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턴 와일더 저,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를 읽고

사랑의 영원성과 현재성
손턴 와일더 저,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를 읽고
1714년 7월 20일 금요일 정오, 페루에서 가장 멋진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가 무너지면서 다섯 명이 추락사를 당했다. 이들의 죽음에 대해서 우린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또 무엇을 생각해 볼 수 있을까? 신이 개입한 걸까? 단순한 우연일까? 그들은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일까? 혹시 남이 모르는 어떤 흉악한 일을 저질러 천벌을 받은 건 아닐까? 인간의 삶과 죽음은 인간의 통제 영역을 벗어난다. 태어나고 싶다고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죽고 싶다고 해서 쉽게 죽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여기엔 우리가 모를 뿐 이미 정해진 어떤 시간표가 있는 건 아닐까? 혹시 누군가가 설계한 건 아닐까? 신과 우연, 무엇이 사건의 주체일까? 도대체 무엇이 이 다섯 명을 죽였단 말인가.
그들을 위해 살아남은 자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그냥 잊으면 되는 걸까? 아니면 어떤 그럴듯한 시나리오를 만들어 다리가 무너진 원인을 누군가의 잘못으로 만든 뒤 그 사람을 악마화하여 또 다른 희생양을 만들어야 할까? 어떻게 하면 그들을 위할 수 있을까? 신을 믿지 않는다는 사람도 신적 개입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특히 대형재난사고로 인한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을 생각한다면 더욱더 그럴 것이다. 억울한 죽음이라는 생각에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일지도 모른다. 가시적인 사람이 아닌 비가시적인 신을 원망하기로 선택하는 것도 이런 면에선 훨씬 합리적이고 쉽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어진 적당한 합리화와 적당한 정신승리의 도움만 받으면 어지간한 문제는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믿음까지 갖추게 되면 완벽할지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머지않아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 역시 그런 사고의 희생자가 될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라는 우려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우린 매번 똑같은 질문을 던지고 똑같은 생각에 잠기고 똑같은 한숨을 쉬며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 군더더기 없는 작품은 시작부터 산 루이스 레이 다리 붕괴로 인해 추락사를 당한 다섯 명의 의미를 묻는 질문으로 직진한다. 선교 활동을 위해 페루로 왔다가 공교롭게도 그 사고를 목격했던 프란치스코회 소속 주니퍼 수사의 머릿속엔 다른 사람들과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왜 하필 저 다섯 사람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그는 이 다섯 명의 숨겨진 삶을 조사하여 그들이 죽어야만 했던 이유를 밝혀내리라 마음먹었다. 다섯 명 모두의 삶이 온전했으며 그들의 죽음은 그러므로 어떤 벌이 아님을 증명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는 나중에 이단으로 몰리게 된다. 그가 수많은 연구 끝에 쓴 방대한 책은 비밀 필사본 하나만을 남겨둔 채 그와 함께 불태워진다. 주니퍼 수사는 처음 던졌던 질문에 끝내 답을 얻지 못했던 것 같다. 이 책의 저자는 이렇게 말문이 막히는 심오한 질문을 툭 던져놓고 9페이지 분량으로 이뤄진 1부를 짧게 마무리한다. 1부의 제목은 ‘어쩌면 우연’이다. 우연이길 바라는 걸까? 아니길 바라는 걸까?
곧장 이어지는 2-4부는 과거로 돌아가 산 루이스 레이 다리 붕괴로 추락사를 당하기 이전의 다섯 명의 삶을 담담히 조명한다. 포목상의 딸로 태어나 어머니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채 몰락한 귀족과 결혼하여 딸 클라라를 낳고,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하는 건지 딸을 사랑하는 건지 구분을 하지 못할 정도로 딸을 향한 집착 아닌 집착, 이타적인 듯하지만 지극히 이기적으로 자기 안에 갇힌 사랑을 딸에게 평생 퍼부었던 도냐 마리아 몬테마요르 후작 부인. 이 부인이 인생에서든 사랑에서든 처음으로 용기를 내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부여했던 소녀 페피타. 페피타 역시 은인이었던 수녀원장을 다시 만날 기대로 벅차 있는 상태였다. 함께 살던 후작 부인의 심적 변화를 바로 옆에서 보고 그녀에게도 새로운 삶이 시작되리라는 기대 또한 그녀의 마음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을 것이다. 이틀 뒤 후작 부인은 페피타 덕분에 새롭게 인생을 살기 위해 페피타를 데리고 리마를 향해 출발한다. 그리고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를 건너다가 추락하여 죽음을 맞이한다. 2부의 이야기다.
