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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기억, 그리고 사랑

김연수 저,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읽고

이토록 평범한 미래
동반 자살로 인해 사랑하는 두 사람은 임사체험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그 두 번째 삶은 시간이 거꾸로 간다. 속도는 같으나 방향이 반대다. 오늘 밤을 지나면 내일이 아니라 어제가 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그들이 처음 만났던 날까지 두 번째 삶을 거꾸로 살게 된다. 그들이 처음 만날 때 서로를 바라보던 그 사랑스러운 눈빛과 가슴 벅찬 얼굴, 그 설레던 마음까지 그대로 다시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세 번째 삶이 시작된다. 이번엔 시간이 다시 반대로 간다. 동반자살하기 전과 같은 시간을 다시 살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두 번째 삶이 이미 서로가 경험한 삶을 하루하루 다시 되짚어가는 것이었다면, 세 번째 삶은 첫 번째 삶을 두 번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미래를 알고 있기에 세 번째 삶은 첫 번째 삶과 다를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미래의 기억을 가졌기에 현재를 충만히 살아낼 수 있는 것이다.

이 단편소설 속에 소개되는 이야기, 그러니까 책 속의 책 이야기에 나는 이 작품의 핵심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시간 여행을 통해 알게 되는 현재의 소중함. 지금, 여기에서의 삶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순간들의 연속이며 우리가 실제로 살아내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하다. 그것이 터무니없이 평범하더라도, 그것이 과거의 내가 바라던 모습이 아니더라도, 그것은 내게 주어진, 내가 살아내야 할 고유한 시간인 것이다.

이 메시지는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 주인공이 시간 여행을 더 이상 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현재를, 지금, 여기의 삶을 마치 두 번 사는 것처럼 만끽하며 살겠다는 의미심장한 다짐과 맥을 같이 한다. 인생, 그렇게 인상 찌푸리고 아등바등하며 살 필요 없다. 여유 있는 마음으로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을 맛보고 사랑하면서, 즉 현재를 누리면서 살고 싶다.


난주의 바다 앞에서
이 작품의 키워드라고 생각되는 '세컨드 윈드'는 '운동하는 중 고통이 줄어들고 운동을 계속하고 싶은 의욕이 생기는 상태'를 뜻한다. '세컨드'라는 단어로 유추할 수 있듯, 이는 운동 중 고통이 극에 달하는 사점이 지나면 고통이 줄어들 뿐 아니라 호흡도 순조로워지며 계속 운동할 수 있는 상태다. 퍼스트 윈드라고 부를 수 있는, 즉 사점 이전의 의욕이 가득한 때와는 달리 세컨드 윈드는 사점을 극복해 낸 다음이므로 일종의 초월적인 상태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작품 속 김 선생의 말마따나 대학 시절 같은 동아리에서 친구로 지냈던 두 남녀가 삼십여 년이 지나 남해의 한 작은 섬에서 우연히 재회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정현과 은정은 그렇게 낮은 확률로 섬에서 재회했다. 작가인 정현이 중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에 초청을 받아서 섬으로 왔는데 거기서 우연찮게 은정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은정은 더 이상 은정이 아니었다. 손유미라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개명하여 손유미가 된 건 그녀의 인생이 현재 퍼스트 윈드가 아니라 세컨드 윈드를 살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정현은 강연 후 유미에게서 그녀가 어떻게 세컨드 윈드를 살게 되었는지를 듣게 된다. 유미는 정난주라는 조선시대 여인에 관련된 이야기를 각색하여 정현에게 들려준다. 자신의 죽음으로 아들을 살리려는 결연한 의지를 실행으로 옮겼으나 기적적으로 죽지 않고 살아남은 정난주는 하느님을 만나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야만 아들도 살 수 있다는 기도를 드리게 되고 결국 그 기도가 응답되어 두 번째 인생을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정현이 강연 차 찾아온, 그리고 은정이 아닌 유미로 살아가고 있는 바로 그 섬에서 말이다. 은정은 이른 나이에 아들을 잃어 마음에 상처가 컸다. 남편과도 이혼한 뒤 살고 싶은 마음을 잃어 죽고 싶었던 것 같다. 그때가 은정의 인생에서는 사점과도 같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마치 죽을 자리를 찾기 위해 흘러 흘러 어쩌다 그 섬까지 오게 된 은정은 정난주의 바다를 보고는 마음을 고쳐 먹은 것이었다. 그녀 역시 난주처럼 세컨드 윈드를 살기로 다짐했던 것이다.

두 번째 삶. 인생의 사점을 지나 비로소 마음이 평온해진 삶. 유미는 은정이었을 때 바랐던 추리소설을 출간하기도 했다. 사점이 목을 죄어올 때 순응했다면 경험하지 못했을 성취이자 행복이었을 것이다. 은정에서 유미로의 전환은 첫 번째 삶과 전혀 다른 삶을 뜻하진 않을 것이다. 그녀의 두 번째 삶은 첫 번째 삶을 잊지도 버리지도 않고 그대로 끌어안은 채 초월적인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일 것이다. 죽음으로 끝나야만 했다고 여겼던 그녀의 삶이 다시 살아있기를 선택함으로 더 온전한 삶을 살게 된 것이리라. 책을 덮으며 나는 그녀의 삶을 응원하는 마음이 되었다.


