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답다는 것‘나다운 삶’을 살고 싶다고 투정을 부리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묻고 싶은 질문이 있다. ‘나다운 나는 과연 어떤 나인가?’하는 것이다. 주로 내가 이상적으로 바라는 나, 내가 다다르고 싶은 모습의 나, 남들에게 보이고 싶은 모습의 나, 등등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그건 아이러니하게도 ‘한 번도 되어본 적 없는 나’일 가능성이 높다. 웃기지 않은가. 나였던 적이 없는 나를 나답다고 한다는 것이.반대의 의미로 나다운 삶을 살고 싶다고 외치는 사람들도 있다. 소수에 해당되는 이들은 나의 부족한 모습 혹은 못난 모습을 숨기지 않고 당당하게 보여도 괜찮은 삶을 살고 싶어 한다. 이들에게 나다운 나는 결핍을 머금도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나이고 싶지 않은, 나인 것이다. 전자나 후자나 하나를 택하는 것은..
복잡하게 좋은 나?신형철의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읽다 보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우리는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 (132페이지)- 그리고 깨닫게 될 것이다.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133페이지)비수가 되어 깊숙한 곳을 찌르는 문장들을 만날 때마다 그렇듯이 나는 저 문장을 읽은 뒤 책을 덮고 눈을 감았다. 산소가 희박한 것도 아닌데 숨이 찼다. 문장을 만나고 이제야 현실을 자각한 사람처럼, 나는 또다시 나를 잃고 살고 있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나의 미련함이 또 한 번 드러난 순간이었다. 타자에게 무례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타자를 쉽게 생각한다는 것..
지혜한계를 명확히 인지하는 것은 포기나 체념이 아닌 지혜다. 회피가 아닌 도전이다. 뒤로 물러섬이 아닌 앞으로 나아감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언젠가부터 불확실성이라는 단어가 좋아졌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그 단어가 주는 불안이 두려웠다. 내 삶에 불확실성이라는 단어를 포함시키고 싶지도 허락하고 싶지도 않았다. 자존심이 상했다. 그렇게 내 삶을 내어준다는 건 비겁하고 무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무의식 중에 불확실성으로부터 내 삶을 사수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것이 잘 사는 삶, 성공하는 삶의 모습 같았다. 인생의 전반전을 이루던 나의 은밀한 가치관이었다.막연하고 유치하고 진부한 바람일 뿐이었다. 인생의 후반전을 막 시작할 무렵, 고통이라 할 수 있을 경험을 하고 난 이후 나는 인생은..
무례하지 않기일희일비하지 말아야 한다고들 말하지만, 정작 소소한 것들에 기뻐하고 슬퍼할 줄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거리를 두고 싶어 진다. 어른스러움을 바라지만 아이 같은 순수함이 없는 사람을 만나면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자라지 못한 어른을 원하는 건 아니다. 아이의 모습을 간직하고 그것을 스스럼없이 드러낼 줄 아는 어른이 나는 좋다. 많은 것을 바라는 건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두루뭉술해지는 부분도 있지만, 점점 더 까탈스러워지는 부분도 있다. 원만한 인간관계를 할 줄도 알지만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를 고를 줄도 알아야 한다. 그 보이지 않는 선은 조금씩 변화를 거친다. 잡음이 나지 않을 수 없지만 내가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여 후회 없도록, 조금은 털털하게 또 조금은 이기적으로 그 선을..

찰나의 아름다움때아닌 눈이 내린 아침, 차 위에 수북이 덮인 눈을 치우다가 아파트 뒷산에 눈이 갔다. 아름다웠다. 불평이 사라졌다. 무거웠던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움츠렸던 몸을 펴고 차가운 대기 속에서 큰 숨을 들이쉬었다. 큰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자유와 해방을 느낀 순간이었다. 아름다움은 불만은 상쇄시킨다. 내 안에 고여있던 어두움을 따스한 미풍으로 말려버린다. 인간이라서 의지와 상관없이 불만에 가득해지고, 인간이라서 의지와 상관없이 구원을 경험한다. 점점 인간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계속 몰랐으면 싶다. 모르니까 맛보는 기쁨의 순간들을 잃고 싶지 않다.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미래를 보장받고 싶어 하지만 그 무슨 수를 써도 보장받지 못하고, 미래를 알고 싶어 하지만 어떤 방..

