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사람들이 시대에 책으로 대화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건 감사할 일이다. 특히, 책 중에서도 소설이나 시 같은 문학작품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건 더 그렇다. 함께 작품 속으로 들어가 작품 속 세계와 그 세계를 이루는 등장인물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에 개입하여 공감하고 그러면서 궁극적으로 나 자신을 돌아보며 위로도 얻고 치유를 경험하기도 하며 중요한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잊고 있던 소중한 것들의 의미를 재발견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말이다. 이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음은 살면서 누구나 누릴 수 있지만 아무나 누릴 수 없는 축복일 것이다.현실에 민첩하고 돈의 흐름을 꿰뚫고 있으며 사리에 밝아 만날 때마다 영웅담을 과시하는 성공자들과의 만남은 이상하게도 점점 멀리하게 된다. ..
꼰대의 기원 인생은 정착과 떠남의 무한반복으로 이뤄진다. 정착은 안정을 가져다주고, 떠남은 전환을 선사한다. 안정은 아주 쉽게 태만을 야기하고, 전환은 자주 불안으로 점철된다. 태만의 강에 빠지지 않고, 불안의 바다에 잠식되지 않는 인생을 살 수만 있다면, 그 인생은 정착과 떠남의 연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반복된 삶의 구조를 살아가지만 그 구조를 껴안을 수 있으며 그 구조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을 수 있다. 마침내 초월의 인생을 살 수 있다. 우물은 하나의 완전한 세상이다. 정착하고 싶을 만큼 안정적인 공간이다. 그곳의 안정으로부터 부와 명예와 권력을 얻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그 우물을 하나의 완전한 세상을 넘어 유일한 세상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들의 말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은 그곳이 유일한 세상이므..
작은 정의 C는 A로부터 B에 대한 얘기를 듣는다. 부정적인 뉘앙스로 가득차 있다. C는 별 생각 없이 A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A의 B에 대한 시선은 고스란히 C의 것이 된다. 비판적 사고의 결여가 낳는 폐해다. 살면서 수차례 이런 폐해로 꽤 많은 사람을 잃었다. 미꾸라지 같은 인간의 뱀 같이 교활한 혀로 인해 나는 소중한 관계에 위협을 받아야 했다. 안타까운 사실은 A가 주위에 산재해있다는 것.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주위에 C가 A보다 더 많다는 것. 아주 빈번하게 A는 영향력 있는 사람일 경우가 많다는 것 (목사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것). 늘 배제되고 소외되는 건 B라는 것. A의 교활함과 C의 무비판적 수용을 피해가고 싶지만 피할 수 없다는 게 우리네 현실이다. 나는 앞으로도 A 때문에 억울..
조용히 뭔가를 해나가고 있는 사람이 주위에 있다는 건 인생을 그리 헛되이 살지 않았다는 증거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작은 일의 무게를 알고, 그 무게를 책임질 줄 알며, 책임지는 과정으로부터 즐거움과 만족을 느끼는 사람. 결코 여유가 없는 삶인데도 불구하고 이런 삶을 성실하게 지속하고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내게 든든한 힘이 되고, 자고 있는 나를 깨우며, 삶의 이유까지 깨닫게 해 준다. 나아가,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가득 차게 만든다. 선한 영향력이란 이런 것일 테다. 원만한 인간관계를 위해 적당히 노력할 필요는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내 24시간이 채워진다면 아마도 내가 느끼게 될 감정은 공허함일 것이다. 나 역시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웃고 울고 떠드는 시간으로부터 위로와 공..
인간스러움과 인간다움 다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열 명이 넘는 사람의 경우를 보면, 창조과학을 지지하는 사람과 현 정권을 여전히 지지하는 사람들이 같은 과로 구분이 된다. 놀라운 사실이다. 그들의 공통점이 무엇일지 생각해 봤다.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인데, 그것은 바로 ‘반지성’이라 할 수 있을 그 무엇이었다. 이들은 굉장히 닮았다. 과학, 신학, 철학, 정치, 이렇게 서로 다른 영역이지만 이들에겐 같은 패턴이 보인다. 즉 영역과 상관없는 문제인 셈이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이라는 이유일 것이다. 내가 관찰한 이들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듣지 않는다. 상대방의 말을 듣는 척하면서 머릿속으로는 자기가 다음에 할 말을 생각하고 있다. ..