진주의 결말
사건의 결말은 나지 않았다. 유진주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홀로 모시다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혐의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했다. ‘사건의 결말‘ 티브이 프로그램이 몰고 가듯 그녀가 능동적이고 계획적인 살인범인지, 아니면 범죄심리학과 교수이자 이 작품 속 화자의 예측대로 수동적인 피해자인지는 결론 나지 않았다. 확실한 사실도 하나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녀가 아버지와 살던 집에 불을 지른 사람이라는 사실은 밝혀졌다. 흥미로운 건 그녀가 자신이 방화범이라는 사실을 숨기려 하지도 않았고 아무런 거짓도 없이 순순히 자백했다는 점이다. 그녀는 그저 소방관들이 불 난 집 유리창을 깨부수는 장면을 보고 속이 시원하다는 느낌과 함께 자유함을 맛보고 제주로 훌쩍 떠났을 뿐이었다. 도주도 잠적도 아니었던 것이다.

작품을 다 읽고도 여전히 모호한 부분이 남는다. 특히 그녀가 불을 지른 이유에 대해서 이 작품은 말을 아낀다. 시원하게 답이 되지는 않지만 그녀가 직접 밝힌 바에 따르면, 그녀는 치매에 걸려 우연히 떠오른 생각을 의심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믿는 아빠의 마음을, 마치 치매에 걸린 것처럼 사전 경고도 없이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는 신의 마음을 이해한 사람처럼 살아보기로 해서, 그래서 불을 질렀다고 한다. 거기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오직 이해만 있었을 뿐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이유는 없고 이해만 있었을 뿐이라니…

선뜻 와닿지 않는 그녀의 대답을 듣고 화자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궁금해진다. 작품의 마지막 단락은 그녀를 따라 들어간 박물관 안에서 내부인지 외부인지 모를 정도로 바람이 불고 있었으며, 유진주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났다고, 귀에 들려오는 건 오로지 바람소리일 뿐이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나는 여러 번 생각을 했지만 아직 이 수수께끼 같은 결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없고 이해만 있는 행동은 그저 무책임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힘을 얻고 있으며, 유진주가 얻은 자유라는 게 과연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사건의 결말은 진주의 결말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주관적인 결론에 이르게 된다.

사건의 결말은 이유를 묻고 따진다. 논리 정연해야 설득력도 높아지는 법이고, 범행과 범인의 관계 또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란 언제나 원인과 결과에 입각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일들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아니, 절반 이상의 일들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거나 우리의 이해가 다다를 수 없는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 같다. 모든 일의 이유를 밝히고 싶은 마음은 이십 대 시절의 몽상일지도 모른다. 이유는 없거나 모르지만 이해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 어쩌면 우리가 현실에서 더 자주 맞닥뜨리는 일들의 본질과 더 가까운 건 아닐까. 바로 이때 진주의 결말은 우리가 처한 현실적 문제와 맞닿게 된다. 일을 일어나고, 이유는 없거나 모르며, 어쨌거나 차후에 이해를 필요로 하는 상황의 연쇄는 곧 우리의 인생이다.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은 시간이었다. 광막하다는 표현도 모자랄 만큼의 사무친 그 시간은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린 아내 정미, 그리고 그녀와 함께 했던 순간들이었다. 폭풍처럼 지나가버린 나날들이 몽골의 사막에서, 그 먼 이국 땅에서 열병이 걸려 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에야 작품 속 화자를 한꺼번에 찾아왔던 것이다. 슬픔은 감정이라기보다는 해석이다. 언제나 지나고 나서야 느껴지는 그 무엇이다. 그러므로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은 슬픔이기도 했다. 지나간 시간, 지나간 사랑, 그리고 늙어버려 아직도 살아있어 아픔을 느끼는 나. 그 모든 생각들이 얽히고설킨 채 울란바토르에서 그를 쓰러뜨리고 펑펑 울게 만들었던 것이다.

먼 기억 속에 묻힌 옛 추억의 이야기가 어느 날 도둑 같이 찾아올 때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속절없이 무너지는 것밖엔 없다. 그 시간이 치열하면 할수록, 애틋하면 할수록 더 그렇다. 새까맣게 잊혔다가 뜬금없이 나타나 모든 시간과 공간을 삼켜버리는 그 압도적인 힘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마지막으로 한 가지 작품 속 화자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 얼마나 사랑했기에 바얀자그까지 가서야 그 기억의 성벽이 무너졌느냐고, 얼마나 그녀 없는 삶을 연극하듯 살아왔기에 그렇게 속절없이 무너질 수 있었느냐고. 답을 듣지 못한 나는 그저 애도할 뿐이다.


