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헤세정여울 저, '헤세'를 읽고우리나라에서 정여울만큼 헤세를 대중에게 널리 알린 작가가 또 있을까. 헤세 선집을 두 번째 읽어 나가고 있는 나로서는 정여울 작가를 지나칠 수 없었다. 한국 들어오자마자 '헤세로 가는 길'을 구해서 읽었다. 그 책에서 정여울 작가는 헤세가 거주했던 독일과 스위스를 여행하며 자신만의 단편적인 감상과 해석을 남겼고, ’수레바퀴 아래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데미안‘, ’싯다르타‘, 이렇게 네 작품에 대해서는 융의 정신분석학적 통찰을 빌려 전문가다운 서평을 남겼다. 2년이나 지났지만 지금도 그 책을 떠올리면, 헤세의 흔적을 쫓으며 치열하게, 그러나 정갈하게 글을 써낸 정여울 작가의 설렘 가득한 마음이 느껴지는 듯하다. 헤세를 읽으며 내면의 치유를 경험했고, 헤세를 ..

Embrace: 내면의 야생을 사랑하기크리스타 K. 토마슨 저, '악마와 함께 춤을'을 읽고분노, 시기, 질투, 앙심, 경멸. 듣기만 해도 몸서리치는 사람도 있을 테다. 흔히 우리가 부정적인 혹은 나쁜 감정이라고 하는, 그래서 없애야만 하고, 없앨 수 없으면 피해야 하고, 피할 수 없으면 인내심을 발휘하여 적절히(?) 억눌러야 한다고 느끼는 것들이다. 그러나 과연 이런 감정들이 정말 나쁜 것일까? 정말 우리와 우리 삶을 위협하거나 파괴하는 것일까? 혹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책은 그 누명을 벗기고 본래의 의미를 회복시키며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삶, 균형 잡힌 삶, 깊고 풍성한 삶을 위해 이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건강한 정원에는 지렁이가 산다. 지렁이는 비 온 다음날 눈에 잘 띄..

다시, 하나님이 흔적이 드러나는 삶전신근, 제행신 공저, '이런 결혼, 어때?'를 읽고기다리던 택배 상자를 뜯자마자 책이 아닌 책과 함께 동봉된 저자의 손편지에 손이 먼저 갔다. 정성이 느껴졌다. 아무리 작더라도 작가의 진심은 독자에게 적지 않은 감동을 주는 법이다. 얼마 만에 받아보는 손편지인가 하며 나는 가능한 천천히 읽었고, 아쉬워서 또 한 번 읽었다. 이 편지를 쓰기 위해 저자가 독자 한 분 한 분을 마음속에 떠올리며 보냈을 시간들이 그려졌다. 감사가 일었다. 갓 출간된 이 책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2023년 10월 초 상봉몰에서 저자를 딱 한 번 뵌 적이 있다. 내 세 번째 저서 출간 기념으로 열린 조촐한 북토크에 일부러 발걸음을 해주신 날이었다. 남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내어 주..

한강 작가와 작품을 듣다한강 저, ‘빛과 실’을 읽고손바닥 만한 크기에 백육십 페이지 남짓 되는, 여백도 많아 왠지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읽으며 그 공간을 채워 넣어야 할 것 같은 이 책은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과 소감, 미발표된 여러 편의 시, 산문, 일기들을 담고 있다. 한강 작가의 주요 작품만 읽어본 독자로서 함부로 일반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한강 작가의 글을 읽을 때마다 느껴지는 진지한 적적함과 읊조리는 듯한 농밀한 텍스트들은 소설이 아닌 산문에서도 여전했다. 한강 작가 특유의 문체를 맛보는 것만 해도 즐거운 독서였다. 그러나 내가 주의 깊게 읽었던 부분은 수상 강연문이었다. 작가가 직접 말해주는 여러 작품들 (‘채식주의자’부터 ‘작별하지 않는다’까지)의 해제랄까, 탄생 배경이랄까, ..

지혜에 이르는 길에 대한 평신도 과학자의 통찰프랜시스 콜린스 저, '지혜가 필요한 시간'을 읽고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던 창조과학은 생물학자이자 그리스도인인 내게도 뱀처럼 다가와 그 매력을 발산했다. 나는 잠시 그 매력에 심취했고,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성경지식과 그 당시 아직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던 과학지식 사이에 생겼던 모호한 괴리로부터 해방받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정직하게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조금만 더 과학지식을 객관적으로 습득하자 창조과학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창조과학은 과학이라는 껍데기를 쓰고 있을 뿐 결코 과학이 아니었다. 고급스러운 표현을 사용하자면 유사과학일 뿐이었다. 어떤 신념 혹은 신앙에 경도되지 않고 객관적이고 이성..

