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이전에 공부‘과학자의 신앙공부’가 거리를 두고 신앙과 교회와 나 자신과 타자와 세상을 하나님 나라 복음의 관점으로 탐구하는 책이라면, 3년 뒤에 쓰여진 ‘생물학자의 신앙고백‘은 저 나름대로의 균형과 안정을 찾고 하나님 나라 가치관으로 전향하여 살아내는 일상 속에서 저의 신앙을 읊조리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책입니다. 고백 이전에 공부가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두 책 모두 세종도서에 선정되는 복을 받아 더욱 저에겐 의미가 깊답니다. 박군오 목사님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목사의 서재‘에서 한 달 전에 인터뷰한 내용이 잘 편집되어 영상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사전 질문지도 대본도 없이 즉흥적으로 실시간으로 이뤄졌던 인터뷰였답니다. 미리 준비한 문장들이 전혀 없었기에 저의 말들은 제 안에 어느..
기적어떤 글이나 말이 머리와 가슴으로 깨달아지고 삶으로 녹아들어 변화를 이뤄내는 것만큼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기적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영이시고 말씀이신 기독교의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육신을 입고 사람으로 오셨던 사건을 원형으로 한다. 깨달아지는 것, 그리고 실천으로 옮겨지는 것. 이 두 단계를 거쳐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는 과정은 참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는 과정 (일견 칭의와 성화, 물론 둘을 따로 생각할 수 없지만)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이것은 참 그리스도인이란 그 인생이 회심이라는 과정 가운데에 있어야만 하는 존재자라는 문장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말은 실제 삶에서 아무런 변화를 겪어내지 못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증명할 수 없다는 결론을 가리킬지도 모른다...
탈출구: 두려움이 아닌 존중“두려움은 근본주의를 만들지만 참된 신앙은 두려움을 이긴다.” 박영식 교수가 한 이 말은 내게 오래 남았다.이 말은 두려움을 주 무기로 이용하는 종교가 과연 진리를 추구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내가 아는 진리는 자유와 해방과 평화가 언제나 함께 한다. 내겐 진리는 담대하고 순결하며 완전하다는 믿음이 있다. 두려움은 그 어디에도 기생할 수 없다. 씨조차 말라버린 곳이다. 숨기는 자가 범인이라는 말은 뼈가 있다. 숨기는 이유는 두려움이다. 자신의 정체와 자신의 범죄가 탄로 날까 두려운 것이다. 숨기고 숨는 건 모든 범죄자의 기본적인 반응이다. 즉 두려움은 죄가 인간에게 일으키는 원초적인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두려움이 만드는 근..
보복하지 않기 이화정 목사의 ‘엄마의 일기가 하늘에 닿으면’에는 이런 인용구가 있다.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설사 누군가에게서 욕설을 들은 사람이 자신도 똑같이 보복해 줄 수 있다 하더라도, 자신과 싸우며 잘 견뎌내어 상대방을 슬프게 하지 말아야 한다. 혹은 누군가에게서 상처를 입은 사람이 자신을 화나게 하고 괴롭힌 사람에게 보복하지 않고 참아 잘 견딘다면, 그러한 행동으로써 그는 자신의 목숨을 이웃을 위해 내놓는 것이다." (압바 포에덴) 이 글귀가 책의 주제와 크게 상관없이 내 눈을 멈추게 한 까닭은 아마도 ‘보복하지 않고 참아 견딘다’는 말을 이웃을 향한 가장 큰 사랑과 동격으로 묘사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내일 모레면 한국 나이로 쉰이 되는 내게 여전히 ..
훈장사람의 성숙도를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 중 하나로 과거에 겪은 어려움 (환란 혹은 시험 등)의 유무를 들 수 있다. 물론 어려움은 상대적이라 정의하는 게 쉽지 않고 각 사람의 어려움을 저울에 올려놓고 비교할 수도 없다. 그러나 어려움을 통과한 이후 그 사람의 변화된 삶에 대한 자세 혹은 타자를 향한 태도는 충분히 그 사람의 성숙도를 판단하는 신뢰할 만한 잣대가 된다. 물론 어려움을 겪지 않으면 어떤 변화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어려움의 유무도 의미 있다고 하겠지만, 단순히 그것의 유무가 아니라 그 시간들은 어떻게 지나오고 어떻게 재해석하며 어떻게 그 재해석을 현재 삶에 적용하는지에 방점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의미심장한 일을 겪고 (1단계), 가치관과 세계관의 변화를 경험한 뒤 (2단계)..