기억기억이란 신비한 녀석이다. 과거에 스쳐 들었던 시시껄렁한 이야기가 그 사람이 사라지고 나면 느닷없이 찾아와 선명한 사진처럼 눈앞에 펼쳐지고 떠나간 그 사람까지 소환한다. 정작 중요하게 여겼던 말들은 수증기처럼 증발해 버렸는데 유독 별 것 아닌 이야기들이 얼룩진 커피 자국처럼 남아 오래도록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이 현상, 신비가 아니면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오늘도 길을 걷다가 버스가 지나가고 신호등이 바뀌었는데 누군가가 건너지도 않고 가만히 서 있는 것이었다. 어디에선가 본 듯한, 아니 어쩌면 미래를 봤던 건지도 모를 그 장면은 내게 어떤 상념을 불러일으켜 한동안 넋을 놓고 우울한 기분이 되었다. 기시감이었을지도 모르는 순간들은 현재라는 시간의 흐름 가운데 드문드문 박혀 있는 웜홀일지도 모른다. 과..
음악의 힘같은 풍경도 음악을 입는 순간 다르게 보인다. 볼품없이 황량한 들판도, 아무렇게나 방치된 시골의 모습도 음악은 영화 속 한 장면으로 만들어 버린다. 나는 순식간에 시간을 달리고 공간을 뛰어넘어 다른 세상을 여행한다. 공감각적인 체험은 초월의 힘이 있다. 높디높은 빌딩 위에 서서 저 아래를 내려다볼 때처럼 나의 아등바등 대던 삶도 관조하게 된다. 자연스레 나를 들여다보게 된다. 그리고 얻는 깨달음. 나는 또 나를 돌아보지 않고 나를 잃어버린 채 삶을 허투루 소비하고 있었구나...음악의 힘을 체험한다. 몽상일지도 모르지만 내게 덥석 주어진 이 여유 앞에서 나는 어쩔 줄 몰라하는 아이처럼 LP가 주는 투박한 선율 앞에서 그저 멍을 때리고 있다. 한동안은 이렇게 그냥 나를 내버려 두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우아하게 나이 드는 법‘하루하루는 저항하되, 노화의 전체 여정은 받아들이기’2025년 현재의 과학 지식과 기술로는 인간의 노화를 멈출 수도 돌이킬 수도 없다. 최근 들어 노화가 질병이라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참고로 내 책에 추천사를 써 주신 이정모 선생님도 노화는 질병이라는 입장이시다. 사실 추천사에서 노화는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하시면서 또 질병이라고 정의하시고, 그러면서도 품위 있게 나이 들고 싶다고 하시는데, 나로선 모순을 느꼈다). 나는 부정적인 입장이다. 물론 그런 주장에도 일리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검증되고 객관적으로 신뢰할 만한 증거를 기반으로 이뤄진 주장이라기보다는 노화를 극복해 내고 영생을 원하는 인간의 소망이 듬뿍 담긴 주장이지 않을까 싶다. 생물학 박사인 나는 아직까..
자유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 대로‘영화평론가 이동진의 삶의 모토다. 이 문장의 매력은 ’되는 대로‘에 있다. 일견 함부로 살라는 주문처럼 읽힐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표현을 인생에 흐르는 거대한 물줄기, 즉 운명을 받아들이라는 자세로 읽었다. 흔히 생각하는 운명론자의 독법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니체의 ‘아모르 파티’와 같은 맥락으로 읽어야 하지 않나 싶다. 주어진 운명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체념 섞인 허무주의적 자세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의 필연적인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으로 말이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성공도 실패도, 또는 행복도 불행도, 나아가 죽음까지도 삶의 필연성을 긍정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자세가 바로 ‘되는 대로’의 바른 독법이 아닐까 싶다. 사실..
