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monologue

지혜로움과 쏟아부음

가난한선비/과학자 2019. 11. 19. 09:53

지혜로움과 쏟아부음.

손해 보지 않기 위해 이리저리 재면서 일부러 힘을 빼고 보이지 않는 어떤 적정 선을 찾고 있다면, 그건 당신이 이미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다. 살아오면서 마음을 모두 쏟아부어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치열하게 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 어쩌면 우리가 어른이 되는 과정은, 혹시 모를 나중을 위해 내가 가지고 있는 전부에서 약간씩을 몰래 적당히 뒤로 빼놓는 영악함에게 남아있는 순진함이 점점 점령당하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무언가를 끝내고 예상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면 후회를 한다. 가만히 떠올려보면, 그런 대부분의 상황 속에서의 나는 언제나 더 안전하고 덜 손해 보는 방향으로 일을 진행하고자 지독히도 머리를 썼던 것 같다. 마치 보험을 들듯 의도적으로 전부를 걸지 않고 이차 삼차전을 치르기 위해 일부를 남겨둔다는 것은 어찌 보면 지혜로움의 상징이기도 하다. 허나, 이것은 자신의 그 시도가 성공이 보장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도 된다. 우리는 올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신이 근시안적이지 않고 지혜롭다는 증거로도 사용하지만, 실패의 이유로도 사용하는 영악한 존재인 것이다.

사랑에 빠지면 다시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된다. 자로 재고 적당 선을 지키는 상대를 온전히 사랑할 연인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상대에게 언제나 유일한 존재가 되길 바란다. 어디선가 들은 말인데, 사람은 자신에게 화를 내거나 함부로 한 사람은 잊어도 짠돌이로 군 사람은 잊지도 용서하지도 못한다고 했다. 비단 연인 사이만이겠는가. 친밀한 모든 인간관계에서 우리가 느끼는 서운함은 주로 나를 향한 상대의 마음에서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을 때다. 진정성은 순수함과 연결되고 순수함은 솔직하고 온전한 마음과 연결된다. 누군가와 실제로 얼굴을 맞대고 있지만, 전혀 함께 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지 못했던 적이 있다면 아마도 이런 경우와 같은 경우일 것이다.

마음을 다한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렇게 살지 못했던 그 ‘지혜로웠던’ 순간들을 상기해본다. 과연 나는 지혜로웠던가. 과연 나는 남겨서 얻은 것이 있었던가. 있다면, 남겨서 얻은 것의 양과 얻기 위해 남겼던 양은 얼마나 차이가 날까.

다시 아이의 마음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점점 많아진다. 치열하게 살아보고 싶다. 치열하게 사랑해보고 싶다. 받는 사람의 마음이 충만해질 수 있을 만큼, 나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을 만큼 다 쏟아부어 사랑해보고 싶다. 그리고 나는 어른들의 ‘지혜로움’을 조금씩 경계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