성품의 변화 vs. 세계관의 변화그리스도인이 되기 전과 후의 차이는 어떠해야 할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 먼저 동의하고 전제로 두어야 하는 사실이 있다. 차이는 반드시 나고 나야만 한다는 것. 아무런 차이가 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다는 것. 여기에 동의가 안 된다면 이 글은 패스하시길.차이는 내면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는 장소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다. 예수를 영접하면 마음과 생각에 나 뿐만이 아니라 성령이 추가적으로 거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추가'라는 단어가 중요하다. '대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를 영접한다고 해서 내 자아가 사라지지 않는다. 자아가 소멸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과 후의 차이가 없다. 차이는 주로 시간이 지나면서 생겨난다. ..
부탁나는 그리스도인이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을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유신론자에 속한다. 내가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은 솔직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으로 말미암은 건 아니지만, 그런 식으로 접근해도 나는 여전히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쪽보다는 존재한다는 쪽이 더 개연성도 있고 합리적인 추론이라고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유신론은 믿음이고, 무신론은 과학이라는 이분법적인 틀에 갇혀 있다. 여기서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무신론 역시 믿음이자 세계관일 뿐이다. 신의 존재는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이 존재하는지 증명하라는 자가 주위에 있으면 되물으면 그만이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증명해 보라고. 즉 유신론이나 무신론이나 하나의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인 것이다. 제발 무신론..
쫓기는 삶쫓기는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모든 사람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무엇인가에 쫓기며 산다. 바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여전히 누군가에겐 바쁜 게 자랑일 수도 있다. 쫓기는 삶에 스스로 우쭐해하며, 마치 자기가 소수의 엘리트 집단에라도 속한 것처럼 특권 의식에 절어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러한 삶이 모든 일을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이유가 되어주진 않는다. 그래선 안 된다. 물론 일이 많아지면 우선순위를 선정하고 그 일들에 시간을 배분하여 효율을 증대시켜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바쁘더라도 어떤 특정한 일에 대해서만큼은 쫓겨선 안 된다고 생각하고 나는 그렇게 살려고 애쓴다. 이게 누군가에겐 고집으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이게 무너지면 삶 전체가 붕괴된다는 것을 나..

처음으로 감수에 이름을 올린 따끈따끈한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추천사도 함께 썼는데, 이 책 소개를 저의 추천사로 대신합니다. 제가 읽어본 과학과 신앙 사이의 고질적인 문제 해결에 대한 책 중에서 저는 단연 이 책을 손꼽고 싶습니다. 창조과학이니 창조론이니 유신진화론이니 여전히 시끄러운 이 시대에 이 책이 마음을 시원케 하는 효과를 내리라 생각합니다. 일독을 꼭 권합니다. 추천사 아담과 게놈 하나님을 더 알고자 하나님이 저자이신 두 책, 성경과 자연을 진지하게 읽어나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언젠간 묻게 된다. 더욱이 과학 시대를 살아가며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고 자유함을 얻은 모든 그리스도인이라면 두려워하지 말고 겸손하게 물을 필요가 있다. 아담은 오늘날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의 생물학적 조상인가? 아담과 하와는..
발생과 창조 그리스도인들에게 묻겠습니다. 사람은 만들어지는 걸까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걸까요? 혹시 이 질문 앞에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느끼시진 않았나요? 제가 대답을 해보겠습니다. 먼저, 생물학자로서의 대답입니다. 사람은 만들어집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대답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자, 어떤가요? 이 두 대답이 모순된다고 여기시나요? 그렇다면 과학과 신앙은 모순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과학과 신앙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생물학자로서의 대답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대답 역시 모순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만들어지고, 또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제가 서두에서 던진 질문 앞에서 우린 하나를 택해야만 하는 압박을 전혀 느끼실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가..