냉소의 강 건너기 배움과 공부를 통해 우물 밖으로 나온 자는 필연적으로 냉소의 강을 건너게 된다. 혼란의 시기일 수도 있다. 다시 우물 안으로 돌아가고 싶을지도 모른다. 초기의 반동적인 힘 때문일까. 자기가 속했던 곳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들로 머릿속이 가득 차 어지러울 것이다. 그동안 물처럼 자연스러웠던 일종의 안정감이 사라지면서 두려움과 불안에 잠식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속고 살았다는 불유쾌한 기분은 영혼에 각인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면서 자아의 분열을 겪기도 할 것이다. 무언가를 알게 되었다는 것의 거부할 수 없는 힘을 느끼며 교만한 현자인 동시에 방황하는 영혼 같다는 묘한 기분을 한동안 느끼게 될 것이다. 환영한다. ..
배움과 용기 우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동력은 배움, 즉 공부다. 공부를 통해 ‘나’라는 우물 밖으로 나와 마침내 나를 바라볼 수 있다. 공부는 자기 객관화를 지향하고, 자기 객관화는 공부의 궁극적인 열매다. 우물 안에 머물면 성장은 없다. 그러나 시간은 똑같이 흐른다. 그 시간의 끝엔 나밖에 모르는 나이 들고 고집 센 아이가 남게 된다. 남의 시선에 휘둘리면서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아이. 말은 많이 하나 자기조차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분열된 자아들로 똘똘 뭉친 아이. 새가 되기 위해서는 알을 깨뜨려야 한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파괴는 창조의 전신이다. 파괴하지 않으면 창조는 없다. 파괴를 두려워하지 말자. 파괴를 위한 파괴가 아닌, 창조를 위한 파괴. 우물 안의 평화는..
작은 일의 무게 성실한 지속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해내지 못하는 일 중 하나다. 나는 언제나 이런 것들에 진리가 담겨 있다고 믿는다. 압도적인 성취의 순간이 아니라 진전이 없는 것 같아 보이는 지난한 과정들 안에 모든 게 담겨 있다고 믿는다. 그 시기를 어떻게 견디고, 즐기며, 그러면서도 정의롭고 공의롭게 살아내느냐에 인생의 방점이, 즉 자신의 믿음과 가치관과 세계관이 모두 담겨 있다고 믿는다. 크고 화려한 것들이 아닌 작고 빛바랜 것들이 품고 있는 가치가 내겐 더 소중하다. 그 어떤 성공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어제 단상을 남겼다. 연장선에서 오늘은 공부 안 하는 사람의 치명적인 특징 하나를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작은 것들의 무게를 잘 모르고 무시한다는 것..
무식, 신념, 그리고 공부 개인적으로 이경규를 좋아하진 않지만, 그가 남긴 문장 하나만큼은 내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었다.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다는 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이 말은 종교를 가진 허다한 사람들을 설명한다고도 나는 생각한다. 공부는 시간 날 때 한다거나 머리가 똑똑한 사람들만이 하는 행위가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해야만 한다고 나는 믿는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인간은 똑똑한 분들이지만, 그들을 숭배하듯 추종하는 인간들은 무식하다는 점을 나는 역사를 보며 알게 된다. 이건 정치와도 다르지 않다.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는 무식해지지 않기 위해서다. 무식해지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똑똑하고 신념과 야망이 가득 차 세상을 소란하게 하는 소수의 인간들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다...
눈부신 햇살. 살짝 차가운 미풍. 구름 한 점 없는 나른한 오후. 늦잠을 자고 느지막이 일어난다. 대충 씻고 아들과 함께 맥도날드를 향한다. 햄버거 하나씩 먹고 농구공을 튀기며 근처 학교 운동장으로 간다. 밝고 넓은 운동장. 벤치에 할아버지 한 분이 홀로 앉아 계신다. 햇살을 즐기시고 계신 듯하다. 아들은 농구에 열심이다. 연신 아빠 봐 봐, 하면서 슛이며 점프며 최근 들어 연습한 기량을 보여주려 애쓴다. 같이 농구를 하다가 너무 눈이 부셔서 나도 벤치에 앉았다. 문득 캘리포니아에 살던 때가 떠오른다. 눈부신 햇살이 나를 그 기억으로 인도한 것이다.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다. 아, 마침내 여유다.
