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채로운 여백들을 텍스트로 그려내는 작가, 클레어 키건클레어 키건 저, ‘푸른 들판을 걷다’를 읽고- 작별 선물성인이 된 한 여성이 미국 뉴욕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영국 시골집에서 가족과 작별하는 순간을 롱테이크로 담은 초단편소설. 생리를 하기 전 얼마 동안 그녀의 이버지는 그녀에게 당연하다는 듯 성추행을 일삼았다. 어머니는 남편을 혐오했지만 거부할 수 없었다. 오빠는 아버지를 뒤이어 아버지와 함께 농사일을 한다. 그녀는 오빠나 언니처럼 기숙학교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집안일을 거들어야 했다. 모든 게 다 아버지의 지배 하에 있었다. 그곳에 머문다는 건 곧 아버지로부터 영영 벗어나지 못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뉴욕행을 결정한 건 이미 정해진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공항으로 가는 날 아침, 그..
처음 만나는 김애란김애란 저, '그랬다고 적었다'를 읽고정갈한 문장들을 마주할 때마다 느꼈던 희열을 기억한다. 그런 문장들을 찾아다니며 어떤 작가에 한동안 머무르기도 했다. 문장으로 이루어진 비옥한 토양을 만날 때면 나는 뿌리를 깊게 내려 마치 모든 영양분을 흡수하려는 듯 게걸스럽게 그 문장들을 탐닉했다. 노트에 적고, 소리 내어 읽기도 하고, 외우기도 했다. 살다 보면 마음을 안정시킬 문장들이 필요할 때가 있고, 움켜쥘 만한 문장들이 필요할 때가 있다. 읽고 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집착을 아마 비슷한 모양으로 가지고 있지 않을까. 온라인 서점이 아닌 오프라인 서점에 갈 때마다 즉흥적으로 책을 사게 되는데, 이번에 내 손에 들어온 책 중 하나가 김애란의 산문집 '그랬다고 적었다'였다. 수년 전..
항해사가 아닌 난파선의 선장들에게김새섬, 김진경 공저, ‘난파선의 선장들‘을 읽고인생을 항해에 비유하면서도 인간을 항해사가 아닌 '난파선의 선장들'이라 부르는 이 범상치 않은 책은 2025년 4월부터 악성 뇌종양(교모세포종)으로 투병 중인 지식 공동체 ‘그믐’ 김새섬 대표의 인터뷰집이다. ‘당장의 삶, 다가올 죽음, 그 사이를 채운 책에 관한 216일간의 대화’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인터뷰는 스위스에 거주하는 김진경 작가가 진행했다. 인생을 단순히 항해라고만 여길 때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그림은 단 하나였다. 그 그림 속의 나는 망망대해를 항해 중이다. 파도가 넘실대지만 충분히 헤쳐나갈 만해 보인다. 옆에는 돌고래 무리도 보이고, 햇살은 바다에 반사되어 눈을 찌른다. 나는 흰 반바지, 푸른 셔츠, 선글라..
좋은 이웃, 동네책방정해연 저, ‘결백’을 읽고- 수북강녕 단편집, '하늘이 참 아름답다고 말할 것' 중 세 번째 소설마지막으로 안녕을 비는 한자어 ‘녕‘을 부여받은 소설이다. 역시 내겐 처음 읽는 작가의 글이었다. 앞의 두 작품과는 달리 범죄소설이었다. 설마 했던 반전이 그대로 일어나 맥이 좀 빠지기도 했지만, 단편소설의 장점을 잘 살린 데다 흡입력이 뛰어나 이 수북강녕 단편집의 마지막 주자로 손색이 없었다. 소설 속 수북강녕은 친모 살해가 일어나기 전 부녀가 들른, 식당을 제외한 마지막 장소로 등장한다. 지금의 창덕궁 옆이 아닌 은평 한옥마을에 위치했던 옛 수북강녕이다. 소설에서 수북강녕 대표는 동생 서희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풀뿌리라도 잡으려 안달 난 언니 진희에게 그날 오후 모녀의 모습이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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