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감수에 이름을 올린 따끈따끈한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추천사도 함께 썼는데, 이 책 소개를 저의 추천사로 대신합니다. 제가 읽어본 과학과 신앙 사이의 고질적인 문제 해결에 대한 책 중에서 저는 단연 이 책을 손꼽고 싶습니다. 창조과학이니 창조론이니 유신진화론이니 여전히 시끄러운 이 시대에 이 책이 마음을 시원케 하는 효과를 내리라 생각합니다. 일독을 꼭 권합니다. 추천사 아담과 게놈 하나님을 더 알고자 하나님이 저자이신 두 책, 성경과 자연을 진지하게 읽어나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언젠간 묻게 된다. 더욱이 과학 시대를 살아가며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고 자유함을 얻은 모든 그리스도인이라면 두려워하지 말고 겸손하게 물을 필요가 있다. 아담은 오늘날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의 생물학적 조상인가? 아담과 하와는..
발생과 창조 그리스도인들에게 묻겠습니다. 사람은 만들어지는 걸까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걸까요? 혹시 이 질문 앞에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느끼시진 않았나요? 제가 대답을 해보겠습니다. 먼저, 생물학자로서의 대답입니다. 사람은 만들어집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대답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자, 어떤가요? 이 두 대답이 모순된다고 여기시나요? 그렇다면 과학과 신앙은 모순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과학과 신앙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생물학자로서의 대답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대답 역시 모순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만들어지고, 또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제가 서두에서 던진 질문 앞에서 우린 하나를 택해야만 하는 압박을 전혀 느끼실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가..
두려움 눈에 보이지 않는 진리를 믿고 자유함을 얻은 사람이 눈에 보이는 명백한 사실을 두려워하고 그것을 부인하고 그것을 인정하거나 알길 원하는 사람들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막아 나서는 세태를 본다면 나는 그 사회를 여전히 무속에 잡혀 있다고 말할 것이다. 아마 스스로는 무속이 웬 말이냐 할지도 모른다. 자부심에 찬 채 평생 가져온 신앙 혹은 믿음 혹은 세계관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무속이라는 말을 취소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당신은 두려워한 것이고 부인한 것이고 은폐하려 한 것이다. 당신이 말했듯 이런 행위는 당신이 평생 가져온 신앙 혹은 믿음 혹은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 당신이 하나 놓친 게 있다. 당신이 평생 가져왔던 그것들이 완전하다고 믿고 거기에 눌러 안주해 버린 것. 당신의 신앙..
배움 모르는 것이 있을 때 유일한 타개책은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배우면 알게 된다. 알게 되면 무지와 무식에서 한 걸음 벗어나고 성장하게 된다. 자유와 해방이 있는 곳엔 희열도 있다. 그러나 스스로 속박하는 곳엔 이를 가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지경이 넓어진 사람은 편향적인 사상에 잘 휘둘리지 않는다. 객관성을 얻게 된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배우는 일을 주저하거나 포기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아마도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여태껏 견지한 신앙이나 믿음이 근본부터 흔들릴까 봐, 그래서 모든 세계관과 가치 체계가 무너져버릴까 봐 두려운 것이다. 모르는 것을 모른 채로 놔 두길 반복하다 보면 자연스레 고집이 생겨난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아마 본인은 그것을 악에 물들지 않는 예방책, 혹은 본인..
부채감 그리고 버티는 힘 내 삶을 지탱하는 하나의 힘은 부채감에서 비롯된다. 대학 시절에는 늘 다 읽지 못한 채 시험을 쳐야만 했던 교과서의 무지막지한 분량 때문에, 대학원 시절에는 읽어도 읽어도 읽을 게 더 많아지기만 하는 논문 때문에, 그리고 인생의 후반전에 들어선 이후에는 책장에서 점점 수가 늘어나며 늘 날 조용히 노려보고 있는, 읽지 않은 채 꽂혀 있는, 책 때문에 나는 매일 부채감을 느낀다. 나의 게으름을 탓 하기도 하지만 그런다고 긍정적으로 얻을 수 있는 거라곤 조금 부지런해지는 것밖에는 없으므로 언젠가부턴 게으름으로 인한 스스로의 비난에서 많이 자유로워졌다. 물론 그렇게 탓하는 것은 마지막 숨을 다할 때까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삶에서 건설적인 무엇인가를, 특히..