고요한 읽기는 곧 작가의 삶이승우 저, ‘고요한 읽기’를 읽고‘생의 이면‘으로 처음 만난 이승우는 내게 이질감을 안겨주었던 작가다. 그의 낯선 문체, 이를테면 번복되고 되뇌고 산만하기도 하고 단정치 않고 늘어지는 느낌을 주는 그의 글쓰기가 거슬렸다. 안정효와 신형철이 말하는, 동시에 나도 지향하는, ‘정확한 글쓰기’와 대조되어 내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고요한 읽기’는 산문집이다. 소설에서 이질감을 주었던 이승우의 문체가 산문에선 의외의 매력을 띄고 내 앞에 나타났다. 잘 잡히지 않던 문장들이 그의 문체 덕에 더 잘 이해가 되었고, 단문들의 반복은 강화와 심화 효과뿐만 아니라 친절함과 다채로움까지 리드미컬하게 자아냈다. 이승우의 진면목을 나는 이제야 보게 된 것인가. 이 책은 읽기가 읽기와 쓰기를 낳..

이야기보다 이야기꾼이 더 드러나는 작품무라카미 하루키 저, ‘일인칭 단수’를 읽고1. 돌베개에하루키의 작품을 많이 읽어보진 않았지만, 거기엔 어떤 공통된 정서가 흐르는 것 같다. 이 짧은 단편을 읽고도 동일한 걸 느꼈다. 몇 단어로 표현할 수도 있을 텐데, 이를테면, 죽음, 문학, 환상, 섹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어리숙하고 어설픈 남자 주인공 등이다. 언뜻 잘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이 키워드들은 하루키의 사상 혹은 철학을 대변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관념과 통속의 조화를 도스토옙스키 덕분에 진하게 맛보았던 나는 하루키 역시 그만의 독특한 방식과 고유한 문체로 소설을 쓰는, 현대문학의 거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물론 도스토옙스키와 비교하면 깊이랄까, 통찰이랄까 하는 측면에서 내게 하루키는 가볍게 느껴지..

지경을 넓히는 작품을 만나다최진영 저, ‘구의 증명’을 읽고기발한 발상, 기구한 사건, 독특한 전개. 고전문학과 구별된 현대문학의 특징이라 생각한다. 모든 이야기에는 얼마간의 진실이 담겨 있다고 믿는 나는 개인적으로 진부하리만큼 뻔하디 뻔한 이야기 속에서 빛바랜 진리에 다른 빛을 비춰 재발굴해 내는 고전문학을 선호한다. 그런 이유로 한국 현대문학은 즐겨 읽지 않는 편이다. 상상력을 키우고 참신하고 기발한 착상을 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그러한 구도 혹은 설정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배보다 배꼽이 큰 상황 내지는 서론만 거창하다가 본론은 흐지부지해지는 상황을 자주 유도해서 소탐대실을 초래하는 걸 자주 봐왔고, 또 그런 작품들에 대한 실망도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 만나는 작가 최..

정갈함과 고요함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고독과 외로움한정원 저, ‘내가 네 번째로 사랑하는 계절’을 읽고두 번째로 만나는 한정원의 에세이다. 정갈한 문장들이 다시 내 마음속에 차곡차곡 담긴다. 시끄러웠던 내 마음도 마침내 고요다. 몸도 마음도 분주한 일정이었다. 부산을 오가는 열차 안에서 가쁜 숨을 돌리기 위해, 벌써 반년간 가방 속에 잠자고 있던 이 책을 꺼내 들었다. 8월 1일을 여는 첫 에세이부터 할 말을 잃었다. 시인의 낯선 문장들은 그림이 되어 눈앞에 펼쳐졌고, 그 그림에선 오래 묵은 향이 났다. 몸은 낯설지만 마음은 익숙하고 편안한, 오래된 숲의 향이었다. 나는 시인과 함께 숲 속에서 죽비 소리와 시시오도시 소리를 들었다. 사찰에서는 종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 소리들 사이를 가득 채우고 있던,..

