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속도
지혜의 속도.
실수나 시행착오를 가능한 하지 않으면 좋고, 하더라도 적게 하면 좋다는 건 상식이다. 그러나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 할 때라면 상황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상식과 비상식의 경계가 무너지는 상황을 감수해야 할 때가 종종 생기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는 그 상식이란 게 주관적이기 때문이고,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가 마주치는 문제는 연속적인 확률로 존재하기보단 의외로 이것 아니면 저것의 이분법적인 선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나는 충분히 지식과 경험이 뒷받침되어 어떤 일을 하면 안 된다는 확신에 가까운 느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함께 하는 사람이 나의 느낌과 생각에 충분히 공감할 수 없고 동의할 수 없어서 반대한다면, 그리고 마침 그 일이 두 사람의 의견 중 중간을 고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일이라면, 내 마음에는 여전히 거리낌이 있더라도 어쩔 수 없이 상대방의 의견을 수용해서 그 일을 치러야 할 때가 있다. 안 될 줄 뻔히 알면서도 그 일을 해야하는 상황, 그리고 그 뒤에 마주하는 불 보듯 뻔한 실패. 내 지식과 경험은 한 번 더 검증받은 셈이지만, 헛수고를 했다는 기분, 시간낭비를 했다는 기분은 좀처럼 떨칠 수가 없다. 또한 이때 이 일은, 상대방에게는 실수나 시행착오 정도로 남겠지만, 나에게는 같은 실수의 반복 내지는 시행착오의 교훈을 잊어버린 어리석은 일, 혹은 시간낭비 따위로 기억에 남게 된다.
누군가는 소통의 부족을 지적할지도 모른다. 내가 상대방에게 충분히 납득할 정도로 설명하거나 설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짚는 것이다. 아니면 상대방의 완고함을 꼬집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지적하는 사람 역시 살면서 나와 비슷한 문제는 숱하게 접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이상적인 소통과 대화가 언제나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과연 다양성이 존재할 때 바이너리한 선택의 기로에서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지혜로운 걸까? 내 입장에선 충분히 진행하면 안 된다고 판단되는 일도 상대방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가 있다. 이유를 들어보면 나름대로의 논리와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일이란 게 어디 늘 선경험과 선지식의 패턴대로 확실하게 예측할 수 있던가. 언제나 예외는 존재하는 법이고, 이번은 다를 수 있다는 확률은 늘 존재한다. 선경험과 선지식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100퍼센트 확실성이 부재하다면, 그 사람 역시 미래를 모르는 인간일 뿐이다.
결국 내 입장에서는 불보듯 뻔한 손해를 감수해야만 하는 일을 일상에선 언제나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혼자가 아닌 2명 이상의 공동체 생활에서는 말이다. 그렇다면 필요한 건 지식과 경험을 100퍼센트 확실하게 만드려고 애쓰는 것이 아닌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겼을 때의 사후처리다.
서로 맞춰가며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가는 공동체. 현실은 말한다. ‘부족한 부분’의 정의가 뭐냐고. 그것을 서로 인정할 줄 아느냐고. 어떻게 세상과 타자와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다른데 부족함을 정의하는 눈이 같을 수가 있겠냐고. 함께 가는 것이 혼자 가는 것보다 느린 이유는 바로 이런 데에 있을 것이다.
손해인 줄 뻔히 알면서도 상대의 템포에 맞추어 한 발자국 늦추어 함께 가는 일. 때론 적극적인 대화가 필요하고 때론 적극적인 인내가 필요하다. 그리고 난 전자보단 후자를 평화롭게 잘해내는 것이 지혜라고 본다. 지혜는 혼자일 때 필요하지 않으며, 또 결코 빠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