진화가 하나님의 창조 과정으로 사용되었다고 믿는 그리스도인 생물학자의 신앙공부와 신앙고백 보름 전에 올린 서평 하나가 예상보다 큰 파장을 일으킨 것 같아 얼떨떨했습니다. 페친 신청만 해도 백 번 넘게 받았고 (그중 열 명 남짓 페친이 되었습니다), 팔로우도 이백 명 넘게 생겼습니다. 페북 이래 처음 겪는 일이었습니다. 페북 인플루언서가 된 것마냥 우쭐한 기분도 아주 잠시 들더군요. 아마도 제 글 자체 때문이 아니라 제 글이 첨예한 이슈를 건드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십여 년 전부터 봐 오던 지긋지긋한 논쟁들과 다툼들로 페북 여기저기서 시끄럽더군요. 강산이 바뀌어도 한치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을 보며 저는 긴 한 숨을 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우종학 교수님을 비롯한 과신대의 활동 덕분..
믿음과 믿음의 반응 나는 믿는다, 라는 말로 자신의 믿음을 증명할 수 있을까. 믿음은 오직 믿음의 반응으로 증명된다는 생각이다. 믿음은 비가시적인 반면, 믿음의 반응은 가시적이다. 그러나 믿음과 믿음의 반응은 둘이 아닌 하나다. 믿음이 살아 숨 쉬고 역사하는 이유다. 믿음의 반응은 행동으로 드러난다. 처음에 그것은 믿는 대상을 향한다. 그러나 믿음의 반응은 믿음의 깊이를 더하고, 성장된 믿음은 믿음의 반응을 더 풍성하게 한다. 이런 상호작용은 자연스럽게 믿음의 반응을 함께 믿는 이들을 향하고 결국 모든 사람을 향하게 만든다. 다분히 관념적이다가 점점 실체를 갖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사랑이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그 하나님 사랑은 싹을 틔우지 못한 채 땅 속에 머무는 씨앗에 불과하다. 그 씨앗의 ..
감사가 족쇄로 은혜를 입은 사람은 그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 이전과 다른 입장을 보일 수밖에 없다. 생명을 구해줄 만큼의 큰 은혜라면 감사의 크기 역시 커진다. 사람이라면 당연한 반응이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감사는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은혜 베푼 사람을 향한 적의가 조금씩 생겨난다. 이상한 말이라 생각하겠지만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구원 받았던 순간의 기억은 찰나가 되고, 은혜를 꼭 갚겠다는 의지는 희미해진다. 그 의지에서 감사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부담감이 자리잡는다. 어느새 은혜를 갚는 일은 남은 인생의 족쇄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탈출하고 싶을 만큼, 나아가 차라리 그때 구원의 손길을 거절했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펴면서 말이다. 인간의 한계일 것이다. 그러나..
이성과 믿음 익숙하지 않은 세상 속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데엔 세 가지 용기가 필요하다. 하나는 별 일 있겠냐는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만약 별 일이 생겨도 어떻게든 처리하면 되고 처리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또 다른 하나는 설사 일이 잘못된다 하더라도 결국 손해 볼 건 없고 나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믿음이다. 그러고 보면 모든 도전은 이성이 아닌 믿음에 기반을 둔다. 물론 그 믿음은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이다. 이러한 믿음은 우리를 초월의 순간으로 이끈다. 중력에서 벗어나게 돕는다. 이성만으로 이뤄진 세상엔 진보는 있을지언정 도약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도약은 이성을 갱신시키고 확장시키고 심화시킨다. 이성은 언제나 한 발 느리다. 무모하게 보이기도 하겠지만 믿음이 먼저 간다. 이성은 믿음으로 행해진 결과를..
