놓고 교인을 데려다가 성폭행을 일삼는 목사들. 인간이란 무엇일까. ‘You are what you think or plan’ 이 아닌 ‘You are what you love or desire’이 정말 맞는 말 아닐까. 혹시 그 관성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