정착과 떠남의 경계헤르만 헤세 저, '크눌프'를 다시 읽고7년 전 크눌프는 산소, 천사, 혹은 닮고 싶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이번엔 달랐다. 내가 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다. 재회한 크눌프는 한없이 애처로워 보였다. '자유'를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겉으로 드러난 그의 삶보다, 드러나지 않은, 혹은 드러낼 수 없었던 그의 삶의 여집합이, 그 여백이 훨씬 크게 와닿았기 때문이다. 그가 애써 채워 온 삶이 아닌 그가 끝내 채우지 못했던 삶에서 나는 깊고 깊은 외로움을 읽을 수 있었다. 크눌프에게 동경이 아닌 강한 연민을 느꼈다. 인간은 정착과 떠남의 무한반복을 살아간다. 정착은 안정을 선사하지만 그 안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주 올무로 바뀌곤 한다. 떠남은 불안을 야기하지만 그 불안은 종종 삶을 ..

카라마조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 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다시 읽고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 대작을 다시 읽게 되어 영광이라는 말을 꼭 남기고 싶다. 읽고 싶은 마음만으로는 결코 읽을 수 있는 작품이 아니거니와 물리적인 시간이 허락된다고 해서 읽어낼 수 있는 작품도 아니기 때문이다. 함께 읽고 나누는 독서모임 가족들이 없었다면 삼독은 불가능했으리라.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뒤 한동안 가만히 눈을 감고 고요 속에서 내게 홍수처럼 밀려든 감동과 긴 여운이 내 안에 가능한 오래 머물기를 나는 기도했다. 고전문학 중에서도 천 페이지를 육박하거나 가뿐히 넘기는 작품들을 읽어낼 때마다 느끼게 되는 공통된 정서는, 놀랍게도, 경건함이다. 이는 내가 현대문학보다 고전문학을 더 사랑..

자연의 힘헤르만 헤세 저, '페터 카멘친트'를 다시 읽고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땐 주인공 페터 카멘친트의 성장에 눈이 갔다. 깊은 산골에서 천연의 자연과 동화되어 투박하나 순수하게 자란 한 청년의 내면에 시가 깃들고, 그 시가 사람과 사랑, 삶과 죽음을 경험하며 조금씩 성숙해져 가는 과정에 주목했었다. 특히 글 쓰는 사람, 즉 작가로 성장해 가는 이야기여서 그랬는지 나는 페터로부터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다. 나도 작가가 되고 싶었다.그로부터 7년이 지났다. 나의 외부세계는 물론 내부세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글쓰기모임과 함께 이 작품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자연의 힘에 더 큰 매력을 느꼈다. 반면, 페터의 성장 이야기는 예전보다 공감하기가 어려웠다. 나 역시 성장하고 성숙했다고 여겼건만, 실은 그저 허무..

도스토옙스키에게 뻬쩨르부르그란?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뻬쩨르부르그 연대기‘를 읽고한국어로 번역된 도스토옙스키 작품을 거의 다 섭렵한 이 시기에 ‘뻬쩨르부르그 연대기’를 읽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뻬쩨르부르그가 도스토옙스키에게 어떤 의미인지 이 작품을 읽고도 풍성하게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성 베드로의 도시'라는 뜻의 상트 페테르부르크 (열린책들에서는 '뻬쩨르부르그'로 표기한다)는 도스토옙스키의 거의 모든 작품에서 공간적 배경이 된다. 도스토옙스키가 살았던 1821-1881년 당시 뻬쩨르부르그는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고 소련이 들어서며, 1918년 수도가 200년 만에 다시 모스크바로 복귀하면서 뻬쩨르부르그는 제2..

늪에서 삶으로헤르만 헤세 저, ‘로스할데’를 다시 읽고7년 전 ‘로스할데’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주인공인 화가 요한 페라구트를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가슴으로는 공감할 수 없었다. 특히 가족을 버리고 일을 선택한 그의 결단을 도무지 지지할 수 없었다.다시 이 작품을 읽고 나니 7년 전 나의 관점이 다소 가벼웠을 뿐 아니라 다소 치우쳤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문제를 가족과 일로 나누는 이분법적인 사고에 갇힌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요한 페라구트의 문제는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그가 가족 대신 일을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맥락을 진중하게 고려했을 때 그는 어쩌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한 게 아니라, 유일하게 남은 단 하나의 길을 걸을 용기를 마침내 낸 것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이 두 관점..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수업슈테판 츠바이크 저,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를 읽고슈테판 츠바이크의 작품을 아직 절반도 읽지 못했지만 한 권만 읽고도 나는 그가 예사롭지 못한 필력가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았다. 그의 전작을 기어이 읽어낼 계획이지만 최근에 그의 미공개 에세이집이 출간되었다고 해서 구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책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과 브라질로 건너간 이후, 그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전 2년 동안 남긴 기록을 담고 있다. 그래서일까? 짧지만 묵직한 기분이었다. 완독을 하고 두 가지를 느꼈다. 하나는 역시 비범한 필력가라는 확인, 다른 하나는 책장에 꽂힌 그의 작품을 서둘러 읽어보고 싶은 욕구였다. 원주로 오가는 짧은 여정에서 남긴 감상을 옮긴다.1. 걱정 없이 사는 ..