전복적인 저항 관찰에서 성찰로, 성찰에서 통찰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나는 삼찰이라고 부른다. 무엇인가를 보고 듣고 감지하면 인간은 생각을 하게 된다.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경험이 축적되고 나름대로의 노하우가 생기며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그 결론은 다른 일들을 바라보는 시각에 영향을 주어 좀 더 종합적인 해석을 할 수 있게 해 주며, 미래를 예측하거나 어떤 일을 예상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은 대부분 본능에 따른다. 생존본능인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나는 현대인들에게도 이렇게 생존본능에 충실한 경우를 목도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성공 가도를 달리는 눈먼 사람들에게서 이런 모습들이 특히 더 두드러지는 것 같다. 어떻게 하면 더 높이 더 위로, 어떻게 하면 더 빠르게 더 앞으로 ..
흔들림 없는 신앙 흔들림 없는 신앙은 어려움이 닥쳐와도 어렵지 않게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된다. 그런 신앙은 누구나 갖고 싶어 한다. 그런데 어떻게 그걸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르다.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 것 같다. 하나는 단 하나의 체제만이 진리인 것처럼 믿고 따르게 만드는 방법이다. 엄연히 다른 체제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혼란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심산 (배려일까???)으로 의도적으로 사람들에게 다른 존재들을 숨기고 하나만을 알려주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다양한 체제들의 존재를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의 체제만을 따를 때 빠질 수 있는 경솔한 확신에 대해 주의를 주는 방법이다. 이는 다양성에 노출될 때의 혼란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이기 때문에 어차피 거쳐야 한다면 경솔한 ..
내가 기준인 정의와 불의 나는 정의가 구현되는 것보다 불의가 척결되는 장면에서 더 쾌감을 느낀다. 선한 자가 승승장구하는 것보다 악한 자가 파멸에 이르는 장면에서 더 짜릿함을 느낀다. 왜일까. 아마도 나의 모자람 때문일 것이다. 여전히 내 안에 내가 너무 많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나는 정의의 구현과 선한 자의 잘됨을 진심으로 바라는 것일까. 여전히 정의가 아니라 나의 유익에 부합하는 바가 구현되길 바라고, 선한 자가 아니라 나 자신이 잘되길 바라는 게 아닐까. 어쩌면 불의한 자나 악한 자의 파멸도 그들이 나의 유익에 부합하지 않거나 내 눈에 거리끼는 사람과 동일인물일 때에 한해 기뻐하는 건 아닐까. 정의의 실현과 선한 자의 잘됨을 바라는지 묻기 전에 그걸 바라는 나 자신의 상태부터 점검해야겠다.
악인과 함께 숨 쉬면서 정의를 행하기 그들은 말을 아꼈다. 상대방을 배려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지나치게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쓰는 방법은 어딜 가나 동일했다. 직접 말하지 않는다. 뒤에서 특정 인물의 이름을 거론하지도 않고, 특정 행동에 대해 객관적인 비판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해당인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형성하는 축이 된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말하지 않고 말하는 법, 그러니까 사람의 생각 속에 혹시나 하는 부정적인 가능성을 귀신 같이 찾아내어 그들에게 다가가 자극시키고 활성화시키고 증폭시켜 그것이 마치 사실인 듯 스스로 믿게 (넘겨짚게) 만든다.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이다. 나는 이들을 악마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들의 논리는 철저히 무논리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은 ..
단순함 단순함은 종종 하나의 미덕으로 추앙받는다. 특히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으로 고민과 갈등 가운데 갈팡지팡 하고 있거나 고민과 갈등 자체를 혐오하거나 정면승부를 피하고 언제나 도망 다니는 사람들로부터 그렇다. 단순함이 그들에겐 구원이자 가장 쉽고 편한 답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과연 그 답이 그들에게 진정 답이 될까 싶은 생각이 든다. 오히려 그들의 성장과 성숙을 놓치게 만들고 생각할 힘을 가지지 못하게 만들며 옹졸하고 편협하게 만드는 지름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스크루테이프가 가장 칭찬할 만한 환자의 부류가 아닐까 싶다. 그 답을 얻는 순간은 어쩌면 한 사람이 반드시 거쳐야 할 훈련을 거치지 않은 채 미성숙하고 나약하고 고집스러운 사람으로 변모하는 변곡점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말하자면 인생의..