장악한다는 것 넓은 공간보다는 적당히 좁은 공간에서 나는 아늑함을 느낀다. 집중해서 글을 읽거나 쓸 때에도, 심지어 잠을 잘 때에도 나는 적당히 좁은 공간을 선호한다. 아마도 그럴 때마다 내가 느끼는 건 그 공간을 장악했다는 기분일 것이다. 장악한다는 것. 이는 익숙해진다는 것과 비슷하지만 그보다는 적극적인 느낌이다. 익숙해지는 건 수동적으로도 가능하지만, 장악한다는 건 그럴 수 없다. 좀 더 능동적이어야 한다. 내가 그 공간에서 무엇인가를 해내야 한다는 조건이 붙을 때 더 그렇다. 집중은 마음이 불편하면 불가능하기 마련이다. 어떤 공간에 들어설 때 우선 마음이 편해야 무엇인가를 시작할 수 있다. 또한 익숙해지는 게 시간에 따른 개념이라면 장악한다는 건 공간에 대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수동성은 전적으..
솔직함, 거짓, 그리고 겸손 새로운 지식의 습득을 가로막는 건 무지와 무식이 아닌 오히려 기존의 지식이다. 지식인이 편협하고 옹졸한 사람으로 변모하게 되는 원인도 마찬가지다. 다 알지 못했으나 다 안다고 여긴 대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으로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던 대가, 곧 그것은 교만의 열매다. 필요한 건 겸손. 별 거 아니다. 많이 알아도 여전히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것, 모르면 모른다고 시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솔직함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겸손은 솔직함의 표현형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겸손의 의미를 착각한다. 많이 아는데 적게 아는 것처럼 행세하는 걸 겸손이라 생각한다. 물론 상황에 따라, 필요에 따라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거짓을 동원해서 행할 수 있는 겸손은..
공간과 시간 낯선 공간에서 허우적거릴 때 유일하게 위로가 되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여전히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이었다. 유난히 느리게 가는 시간을 느끼며 나는 그곳의 낯선 대기를 흡입했다. 마치 흐르는 시간에 기대기만 하면 그 공간이 금세 익숙해지기라도 할 것처럼 나는 절박했던 것 같다. 지금도 종종 눈을 감으면 불안함이 느껴질 정도로 낯선 공간이 떠오른다. 그 공간은 모든 게 고장 난 텔레비전처럼 정지되어 있다. 그 적막 가운데 어딘선가 시계 초침 소리가 들려오고, 그 소리와 함께 내 머릿속 생각의 소리도 들린다. 어쩌면 맥박 소리일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나는 상당히 긴장한 상태다. 고립되었다는, 혼자라는 생각에 사로잡혀있다. 누구라도 내 눈을 보면 겁에 질렸으나 대범한 척하고 있는 위선을 눈치챌 수 있..
시간 ‘킬링 타임’이라는 표현에서 거부감을 느끼는 동시에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어쩌면 그런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황상태에 빠질 것 같았다. 그리고 물었다. 나는 시간을 사용하고 있을까? 아니면 죽이고 있을까? 사용하는 것과 죽이는 것의 차이. 전자에선 존중하고 아끼는 자세가 느껴지는 반면, 후자에선 함부로 여기고 낭비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즉, 시간을 죽인다는 것은 시간을 사용하지 않고 버린다는 것이다. 사용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치를 모르는 건 무지다, 어리석음이다. 그러므로 시간을 버리는 행위는 어리석은 자의 행동이다. 나에게 주어진 현재라는 시간. 이 소중한 시간을 죽이지 않고 살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killing time’이 아니라 ‘saving tim..
기억의 문 낯선 식당. 처음 듣는, 그러나 집중하지 않아도 귀에 착 감겨오는 재즈의 선율. 그리고 그 뒤를 따라 흘러나오는 리드미컬한 보이스. 괜스레 울적해졌다. 이럴 때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소는 어김없이 미국이다. 먼 이국의 땅. 아는 사람, 의지할 곳 하나 없던 새로운 세상. 모든 것이 낯설 땐 낯설다는 표현은 힘을 잃는다. 그것은 완전한 새로움. 새로운 각인이기 때문이다. 아주 잠시, 알 수 없는 메커니즘에 의해서 나는 잊어버렸던 2011년의 기억을 떠올려야 했다. 일상 속엔 이렇듯 다른 시공간으로 우리를 데려갈 수 있는 문이 존재한다. 그 문은 노래 한 곡일 수도 있고, 데자뷰일 수도 있다. 우연찮게 비친 햇살이 만들어내는 각도일 수도, 코 끝을 간지럽히는 바람일 수도 있다. 다만 우리가 그 ..
