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monologue

위기와 유머

가난한선비/과학자 2019. 9. 10. 02:13

위기와 유머.

위기에 봉착하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가 문제를 진지하게 대면하지 않아서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 문제를 필요 이상으로 너무 진지하게 대면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진지함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유달리 지나친 진지함이 폐해가 될 때가 의외로 많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거다.

진지함은 우리를 경직시켜 유연한 대처를 막는다. ‘집중’의 어두운 면이다. 마음의 여유뿐 아니라 상상력을 제한시키고 갉아먹는다. 얼굴은 잔뜩 찌푸린 채 마치 세상이 금새 두 동강이라도 날 것만 같은 표정이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 원인을 찾아내고 분석하여 해결책을 마련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 되어버린 상태. 여기서 나는 묻고 싶다. 만약 그 목적을 달성하면 그 다음은 어쩔 거냐고. 문제의 연속성 안에서 허구한 날 심각한 상태로 삶을 살아갈 텐가.

문제는 이어진 쇠사슬과도 같다. 다만, 균일한 두께로 이루어지지 않아 어떤 쇠사슬은 가느다랗고 또 어떤 쇠사슬은 두껍다. 아무튼 왠만한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대부분 사라진다. 어떤 경우는 우리가 해결책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체로 지나가버린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가 우리를 기다린다. 매사를 오로지 진지함만으로 대한다면, 아마도 끝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쇠사슬의 어느 즈음엔가 우린 탈진하여 쓰러지거나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게 될 것이다. 사람마다 역량과 인내심이 다르기 때문에, 몇 번째 쇠사슬에서 멈출 것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분명한 건 끝까지 (끝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버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린 치열하게 진지하지 못함에서 자신의 역량을 탓하며 자책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자책의 근원이 무엇인지는 나도 알 길이 없다. 누가 심어놓았는지, 이것도 디엔에이의 여파인지, 아니면 소위 영적인 문제라는 것인지, 암만 떠들어봤자 해석에 불과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누가 알겠는가.) 마치 문제의 해결이 자신의 진지한 정도에 따라 판가름나는 것처럼 말이다 (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생각인가!). 그러나 문제라는 게 어디 자신의 실수나 잘못 하나 때문에 생기던가. 설사 문제의 발단이 자신의 실수나 잘못이었다 하더라도, 문제의 전개는 언제나 더 복합적인 층에서 펼쳐지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시작점을 제거한다고 해서 항상 문제가 사라지지는 않는단 말이다. 떠올려보면, 보통 우리가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지점은 문제의 발단보다는 전개 과정이다. 예상치도 못했던 여러 요소들이 얽히고 설켜서 이차, 삼차, 때론 다차적원적인 문제들이 연쇄적으로 이어진다. 

문제 가운데 있는가. 고민 끝에 진지함이 더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는가.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그 결론은 고작 ‘노오력’의 결론과 다를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노오력’ 자체가 억압의 증거 아닌가. 스스로 눌린 상태에 있다면 거기서 치열하게 얻은 답도 억눌린 자만이 할 수 있는 답에 그치지 않겠는가. 그 문제보다 더 큰 세계를 봐야 한다. 문제를 통해 문제만 보거나 그 문제만 해결하면 될 일이 아니다. 그 이상을 보지 않으면 문제는 자신의 인생 그 자체가 되어 버린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진지함이 아니라 유머일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부족한 건 진지함으로 얻을 수 있는 집중력이 아니라, 부족함이 있어도 타자와 자기자신을 용서하고 받아주는, 즉 괜찮다는 여유에서 나오는 유머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문제 투성이. 흠 많은 사람들. 충분히 겸손한 유머를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