인간의 다른 이름, 미성년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미성년‘을 다시 읽고나에게도 ‘이념‘이 있었다. 그 이념은 하나의 진리처럼 나에게 빛을 비춰주었고, 비밀스러운 힘을 공급해 주었으며, 그것으로 인해 나는 은밀한 자신감도 얻을 수 있었다. 그 이념이 향하는 목적만 달성하면 세상 따윈 다 감당해 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고 무엇이든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나름대로의 왕이었다. 문제는 그 왕좌가 좁디좁은 '나'라는 우물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도 바로 그 우물 안에서 제작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이념은 나의 빈약한 내면을 풍선처럼 부풀려주었고, 그래서 바닥에 붙어 있으나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을 뿐만..

관념과 몽상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여주인‘을 읽고금세 바닥날까 두려워 아껴왔던 도스토옙스키 작품 하나를 조심스레 까먹었다.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다 읽는다는 건 멋진 일이다. 그러나 이제 내겐 슬픈 일이기도 하다. 몇 페이지 되지 않는 단편까지 포함하여 열린책들에서 번역된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개수는, 내가 파악하기로는, 모두 서른다섯인데, 이번에 읽은 ‘여주인’을 빼면 이제 네 작품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문호의 작품을 읽어나가는 성취감이 남모를 아쉬움으로 변한 지도 벌써 오래되었다. ‘도스토옙스키와 저녁식사를‘ 독서모임과 함께 내가 선별한 총 열다섯 편의 대표작을 재독하고 있는 것도 어쩌면 곧 맞닥뜨릴 상실로 인한 슬픔, 즉 읽지 않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이 사라질 시기를 늦추..

아빠는 가장 훌륭한 베드타임 스토리텔러옥명호 저, '아빠가 책을 읽어줄 때 생기는 일들'을 읽고아이가 태어나고 기어 다닐 무렵부터 아이와 놀아줄 땐 항상 책이 있었다. 그림이 전부이거나 글자라곤 단어 하나 정도 있는 책이었지만. 돌이 지나고 걸어 다니기 시작할 때에도 퇴근하면 씻고 아이를 목욕시킨 후 방바닥에 앉아 다리 사이에 품고 간단한 책을 읽어줬다. 그러면 쉬지 않고 움직이던 아이는 가만히 아빠의 품 안에 앉아 아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미국으로 건너가 아이가 네 살이 되었을 때부턴 본격적으로 매일 자기 전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그 후 3년간 떨어져 지내던 아내가 내 역할을 대신하게 되면서 그만두었는데 그때가 이미 ‘베드타임 스토리' 4년 차가 된 시기였다. 갑자기 영어를 사용한 ..

불투명하고 불완전한 인생에서 온전함을 경험하는 삶마르바 던 저, '안식'을 읽고한 해의 마지막 날 이 책을 손에 들고 생각에 잠겼다. 모든 것이 멈추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 시간을 아껴서 하나라도 더 채워 넣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그 생각들로부터 오는 강박으로 인해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또 쫓기고 있었던 것 같다. 쫓는 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쫓기는 자는 자신이 쫓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법이다.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일단 멈추는 것이다. 자기 객관화는 멈춘 다음에 온다. 쫓는 자의 정체를 파악하는 건 또 그다음이다. 멈추니 깨달아졌다. 아, 내게 필요한 건 안식이었구나.내가 아닌 남을 향한 삶을 살겠노라고 다짐을 하고 나름대로 그 모토에..

상상력을 넘어서는 모호함무라카미 하루키 저,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고무려 761 페이지 장편소설을 8시간 정도에 독파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하루키의 필력 때문일 것이다. 역시 하루키는 타고난 이야기꾼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작품들을 수차례 시도만 했을 뿐 이 작품을 포함하여 지금껏 네 편밖에 읽지 않았는데 거기에 내 본심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너무 유명해서일지도 모르겠지만, 하루키 작품은 다분히 관념적이고 몽환적이며 이 작품의 핵심 메시지라고 생각되는 '현실과 비현실이 중구난방으로 섞여 있는 모호함'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그의 작품을 끝내 읽지 않게 되는 나를 설명하기에 더 적절하지 않나 싶다. 여기서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단어는 '모호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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