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monologue

벽을 넘어서

가난한선비/과학자 2019. 7. 23. 07:52

벽을 넘어서.

분노에는 의지가 개입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멸시는 그렇지 않다. 멸시는 의도된 악의 발현이다. 멸시는 배제와 혐오의 옆자리에 위치한다. 누구나 가진 인간의 이기적인 속성으로 멸시의 이유를 대며 핵심을 빗겨 가면 안 된다. 인간이 이기적 존재라는 말이 틀렸다는 게 아니다. 이기적이라는 이유가 멸시를 낳게 하는 유일한 원인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범인이 군중 속에 숨는 꼴과 같다. 이는 이기심에 의지가 개입될 때와 아닐 때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쉽다. 모든 사람이 이기적이지만 모든 사람이 멸시를 행하진 않는다. 남을 죽이려는 적극적인 의지의 개입 없이는 멸시는 잉태되지 않는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멸시는 의도된 악이다. 어쩌면 멸시란, 이기심에 의지를 개입시켜 타자를 향한 억압과 폭력으로 나타나는 악의 완성체다.

분노는 멸시의 튼튼한 전제조건이 된다. 멸시를 행하는 사람의 공통된 입장은 재밌게도 자신들도 나름 피해자인 것처럼, 마치 어쩔 수 없었던 것처럼 시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이들은 자신들의 분노를 정당화하며 기정사실화함으로써 멸시의 정당한 구실로 삼고 있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셈이다. 즉, 한 마디로, 그 사람은 멸시를 할 수밖에 없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찰떡같이 믿고 있는 것이다. 의지의 적극적인 개입은 이렇듯 거짓을 정상으로 만드는 데 치명적이다. 합리화의 무서움은 이때 빛을 발한다. 그리고 이런 자들이 정치경제를 좌지우지하는 피라미드 꼭대기를 차지할 때 달라스 윌라드가 간파한 것처럼 전복 중인 상태의 비행기가 마치 정상으로 판명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게 어쩌면 우리가 사는 현실일지도 모른다.

덧붙여, 인간이 분노 단계에 있을 때엔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멸시는 상대방을 아예 자신과 동일한 인간 취급도 안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노에서 멸시 단계로 넘어간 사람은 상대방을 향한 배제와 차별, 즉 억압적인 폭력이 행사되어도 그렇게 마음에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죄책을 느낀다는 건 아직도 희망이 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합리화의 굴레 속에 태어나 매트릭스 안의 세상이 진짜인 줄 아는 그들의 후대들의 상태는 어떨까생각하면 실로 끔찍하지 않을 수 없다.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서 흠집을 내야 한다. 담쟁이는 벽이 코 앞에 있더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결국은 조용히 타고 올라간다. 크지 않아도 된다. 자신이 서있는 자리에서 목소리를 내자. 기죽지 말고 벽을 올라가자. 서로서로 손을 잡고 함께 가자.

- 달라스 윌라드의 ‘하나님의 모략’ 읽다가 묵상 중에 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