3부는 수녀원 문 앞에 버려진 바구니 안에 누워 있던 쌍둥이 형제 이야기다. 쌍둥이 마누엘과 에스테반은 수녀원장의 손에 길러졌고 자연스레 수녀원과 그 주변에서 자랐다. 가족도 없는 데다 쌍둥이였기에 둘은 자기들만의 비밀 언어까지 고안하여 서로 소통하곤 했는데 그 때문에 둘은 깊은 일체감을 느꼈다. 어느 날 여배우 페리촐레가 마누엘을 찾아와 편지 대필을 부탁한다. 마누엘은 그녀를 몰래 숭배하고 있었다. 재방문한 페리촐레가 마누엘과 함께 있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에스테반은 묘한 감정을 느낀다. 시기, 질투 비슷한 것이었다. 둘 사이에 처음 겪는 관계의 위기였다. 에스테반은 마누엘에게 페리촐레와 사랑에 빠지라고, 자기는 마누엘에게 방해만 된다는 말을 하게 되고, 마누엘은 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며 페리촐레와의 관계를 끊겠다고 응답한다. 그러다가 마누엘은 쇳조각에 부딪혀 무릎이 찢어지는 사고를 겪고 앓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홀로 남은 에스테반은 충격에 사로잡혀 방랑을 하게 되고 수녀원장이 보낸 알바라도 선장 말을 듣고 페루를 떠나 외국으로 향하기로 한다. 에스테반이 선장과 함께 가기로 결정한 건 선장의 회유에 넘어갔다기보다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떠나는 날, 선장은 물건의 운반을 감독하기 위해 다리 아래 강으로 내려갔고, 에스테반은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를 건너다가 다리와 함께 추락한다.
4부는 여배우 페리촐레의 노래 선생이자, 미용사이자, 안마사이자, 대본을 읽어주는 사람이자, 심부름꾼이자, 물주이자, 아버지 역할까지 도맡았던 피오 아저씨의 이야기다. 피오 아저씨는 페리촐레를 유명한 여배우로 성장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페리촐레를 향한 그의 입장은 도우미를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연기에 천재성을 가졌던 페리촐레는 그의 가르침과 양육 스타일을 다행히 받아들이고 성장을 이뤄냈지만, 결과가 좋다고 해서 피오 아저씨의 방법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었다. 그는 페리촐레의 성공 덕을 톡톡히 보았지만 그녀에게 진실된 사랑을 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성공 이후 아이까지 낳은 후 페리촐레는 천연두에 걸리게 되면서 그것을 계기로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은둔 생활을 자처하게 된다. 피오 아저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리촐레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녀를 스페인으로 데려가 다시 연기를 시킬 생각이었다. 페리촐레는 생각이 달랐다. 다시 연기를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끈질긴 피오 아저씨는 끝까지 포기하지 못한다. 그녀 대신 그녀의 아들 하이메를 데리고 가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제2의 페리촐레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리라. 페리촐레는 아들에게 결정권을 넘기게 되고, 아들 하이메는 다음날 피오 아저씨와 함께 떠나게 된다. 피오 아저씨는 신이 났던 모양이다. 하이메를 목말 태운 채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를 건너다가 하이메와 함께 그리고 다리와 함께 추락하여 죽음을 맞이한다.
다섯 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도냐 마리아 몬테마요르 후작 부인, 페피타, 에스테반, 피오 아저씨, 그리고 하이메. 다시 주니퍼 수사의 질문으로 돌아온다. 왜 하필 이 다섯 사람이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붕괴로 인한 추락사의 주인공이 되었을까? 다섯 사람의 삶에서 공통점을 찾으면 혹시 답에 근접할 수 있지 않을까? 저자 역시 같은 생각이었던 것 같다. 2-4부를 마무리하는 부분에서 저자는 다섯 사람 모두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시기가 공교롭게도 1714년 7월 20일 정오였음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와 다른 삶, 생각만으로 멈추지 않고 신중히 결단하여 그 도약을 위해 옮긴 실천의 첫걸음이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위였다는 것. 새로운 시작이 곧 죽음으로 이어졌다는 해석은 나를 섬뜩하게 만든다. 나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단순한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기막힌 사건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운명의 장난인 걸까? 신의 계획은 아닐까? 도대체 이들은 왜 죽어야 했을까? 왜 하필 이들이었을까? 왜 하필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고 행동에 옮긴 첫날 죽어야만 했을까? 답은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적어도 저자의 의도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 5부의 제목은 '어쩌면 신의 의도'이다. 붕괴된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를 대신하여 새로운 다리가 세워졌다. 화자는 주니퍼 수사가 화형에 처하기 전 완성한 책을 언급한다. 그러나 자세히 소개하지는 않겠다면서 그가 이끌어 낸 귀납적 결론들은 늘 우리 곁에 있는 것들이라는 모호한 말을 남긴다. 그러나 바로 그다음 문장이 그것을 말하고 있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쓴다. "그는 그 사고에서 악한 사람에게 파멸이 닥친 것과 선한 사람이 일찍 천국의 부름을 받은 것을 모두 보았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향한 객관적인 교훈으로, 오만함과 부유함이 저주받는 것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리마의 교화를 위해, 겸손함이 최고로 인정받고 보상받는 것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니퍼 수사는 자신의 추론에 만족할 수 없었다. 몬테마요르 후작 부인이 탐욕의 괴물이 아니고, 피오 아저씨가 방종의 괴물이 아닐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주니퍼 수사의 추론에 대한 화자의 추론 뒤에 숨은 저자의 메시지는 아마도 "모른다"일 것이다. 이 책을 여는 1부의 제목이 '어쩌면 우연', 이 책을 닫는 5부의 제목이 '어쩌면 신의 의도'라는 점도 이를 뒷받침하는 듯하다.