답답한 하루이성으로 어떤 깊은 깨달음을 얻는다거나 어떤 초월을 경험하고 직관적인 통찰을 얻는다고 해서 인격이 나아지는 건 아닌 것 같다. 이성과 감정 사이에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깊은 골이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부단히 읽고 쓰며 관찰, 성찰, 통찰의 삶을 살아도 그 깊은 골을 넘어서지 못하면 끝내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 같다. 이성은 인간만이 가진 고유한 능력이지만, 대개 인간의 이성은 언제나 감정적이라 할 수 있는 어떤 본능적인 행동보다 한 발 늦게 작동하곤 한다. 사건 수습용이라고나 할까?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저지른 직후, 혹은 해야만 하는 일을 못했을 때 이성은 가장 빠른 속도로 일을 하기 시작한다. 인간은 이성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어 이성적일 수 있지만, 대부분의 상..
고요와 침묵고요 속에도 소리가 있다. 처마 끝 풍경 소리, 대나무 숲을 관통하는 바람 소리, 대지를 두드리는 빗소리, 그리고 작은 벌레들의 소리까지. 고요는 소리들로 가득하다. 고요는 작은 소리들의 고향이다. 그 고요가, 그 작은 소리들이 나를 침묵하게 한다. 잠시 내 안의 소리들을 멈추면 비로소 들리기 시작하는 소리들. 늘 존재했으나 언제나 들리지 않던 소리들. 어느새 소란이 잦아들고 평화가 임한다. 고요는 침묵을 요구하고, 침묵은 고요를 경청한다. 침묵과 고요가 공명하는 그 순간을 나는 오늘도 갈망한다. 내 안에 평화가 임하는 시간,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흐린 눈을 씻어낸다. 자, 일어날 시간이다.
즐거운 공부3월 7일 오전 10시 개포하늘꿈도서관에서 진행될 대중강연을 준비하면서 공부의 새로운 맛을 보고 있다. 생물학자로서 내가 했던 대부분의 공부는 전문용어 기반이었다. 대학원생 정도의 지식과 경험을 갖추지 않으면 옆에서 들어도 외계어로 들릴 법한 내용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런 공부는 어느 순간 나의 일상이 되었고 나는 그런 용어를 사용해서 발표하는 일에도 익숙해져 버렸던 것이다.성인 40명 정원이 마감되었다는 사실을 지난주에 확인했다. 주말도 아닌 평일 오전 10시에 동네 도서관 강연에 참석할 성인이라면 대충 어떤 부류일지 짐작이 된다. 아마도 50-60대 여성분들이 절반 이상이지 않을까 싶다. 그들은 전문용어를 당연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들의 언어로 내가 쓴 책 내용을 풀어야 한다..
매임이 주는 자유적어도 한 시간 매일 운동하려고 애쓴다. 일주일에 서너 번 매일 오후 5-6시에 동료와 탁구를 친 지도 벌써 2년 째다. 탁구 치러 직장에 가는 건 아니지만, 나의 직장에서의 일과는 이 시간을 향해 달라간다고 해도 과장은 아닌 것 같다. 일이 많을 때나 적을 때나 늘 이 시간만큼은 사수하려고 애쓴다. 일이 많을 때는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서 먼저 끝내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오늘도 나는 아침 7시 반에 출근해서 일을 마쳤다. 아무도 없는 직장에 가장 먼저 출근하는 데에는 느껴본 자만이 아는 은밀한 쾌감이 있다. 탁구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하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탁구가 일보다 중요하냐는, 바보 같은 질문을 할 수도 있겠다. 물론이다. 탁구는 탁구일 뿐이다. 탁구 안 친다고 세상이 ..
