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monologue

사소함의 신비

가난한선비/과학자 2019. 9. 6. 05:23

사소함의 신비.

커다란 홀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중앙에는 누군가가 갖다 놓았는지 모를 티비 하나가 켜져 있었다. 붉은 머리의 한 여인이 머리칼을 휘날리며 차를 몰고 한적한 시골길을 미끄러지듯 달리고 있었다. 사람들의 소음 때문인지 나는 미미한 공황이 오기 시작했기에, 멍하니 쳐다보던 티비에 괜스레 집중하며 시간을 떼우고 있었다. 티비 소리는 누군가 일부러 줄여놨는지, 모기 소리처럼 작아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에,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도 모르면서 움직이는 화면을 가만히 뚫어지게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나를 몇 초간 얼어붙게 만든 건 다행히 소리가 아니었다. 문득 수 년 전, 티비에서 나오고 있는 길과 아주 비슷한 느낌을 주는, 마치 끝도 없이 이어진 것만 같은 길을 달렸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난 그 순간 티비에 나오는 여인과 동일인물이 되었고, 그녀가 전신으로 느끼는 가을의 대기와 숲에서 불어오는 냄새를 맡을 수 있을것만 같았다. 그 순간이 그렇게 마구잡이로 내 머리 속에 떠오른 이유는 알 길이 없다. 티비에서는 카메라가 차 뒷좌석에 설치되어 있는 것 같았고, 운전자의 오른쪽 뒤통수는 거의 화면의 왼쪽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수석은 텅 비어있었다. 한없이 펼쳐져 있는 길. 완연한 가을임을 알 수 있는 노란색과 갈색의 아름다운 조합들이 길 양 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순간 내 마음은 갑자기 수 년 전으로 돌아가 있었고, 나는 비에 젖은 옷처럼 무거운 기분이 되었다.

힘들게 차를 움직여 내가 찾은 곳은 그 언젠가 그녀와 함께 달렸던 시골의 한적한 길이었다. 한 시간이 넘도록 달려 마침내 도달했던 목적지보다도, 그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 달리던 길이 내 기억 속에 더 선명하게 남아있는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나는 며칠 전 티비에서 본 사람이 되어 조수석을 비운 채 차를 달렸다. 목적지에 도달하지 않아도 상관 없었다. 이미 내 마음은 적잖은 위로를 받았다.

때론 일상에서 지나치기 쉬운 아주 사소한 순간이 우리를 내면의 깊숙한 곳으로 안내하는 입구와 통로가 되어준다. 어쩌면 일상의 신비한 무게감은 이러한 뜻밖의 순간들이 문득문득 만들어내는 일들 때문이지 않을까. 얕아 보이는 사소함들의 향연을 소중하게 여기는 눈이 깊은 사람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