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지혜자
거짓 지혜자.
특별함이 사라지면 평범함만 남는다. 하지만, 평범함이 사라지면 특별함도 함께 사라진다. 근간이 사라지면 거기엔 텅 빈 공간만 남는다. 특별함의 존재 이유는 평범함이다. 반복되는 일상의 과소평가는 그것의 무게를 인지하지 못한 무지함이다. 잠깐 빛나는 찰나를 위해 지난한 일상을 견디고 참아내야 한다고 가르쳤던, 옛 거짓 지혜자의 말이 떠오를 때면 나는 종종 분노하곤 한다.
그러나 나도 딱 거기까지. 그 작자들의 가르침이 내게 달콤한 지혜로 들렸던 이유는 바로 내 안에 웅크리고 있던 자기애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선택한 불의는 지혜로 비춰질 수 있었고, 내가 선택한 위선은 군중의 익명성과 관행으로 충분히 해석되어질 수 있었다. 거짓 지혜자는 누군가에게 받는 훈련만으로 탄생하는 존재가 아니다.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 만큼의 용기와 결단,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한 성실한 책임감만 있으면 거짓 지혜자로서의 충분한 자격을 확보한 셈이다. 사실 거짓 지혜자가 되기 위해 처리해야 할 대상은 하나밖에 없다. 바로 자기자신. 처리 방법은 두 가지다. 자기자신을 감금시키고 끊임없는 성실함으로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관리를 잘하거나, 아니면 아예 죽여버리는 방법. 다시 말하자면, 의식 수준으로 그 존재를 순간순간 기억하며 성가셔 하고 있는지, 아니면 잠재의식의 깊은 감옥으로 쳐 넣어 버려 완전히 잊어버렸는지의 차이다. 따지고 보면, 거짓 지혜자는 전자여야 한다. 후자는 타자와 소통이 불가능하기에 범죄를 저지르거나 누군가의 우상이 될 수는 있을지라도 선생은 되지 못한다. 즉, 거짓을 전파하여 제자를 삼기 위한 조건은 아이러니하게도 남아 있는 양심의 잔재다. 그 흔적이라도 있어야 민감하게 선에 반응하며 악을 침투시킬 수 있는 계략을 짤 수 있기 때문이다. 적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어찌 이길 작전을 세운단 말인가.
돌아가는 꼴을 보며 궁금한 게 생겼다. 그들이 과연 거짓 지혜자일까. 아니면 거기에 이르지도 못한 잔챙이에 불과할 족속들일까. 그저 흉내나 내며 눈치 밥이나 먹고 사는, 거짓 지혜자의 모방범은 아닐까. 저 싸움이 한심해 보이고 추잡해 보이는 이유는 아마도 그들의 존재 자체가 흐리멍덩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저게 토론인가 논쟁인가, 그냥 진흙탕인가. 나는 그들이 차라리 거짓 지혜자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