두려움 눈에 보이지 않는 진리를 믿고 자유함을 얻은 사람이 눈에 보이는 명백한 사실을 두려워하고 그것을 부인하고 그것을 인정하거나 알길 원하는 사람들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막아 나서는 세태를 본다면 나는 그 사회를 여전히 무속에 잡혀 있다고 말할 것이다. 아마 스스로는 무속이 웬 말이냐 할지도 모른다. 자부심에 찬 채 평생 가져온 신앙 혹은 믿음 혹은 세계관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무속이라는 말을 취소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당신은 두려워한 것이고 부인한 것이고 은폐하려 한 것이다. 당신이 말했듯 이런 행위는 당신이 평생 가져온 신앙 혹은 믿음 혹은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 당신이 하나 놓친 게 있다. 당신이 평생 가져왔던 그것들이 완전하다고 믿고 거기에 눌러 안주해 버린 것. 당신의 신앙..
배움 모르는 것이 있을 때 유일한 타개책은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배우면 알게 된다. 알게 되면 무지와 무식에서 한 걸음 벗어나고 성장하게 된다. 자유와 해방이 있는 곳엔 희열도 있다. 그러나 스스로 속박하는 곳엔 이를 가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지경이 넓어진 사람은 편향적인 사상에 잘 휘둘리지 않는다. 객관성을 얻게 된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배우는 일을 주저하거나 포기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아마도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여태껏 견지한 신앙이나 믿음이 근본부터 흔들릴까 봐, 그래서 모든 세계관과 가치 체계가 무너져버릴까 봐 두려운 것이다. 모르는 것을 모른 채로 놔 두길 반복하다 보면 자연스레 고집이 생겨난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아마 본인은 그것을 악에 물들지 않는 예방책, 혹은 본인..
부채감 그리고 버티는 힘 내 삶을 지탱하는 하나의 힘은 부채감에서 비롯된다. 대학 시절에는 늘 다 읽지 못한 채 시험을 쳐야만 했던 교과서의 무지막지한 분량 때문에, 대학원 시절에는 읽어도 읽어도 읽을 게 더 많아지기만 하는 논문 때문에, 그리고 인생의 후반전에 들어선 이후에는 책장에서 점점 수가 늘어나며 늘 날 조용히 노려보고 있는, 읽지 않은 채 꽂혀 있는, 책 때문에 나는 매일 부채감을 느낀다. 나의 게으름을 탓 하기도 하지만 그런다고 긍정적으로 얻을 수 있는 거라곤 조금 부지런해지는 것밖에는 없으므로 언젠가부턴 게으름으로 인한 스스로의 비난에서 많이 자유로워졌다. 물론 그렇게 탓하는 것은 마지막 숨을 다할 때까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삶에서 건설적인 무엇인가를, 특히..

진화가 하나님의 창조 과정으로 사용되었다고 믿는 그리스도인 생물학자의 신앙공부와 신앙고백 보름 전에 올린 서평 하나가 예상보다 큰 파장을 일으킨 것 같아 얼떨떨했습니다. 페친 신청만 해도 백 번 넘게 받았고 (그중 열 명 남짓 페친이 되었습니다), 팔로우도 이백 명 넘게 생겼습니다. 페북 이래 처음 겪는 일이었습니다. 페북 인플루언서가 된 것마냥 우쭐한 기분도 아주 잠시 들더군요. 아마도 제 글 자체 때문이 아니라 제 글이 첨예한 이슈를 건드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십여 년 전부터 봐 오던 지긋지긋한 논쟁들과 다툼들로 페북 여기저기서 시끄럽더군요. 강산이 바뀌어도 한치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을 보며 저는 긴 한 숨을 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우종학 교수님을 비롯한 과신대의 활동 덕분..