쫓기지 않는 삶, 믿음의 삶 길이 막힐 때 즈음에야 왜 그 길을 걷고 있는지 묻게 된다. 처음부터 물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문제가 생기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이런저런 생각에 빠지는 순간은 전체를 돌아보게 하고 의미를 찾게 해주는 소중한 시간이 될 수 있다.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완주하는 건 축복이 아니라 저주일지 모른다. 실패하고 싶지 않으나, 넘어지고 싶지 않으나, 어쨌거나 인간은 낮아질 때, 넘어질 때, 멈춰질 때 그 길 위에서 비로소 자신의 좌표를 알 수 있지 않나 싶다. 쫓기는 삶을 사는 사람은 그가 해내는 일의 성과와 효율과는 상관없이 언제나 쫓기기만 할 뿐이다. 쫓기며 성공하느니 쫓기지 않는 삶을 위해 나는 실패를 택하리라. 글이 잘 써지다가 막힐 때가 있다. 두려운 순간이다. 아니..
감사하기, 누리기, 나누기 아들과 나는 다른 버스를 탄다. 십여 분 기다리다가 아들을 먼저 버스를 태워 보낸 후 나는 오늘 한 정거장 떨어진 곳에서 다시 십여 분을 기다리다가 환승했다. 영하 두 자리 숫자에서 25분 넘게 기다리며 생각했다. 나는 얼마나 편안하게 살고 있는가, 어느새 풍족함이 내 허리에 둘러진 뱃살로 자리매김한 건 아닌가, 기름진 돼지가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버스를 타고 오는 내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질문에 답을 해보려 했다. 그리 어렵지 않게 답이 났다. 요컨대 먼저 감사하기, 그리고 누리기, 그리고 나누기, 라 할 수 있겠다. 첫 번째 ‘감사하기’가 되지 않으면 두 번째 ‘누리기’는 인생의 목적이 되기 쉽다. ‘누리기’는 때론 ‘자수성가’의 증거로..
성숙 갈수록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가려내어 상대방을 교정하려고 애쓰기보다는 어지간하면 상대방을 맞추며 더 사랑하려는 내 모습이 좋다. 분별력의 중요성을 경시하는 것도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사랑의 신비는 분별력도 넉넉히 덮는다는 사실을 알아가고 있을 뿐이다. 나 역시 누군가로부터 받아들여진 기억이 있다. 날 받아준 그분도 지금의 나와 비슷한 심정이지 않았을까. 논리와 이성만이 판단의 잣대였다면 과연 나는 받아들여질 수 있었을까. 한 사람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일은 논리와 이성을 거뜬히 뛰어넘는 그 무엇이다. 그런데 바로 그게 그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구원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이 놀라운 일. 돌아온 탕자가 넘어서야 할 부분은 어쩌면 첫째 아들이 되지 않으려 애쓰는 일일지도 모른다. 눈을 들어 지경을 ..
‘나’라는 감옥 간수도 없고 문도 언제나 활짝 열려 있는 감옥이 있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나갈 수 있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도 나가려 하지 않는다. 생긴 게 감옥 같지 않아서가 아니다. 감옥인 줄 모르기 때문이다. 고소하는 사람도 없었다. 유죄 판결을 내린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유형 살이 때문에 온 게 아니다. 한결같이 이 감옥에 갇힌 자들은 모두 자기 발로 찾아왔다. 마치 누군가로부터 은밀한 초대라도 받은 것처럼 한밤중에 하나둘씩 개인 별로 찾아왔다. 그 감옥의 이름은 ‘나’. 자기 안에 갇힌 사람은 ‘나’라는 감옥에 갇힌 사람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자기가 갇혔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자신을 고소하지 않았고, 유죄라고 판결하지도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초대장 따위는 처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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