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
공동체.
1. 자신이 고독하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할만큼 쫓기는듯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본다. 기계적인 삶이 가져다주는 유익은 일종의 안정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안정감은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지 못하게 막는 역할을 충실하게 해낸다. 어쩌면 고독의 실체를 대면하지 못하게 우리 스스로가 미리 손을 써둔 것일지도 모른다. 빈 손으로 외진 골목 끝에 몰려 그것과 조우하게 되는 날, 비로소 자신이 만들어놓은 견고한 성벽도 모두 허울뿐임을 인정하게 될까봐, 겁이 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언하건대, 언젠가는 누구나 그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시기는 다르겠지만, 그 결정적인 순간은 우리 모두에게 반드시 찾아온다고 난 믿는다.
속수무책으로 그 순간을 홀로 감당해내는 시기는 혹독하기 마련이다. 누군가는 그 공간을 광야와 같다고 말하기도 하고, 죽을뻔한 경험이라든지, 슬럼프라는 단어로도 표현을 한다. 뭐라고 표현되든지 그 시기는 우리를 당황케 하고 두려움에 떨게 하며 죽음의 냄새까지도 맡게 만든다. 철저한 고독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에서 헤어나올 수조차 없다. 자신의 존재감은 물론,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던 것들로부터 모두 배신당한 것 같은 기분도 들 수 있다.
2. 난 이런 순간까지도 보듬어줄 수 있는 공동체를 꿈꾼다. 아니, 그보다 먼저, 이런 순간들을 맞이했을 때 스스럼없이 그리고 숨김없이 털어놓을 수 있는 신뢰와 사랑이 전제가 된 공동체를 꿈꾼다. 자상하고 친절하지만, 표면적인 안부나 묻고, 경조사 때 축하나 위로의 메시지를 건네는 정도의 공동체를 말하는 게 아니다. 무언가 더 내면적이고 비밀스러운 (모두가 가지고 있지만, 좀처럼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문제들을 꺼내놓을 수 있고 진실된 사랑을 주고받는 공동체. 이런 곳이 하나님나라의 단면이 아닐까. 반면, 이런 것들이 대화 속에 전혀 등장하지 않은 채, 여전히 깊숙한 진짜 문제들은 서로에게 숨기는 등의 깔끔한 매너가 기본 룰이 된 공동체는 난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의문이 든다. 결국 특정 주제에 관련된 것에서만 함께 하는 동호회 정도에 불과한 것일까. 어쩔 수 없는 것일까. 기대해선 안되는 것일까. 가족 다음이라는 선을 긋고 편하게 대해야 하는 것일까.
3. 한 마디 한 마디에 배려와 존중이 들어가 있는지, 차별적인 뉘앙스는 없는지 조심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말이겠지만, 무결점이나 무실수의 인간이 어디 존재하는가. 그런 말조심 생활이 우리의 성품을 훈련시킬 수는 있겠지만, 과연 서로간의 신뢰와 사랑을 증진시키는 데 도움이 될까. 말조심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건 결국엔 율법에 사로잡히는 꼴과 다름이 없는 결과를 내지 않을까. 우리가 하는 말은 결국 그 어느 한 관점에서 해석할 땐 차별과 억압으로 느껴질 수 있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가 조심하는 그 관점이라는 것도 결국 시대와 문화에 종속된 가치 아닌가.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공동체는 그보다 더 상위에 있는 그 무엇 아닐까. 이성과 논리가 우리의 죄된 속성과 허물을 드러내주고 잘못을 깨달아 수정해줄 수 있을진 몰라도, 그것이 율법과 같은 반면교사의 역할만을 한다면, 분명 하나님나라는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한답시고 말조심하다가 얻게 되는 건 결국 침묵으로 수렴하는 꼴 아닐까. 그런데 나는 침묵과 천국이 별 관계 없다고 느껴진다. 행복이란 단어를 떠올려도 그렇다. 오히려 말을 실수했다면 (실수가 아니라 인지하지 못한 채, 오래 각인된 차별적이고 억압적인 말이라도), 그 실수를 상대방 상처주지 않도록 짚어줄 수 있는 분위기, 그리고 실수를 한 사람은 그것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뉘우치고 수정하려고 하는 분위기. 기분이 상했다가도 금방 대화로 풀어지고 더욱 가까워지며 서로를 알아가는 분위기. 오히려 이런 허물없는 자연스러운 분위기의 공동체가 말조심하는 공동체보다 더 하나님나라에 가깝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