믿음과 믿음의 반응 나는 믿는다, 라는 말로 자신의 믿음을 증명할 수 있을까. 믿음은 오직 믿음의 반응으로 증명된다는 생각이다. 믿음은 비가시적인 반면, 믿음의 반응은 가시적이다. 그러나 믿음과 믿음의 반응은 둘이 아닌 하나다. 믿음이 살아 숨 쉬고 역사하는 이유다. 믿음의 반응은 행동으로 드러난다. 처음에 그것은 믿는 대상을 향한다. 그러나 믿음의 반응은 믿음의 깊이를 더하고, 성장된 믿음은 믿음의 반응을 더 풍성하게 한다. 이런 상호작용은 자연스럽게 믿음의 반응을 함께 믿는 이들을 향하고 결국 모든 사람을 향하게 만든다. 다분히 관념적이다가 점점 실체를 갖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사랑이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그 하나님 사랑은 싹을 틔우지 못한 채 땅 속에 머무는 씨앗에 불과하다. 그 씨앗의 ..
감사가 족쇄로 은혜를 입은 사람은 그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 이전과 다른 입장을 보일 수밖에 없다. 생명을 구해줄 만큼의 큰 은혜라면 감사의 크기 역시 커진다. 사람이라면 당연한 반응이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감사는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은혜 베푼 사람을 향한 적의가 조금씩 생겨난다. 이상한 말이라 생각하겠지만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구원 받았던 순간의 기억은 찰나가 되고, 은혜를 꼭 갚겠다는 의지는 희미해진다. 그 의지에서 감사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부담감이 자리잡는다. 어느새 은혜를 갚는 일은 남은 인생의 족쇄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탈출하고 싶을 만큼, 나아가 차라리 그때 구원의 손길을 거절했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펴면서 말이다. 인간의 한계일 것이다. 그러나..
이성과 믿음 익숙하지 않은 세상 속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데엔 세 가지 용기가 필요하다. 하나는 별 일 있겠냐는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만약 별 일이 생겨도 어떻게든 처리하면 되고 처리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또 다른 하나는 설사 일이 잘못된다 하더라도 결국 손해 볼 건 없고 나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믿음이다. 그러고 보면 모든 도전은 이성이 아닌 믿음에 기반을 둔다. 물론 그 믿음은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이다. 이러한 믿음은 우리를 초월의 순간으로 이끈다. 중력에서 벗어나게 돕는다. 이성만으로 이뤄진 세상엔 진보는 있을지언정 도약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도약은 이성을 갱신시키고 확장시키고 심화시킨다. 이성은 언제나 한 발 느리다. 무모하게 보이기도 하겠지만 믿음이 먼저 간다. 이성은 믿음으로 행해진 결과를..
전복적인 저항 관찰에서 성찰로, 성찰에서 통찰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나는 삼찰이라고 부른다. 무엇인가를 보고 듣고 감지하면 인간은 생각을 하게 된다.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경험이 축적되고 나름대로의 노하우가 생기며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그 결론은 다른 일들을 바라보는 시각에 영향을 주어 좀 더 종합적인 해석을 할 수 있게 해 주며, 미래를 예측하거나 어떤 일을 예상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은 대부분 본능에 따른다. 생존본능인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나는 현대인들에게도 이렇게 생존본능에 충실한 경우를 목도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성공 가도를 달리는 눈먼 사람들에게서 이런 모습들이 특히 더 두드러지는 것 같다. 어떻게 하면 더 높이 더 위로, 어떻게 하면 더 빠르게 더 앞으로 ..
흔들림 없는 신앙 흔들림 없는 신앙은 어려움이 닥쳐와도 어렵지 않게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된다. 그런 신앙은 누구나 갖고 싶어 한다. 그런데 어떻게 그걸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르다.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 것 같다. 하나는 단 하나의 체제만이 진리인 것처럼 믿고 따르게 만드는 방법이다. 엄연히 다른 체제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혼란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심산 (배려일까???)으로 의도적으로 사람들에게 다른 존재들을 숨기고 하나만을 알려주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다양한 체제들의 존재를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의 체제만을 따를 때 빠질 수 있는 경솔한 확신에 대해 주의를 주는 방법이다. 이는 다양성에 노출될 때의 혼란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이기 때문에 어차피 거쳐야 한다면 경솔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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