엄마 없는 아이들
상실을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상실인 걸까? 상실감을 느끼고 고립을 경험한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상실을 경험한 다른 사람인 걸까? 코로나 예방접종을 위해 명준이 방문했던 병원에서 명준을 알아보고 편지를 보낸 혜진으로 인해 명준은 대학 시절을 회고하게 된다. 명준은 한때 혜진에게 잠시 사랑을 느낀 적도 있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해, 명준은 연극단에서 혜진을 처음 만났고 해변에서 혜진 역시 어머니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동병상련을 느낀 명준은 혜진에게서 적잖은 위로를 받았으리라.

현재의 명준은 그때를 회상하며 생각한다.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이 연극이 끝나고 함께 사라져 버린 혜진을 잃어버림과 함께 영영 떠나버렸다는 것을. 상실은 그 상실을 잠시 채운 것 같았던 그 어떤 것의 잃어버림과 함께 잊히게 되는 걸까.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
이 작품 또한 어느 날 문득 날아든 편지 한 통이 이야기를 이끈다. 십여 년 전 만나 인디 밴드를 결성하여 활동하다가 일본으로 둘이서 여행까지 갔던 희진으로부터 온 긴 편지였다. 보낸 곳 주소는 한국이 아니라 일본의 요쓰야였다. 희진은 K-Culture진흥회로부터 한국 인디 가수 대표로 초대되어 일본 요쓰야에 위치한 한국문화원에서 열린 공연에서 여덟 곡을 부른 후에 편지를 써서 보낸 것이었다. 편지에 적힌 자초지종은 한 편의 소설과도 같았다. 희진과 함께 여행했던 해, 스피커로부터 들려오는 '하얀 무덤'이라는 노래에 이끌려 찾아온 한 일본인이 희진의 서명이 남겨진 카페 방명록을 주인 몰래 찢어 간직하다가 많은 세월이 흐르고 나서 그 서명에 의지하여 희진일지도 모르는 한국 인디 밴드 가수를 초대했던 것이다. 그 일본인은 그 당시 자살을 결심한 상태였는데, 우연찮게 들려온 '하얀 무덤'이라는 노래 덕분에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한다. 희진은 그저 그 노래가 담긴 CD를 카페 주인에게 틀어 달라고 부탁했을 뿐이고, 또 깜빡하고 CD를 찾아가지 않았을 뿐인데, 그 실수인지도 모를 우연이 한 일본인 영혼에게 구원의 통로가 되었던 것이다. 그 구원의 기쁨을 보답하고자 그 일본인은 자수성가한 이후 계속해서 희진을 찾다가 기어코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희진은 작년 혼자서 배 타고 제주도로 가던 밤을 떠올린다. 인천부터 제주까지 긴 여정 중 출항 직후부터 멀미 때문에 고생했던 그 밤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를 이야기한다. 작품 속 화자와 함께 갔던 일본 여행 중 가와무라기념미술관에서 본 마크 로스코의 벽화 연작들을 떠올리며 노래를 부르다가 그 노래의 뒷부분 가사가 마음에 들어서였다.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라는 가사. 희진은 그 가사에 빠져 흥얼거리며 그 고약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자살의 문턱에서 한 사람 희진을 찾겠노라고 많은 세월을 보낸 그 일본인을 떠올리며 희진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희진에게 한 사람이란 누구였을까? 카페 방명록에 희진에게 프러포즈를 하는 듯한 글귀를 써놓은 그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희진의 편지는 작품 속 화자에 대한 사랑을 회상하는 것이었을까?


사랑의 단상 2014
이 단편소설 역시 지나간 사랑에 대한 기억을 기술한다. 사랑하는 대상은 과거에 머물 뿐이고 그래서 사랑도 끝난 것 같지만, 그 시간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종종 작품 속 화자의 현재 일상 속으로 침투하여 상념에 잠기게 만든다. 사랑은 기억되는 한 끝나지 않는 것일까? 그렇다면 기억하려고 애쓰는 행위는 그 사랑에 영원성을 부여하는 것일까? 혹시 그건 더 이상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야 되는 건 아닐까?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게 되어도 남아 있는 옛사랑에 대한 기억 때문에 그 사랑은 결코 완전히 새로울 수는 없다는 말일까? 여러 해석되지 않는 질문들이 남는 작품이다.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
임종을 앞둔 할아버지의 기억 속에는 세 명의 바르바라가 있다. 시대를 달리하지만 이 세 명의 바르바라는 공교롭게도 어떤 신앙 혹은 신념 때문에 명을 다하지 못하고 타인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작품의 주제를 고려하며 이를 바라보면, 육체의 삶은 연결되지 않지만, 정신적 삶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이어진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육체는 이번 생을 살다갈 뿐이지만, 정신은 전해지는 이야기와 기억으로 말미암아 이전 생과 다음 생까지도 살아있다는, 다소 상상력이 필요한 해석도 이 소설은 요구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만큼은 이 소설집을 이루는 나머지 일곱 편의 단편소설처럼 시간고 기억이 만들어내는 어떤 이야기의 일환이라는 것만 이해할 수 있을 뿐, 정작 저자 김연수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는 모호하기만 하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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