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monologue

어깨

가난한선비/과학자 2019. 7. 23. 07:48

어깨.

단순한 심부름이었는데도, 나는 초록빛의 만원 짜리 지폐 한 장을 주머니에 넣고 동네 수퍼마켓에 다녀올 때면, 괜스레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주머니에 혹시나 구멍이 나지는 않았는지, 혹시라도 걸어가다 돈을 흘리진 않을지 긴장하며 주머니 안에 손을 깊숙하게 찔러넣은 채 돈을 꽉 쥐는 등 은근한 스릴을 즐겼다. 왠지 내가 드디어 인정받은 것 같은 느낌이랄까. 만원 짜리를 손에 쥐어도 될만큼 믿음직한 소년으로 성장했다고 증명이라도 받은 느낌이랄까. 어깨를 으쓱하며 나는 좁은 골목길을 내달렸다. 아.. 그때의 쾌감이란.

대학교에 입학하고 첫 여름방학, 나는 내 삐삐 번호가 적힌 수학 과외 전단지를 이곳저곳에 붙였다. 처음 연락 온 곳은 고 3 여학생이었는데, 수학 때문에 수능이 걱정이라 했다. 나와 한 살밖에 차이나지 않는 여학생에게 대학생이라는 신분만으로 나는 괜한 우월감을 느끼며 아직도 건실히 살아남아 있는 내 머리 속의 수학 지식을 총동원하여 두 달 내내 성의껏 그녀를 가르쳤다.

그 이후로 거의 10년이 넘도록 과외를 지속해 왔지만, 그때의 첫 과외의 느낌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특히, 첫 과외비로 현금 30만원, 그러니까 녹색 만원 짜리 지폐 서른 장을 두툼한 흰 봉투로 받았을 때의 희열은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어렸을 적 심부름할 때처럼 그 봉투를 주머니에 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모르겠다. 혹시라도 소매치기를 당하지 않을까, 혹시라도 강도라도 만나지 않을까, 혹시라도 걸어가다 주머니에서 빠져나와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하며, 예전에도 그랬듯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누군가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애써 태연한 척하며 집으로 빠른 걸음으로 왔었다. 더운 날이었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와서 흰 봉투를 꺼냈을 때, 봉투는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젖은 봉투에서 돈을 꺼내어 마치 은행 창구 직원이 능숙하게 돈을 세듯, 서른 장을 세었다. 아.. 그때의 희열이란.

가치있는 것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 처음 그 느낌으로 세상의 모든 소중한 일상을 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쾌감과 희열로, 내 조그만 어깨에도 주어진 책임감을 기뻐하고 감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