저자의 숨은 의도는 5부 뒷부분에서도 등장한다. 추락사를 당한 다섯 사람을 측근에서 그들을 가장 잘 기억하는 사람들을 등장시킨다. 도냐 마리아 몬테마요르 후작 부인의 딸 도냐 클라라. 페피타를 어릴 때부터 점찍어두고 자기 뒤를 잇게 할 야심을 품었고, 에스테반을 바구니에 담긴 아기 때부터 길렀던 수녀원장. 피오 아저씨 덕분에 성공한 여배우가 되었고, 하이메라는 이름의 아들을 두었던 페리촐레. 저자는 왜 살아남은 이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만들었을까? 답은 책 마지막 페이지에 나오는 수녀원장의 생각에 담겨 있다. 키워드는 '기억'이다. 죽은 자들을 기억하는 산 자들. 누군가에게 기억된다는 것의 의미가 이토록 무거웠던 걸까? 저자는 수녀원장의 생각을 통해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죽은 자들을 기억하는 산 자들 역시 곧 죽을 것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짚은 뒤 우리 자신도 한동안 사랑받다가 잊힐 것이라는 자명한 진실을 다시 적는다. 그리고 말한다. 그 정도 사랑이면 충분하다고, 사랑을 위해서는 기억조차 필요하지 않다고. 산 자들의 땅과 죽은 자들의 땅이 있고, 그 둘을 잇는 다리가 바로 사랑이라고. 오직 사랑만이 남는다고. 오직 사랑만이 의미를 지닌다고.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나자 추락사를 당한 다섯 사람의 공통점이 하나 더 생각이 났다. 그건 모두 진정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거나 주지 못했다는 것. 어머니인 도냐 마리아가 딸인 도냐 클라라를 향해 시종일관 쏟아부었던 자기 안에 갇힌 이기적인 사랑, 무릎이 다쳐서 죽은 마누엘과 살아남아 방랑을 했던 에스테반 사이의 미성숙한 사랑, 그리고 피오 아저씨의 여배우 페리촐레를 향한 야심 깃든 일방적이고 어쩌면 폭력적이었던 사랑. 그들의 새로운 시작을 위한 결단은 곧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고 싶은 열망의 결정체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사랑을 위해, 아니 사랑만을 남기기 위해 야속하게도 저자는 그들을 죽여야만 했던 걸까? 누군가를 기억하고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사람은 가도, 그들 사이에 존재했던 사랑만은 남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방법으로 죽음만이 유일했을까? 석연찮은 결론으로 치달아 답답한 마음이지만, 나는 그렇다고 마지못해 대답하려 한다. 그러면 적어도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는 신의 심판대도 기막힌 우연의 장소도 아닌 그저 하나의 다리로, 모든 형태의 사랑을 다 품는, 그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잇는 어떤 상징으로 채색될 수 있을 테니까. 다리가 붕괴되고 사람이 죽은 후에도 새 다리가 세워지고 그 위로 또 사람들이 지나다닌다. 사람의 기억도 기록도 한동안은 살아 있겠지만 끝내 사라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다리는 남고 사람도 남는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또 다른 사랑의 이야기가, 여러 형태를 가진 사랑의 이야기가 깃들게 될 것이다. 이런 해석을 하게 될 때, 저자가 마지막 페이지에서 사랑만은 남을 것이라고 하는 말은 명제적 진술이 아닌 믿음이 된다. 나도 그 믿음에 동참한다. 사랑의 영원성을 믿는다. 그리고 내게도 죽음이 이르기 전에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기로 다짐하며 사랑의 영원성을 사랑의 현재성으로 가져오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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