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monologue

공감: 개인과 사회

가난한선비/과학자 2019. 11. 15. 06:30

공감: 개인과 사회.

공감능력은 지성의 발달과 교육훈련으로 충분히 개선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성에 기반을 둔 방법만으로 개선된 공감능력은 피상적일 때가 많다. 경험이 배제된 이성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고, 인간에게 똑같은 경험이란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인간이란 존재가 이성적이기만 하진 않기 때문이다.

타인에 대한 공감은 언제나 근사치를 향할 수밖에 없다. 비록 아주 비슷한 경험을 했다 하더라도 상황은 그리 달라지지 않는다. 어느 사람에게나 어느 상황에서나 먹혀들 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모든 인간’이라는 집합명사에 대한 이해가 아닌 ‘개별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다. 일반적인 잣대를 특수한 상황에 들이댈 땐 언제나 오류를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인류를 사랑하는 것과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의 차이도 간과할 순 없다.

이성과는 달리 경험에는 현장이 있다. 현장은 언제나 오감과 감정을 모두 동원했던 기억과 중첩된다. 실제로 배고파보지 않았던 사람이 배고픈 사람의 어려움을 이해한다는 것은 머신러닝을 통해 구축된 인공지능이 인간을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것과 별 다를 게 없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괴롭고 슬퍼도 기계로부터 위로를 받고 싶은 사람은 아마도 없으리라 생각한다.

누군가를 위로해준답시고 시도했지만 더욱 상황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그래서 반드시 피해야 할, 말들이 이젠 대중적으로도 많이 알려졌다. 이와 동시에, 누군가를 위로할 때 건넬 바람직한 말들까지도 추천되곤 한다. 이성적으로 조금만 생각해보면 왜 어떤 말은 피해야 하고 어떤 말은 조심해야 하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만 생각하면 이성의 힘만을 사용한 셈이다. 물론 이성적인 판단에 의한 결과물이 대부분의 상황에서 공통된 부분을 조리있게 잘 잡아내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보단 좋은 시작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컨텍스트를 무시한 텍스트의 위험성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리고 굉장히 불안정한 상태에 처한 사람을 대한다는 점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머리 속에 준비된, 소위 검증된 말들도 차마 입 밖으로 내놓기가 어려울 때가 많을 것이다. 그리고 속으론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아, 완전히 원점 상태에서 다시 시작하는 거네. 그동안의 준비가 아무 소용도 없는 것 같네.’

가끔은 이런 생각도 한다. 위로를 건네는 입장에서 무엇을 말할지 몰라 망설이며 조심스러워 하는 태도가 차라리 준비했던 말들을 상대방의 상태를 조심스럽게 관찰하거나 파악하지 않고 마치 연극 대사를 외듯 거침없이 쏟아내는 상황보단 낫다고 말이다. 위로를 받을 입장에 처한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남을 배려할 여유가 남아있다면, 망설이는 모습조차 고마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계처럼 나불대거나 영혼 없는 말처럼 허황되게 들리는 말은 이성이 조금만 작동하더라도 불쾌감을 유발할 것은 거의 확실하다. 위로는 상황에 적당한 말도 한 몫을 하지만, 그것보다는 진정성 깃든 사랑과 보살핌의 마음이 전해지면 되는 것이다. 입이 아닌 눈으로도 충분히 공감과 위로를 전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이 많다. 개인은 도덕적일 수 있으나 그 개인들이 모인 사회는 비도덕적이라는 니버의 말을 여러 측면에서 생각해본다. 너무나 예리하고 냉철한 그의 분석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지만, 한편으론 씁쓸함을 금할 수가 없다. 함부로 모든 인간을 사랑한다거나, 마치 인간 심리를 많이 아는 것처럼 경솔하게 굴지 말아야겠다고 혼자서 마음을 다잡는다. 차라리 가족과 가까운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보살피는 방향이 더 맞지 않나 싶다. 한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이 모인 사회는, 물론 대규모는 불가능할 것이겠지만, 비록 규모가 작더라도, 니버의 분석에도 불구하고 죽기 전에 꼭 경험해보고 싶다는 소망을 가져본다. 하나님나라도 아마 그런 곳에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