보기 좋다는 말 보기 좋다는 말은 아주 오래된 말이다. 단지 창세기 1장에 등장하는 표현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인간의 본성 저 깊숙한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이 표현이 신과 사람 사이가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사용되는 현장을 목도한다.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이며 일방적이고 폭력적이기까지 한 뉘앙스로써 주로 힘 있는 자들의 입에서 터져 나온다. 보기 좋다는 말은 지극히 사적이고 주관적이다. 나는 여기서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보기 좋다는 말인가를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힘 있는 자들이 상대적으로 힘 없는 자들에게 보기 좋은 모습이나 행동을 요구하는 것은 주로 관습에 의지한다. 그 관습은 힘 있는 자들을 형성하고 성장시킨 환경이다. 중요한 건 그 공간 역시 하나의 우물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자기중심설 어떤 분야에서 인지도가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를 즐기며 그곳을 삶의 바운더리로 삼는 사람들. 거기에서 삶의 이유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고, 나아가 점점 견고해지는 자기애에 빠지는 이들을 보며 ‘고인 물’이라는 단어 만큼 적절한 표현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고 보면 고인 물이란 표현은 능동태가 아닌 수동태다. 어느 날 보니 자신이 고인 물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영원히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상석에 앉길 즐기는 사람들, 대접받길 좋아하는 사람들 중엔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겠지만, 이들 역시 수동태의 삶을 살고 있다면, 다시 말해 흘러가는 대로, 살아온 대로 살아간다면, 이들의 삶을 본받고 싶은 생각은 전혀 ..
박명 ‘트와일라잇 (twilight)'으로 더 잘 알려진 박명은 해뜨기 전이나 해 진 후 빛으로 밝은 상태를 의미한다. 그 시간은 길지 않다. 곧 해가 뜨거나 어둠이 찾아온다. 노을이 자주 동반되는 이 시간은 낮과 밤의 경계에 해당한다. 어릴 때부터 이 시간을 동경했다. 해뜨기 전에 밖이 환해진다는 사실이 내겐 신비할 정도로 낯설고 놀라운 일이었나 보다. 여전히 어두운 시간, 나는 조용히 집을 나서곤 했다. 동네 뒷산에 올라 일출을 보기 위해서였다. 오르다 보면 주위가 금세 환해졌다. 그러면 나는 마음이 조급해진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마침내 정상에 올라 기다렸던 일출을 볼 땐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저 집에 가야 할 시간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그때 내가 기다렸던 건 일출이었지만 나와 함..
가을 추워지는 길목을 사랑한다. 주위에 울긋불긋한 나무들과 화사하게 핀 꽃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른 아침과 늦은 밤 건물과 건물을 오가며 그 안에서 세상을 혼자 짊어지고 있는 착각 속에 더 이상 빠지지 않고 이렇게 눈을 들어 밖을 쳐다보고 바깥으로 나와 자연을 만끽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시간에 쫓겨 빠르게 차로 오갈 땐 보지 못했다. 버스를 타고 멍하니 창밖을 쳐다볼 때, 자전거를 타고 크리스피한 대기를 가로지를 때,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걸을 때에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누구에게나 보이지만 아무나 볼 수 없는 것들. 이런 것들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고 창조주의 손길에 경탄까지 하는 내 모습이 좋다. 이제서야 뭔가 가진 듯한 기분이다. 어느덧 시월 말이다. 조만간 산을 찾을 생각이다.
듣고 싶은 말들 1. 파멸하지 않기 위해 돈을 벌었는데, 돈 때문에 파멸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도 나는 다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이 생각 때문에 제 가슴이 더 무너집니다. 2. 모든 걸 회복할 수 있을 줄 알고 다 희생하며 버텼습니다. 이제 그 버팀의 끝이 찾아왔습니다. 회복할 것들이 내게 하나도 남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나만 남았습니다. 나는 무엇을 쫓았던 걸까요. 3. 저는 별 어려움 없이 잘 지내고 있답니다. 그렇다는 것이 감사하기도 하지만 부끄럽기도 합니다. 4. 음주뿐만 아니라 일에도 무절제가 있습니다. 열정인 것 같지만 실은 안절부절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늘 바쁘다는 핑계를 대면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선 바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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