평범할 수 있어서 감사한 일상오랜만에 여유 있게 책을 읽었다. 최근 들어 잠이 는 탓에 읽고 쓰는 시간이 줄어들어 난감했는데, 오늘은 계획 하나가 취소되면서 뜻밖의 시간이 선물처럼 주어져 모처럼 독서를 즐길 수 있었다. 잠을 충분히 자면서도 충만감을 느꼈는데, 독서 삼매경에 빠지면서도 나는 조금은 다른 결의 충만감을 느꼈다. 오늘은 가족과 함께 닭갈비를 만들어 먹고, 한 시간 정도 뻘뻘 땀 흘리며 실내자전거를 타고 맨손체조도 했다. 살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낼 때도, 샤워를 하며 땀을 씻어낼 때도 나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웠으며, 움직일 때 느껴지는 약간의 근육통조차 내 기분을 고양시켰다. 다양하고 다채로운 결의 충만감을 일상에서 누릴 수 있다는 게 축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
시간표잠을 많이 잘 수 있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라는 걸 체득하고 있다. 충만하다는 느낌이 어떤 건지 아무 설명 없이 몸으로 직접 느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행위이기도 한 것 같다.또 잠이 늘었다. 자정을 넘기지 못하고 잠이 드는 횟수가 점점 늘고 있다. 어제는 11시를 겨우 넘긴 시각에 잠이 들었다. 자기 전부터 행복하다는 생각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기까지 했다.잠이 많아졌다는 말은 내겐 곧 읽고 쓰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의외로 삶이 더 풍요롭게 느껴진다. 많은 지식이 가져다줄 수 없는 것들의 소중함을 알아가는 것 같다. 몸을 좀 더 챙겨야 할 시간표다.
전문강연이 아닌 대중강연나의 밥벌이인 생물학 분야에서 강연, 세미나, 심포지움, 등 이름을 달리 하여 이뤄지는 발표는 적어도 대학원생 수준의 사전 지식을 요구한다. 훌륭한 강연이 되기 위해서는 보다 새롭고 보다 날카로워야 한다. 청중은 신선하고 (novel하고) 예리한 지식의 비수에 꽂히길 원한다. 대중강연은 다르다. 참신한 건 좋으나 정도가 너무 세면 대중성을 잃게 된다. 날카로워도 안 된다. 대중은 비수에 꽂히길 기대하기보다 미풍에 가슴 따뜻해지고 무언가를 깨닫게 되는 계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전문강연이 날카로운 칼에 가깝다면 대중강연은 부드러운 솜방망이에 가깝다고 하겠다. ‘세포처럼 나이 들 수 있다면‘으로 3월 7일 개포하늘꿈도서관에서 진행될 첫 강연은 대중강연이다. 나는 어떡하면 냉철한 과학자인..

‘세포처럼 나이 들 수 있다면‘으로 하는 첫 강연입니다. 2025년 3월 7일 금요일 오전 10-12시 서울 개포하늘꿈도서관 4층 배움터에서 열립니다. 2월 17일, 그러니까 다음 주 월요일부터 40명 선착순 마감이라고 하네요. 홈페이지 및 전화로 접수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시간 가능하신 분들은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참석해주실 페친들에게는 제가 강연 마치고 커피 쏘겠습니다^^ 따로 시간 가져요.그리고 이 책을 포함하여 저의 저서 중 아무거나 강연 요청을 해주시면 흔쾌히 고려해서 달려가겠습니다. 저의 저서는 ‘세포처럼 나이 들 수 있다면’ 이외에 ’과학자의 신앙공부’, ‘닮은 듯 다른 우리’, ‘생물학자의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참고로 두 신앙서적은 세종도서로 선정되었습니다). 작은 독서모임으로 불러..
소설을 깊이 읽어야 하는 이유기발하고 엽기적인 장치를 동원하여 독자의 이목을 사로잡아 자본을 겨냥하는 경박한 소설이 아니라면, 소설은 타자를 공감하고 타자의 입장이 되어 보는 훌륭한 도구가 된다. 나로 가득했던 내가 타자의 삶에 간접적이나마 깊숙이 개입해 본다는 건 매력적인 일이다.공감은 두 가지로부터 이루어지는 것 같다. 하나는 머리, 다른 하나는 가슴이다. 머리로 공감한다는 것은 이성과 논리를 기반으로 한다. 이해라는 단어를 써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가슴으로 공감한다는 건 다른 얘기다. 당사자의 입장이 되어 그 상황에서의 복잡한 여러 감정의 실타래를 온몸으로 느껴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자기가 직접 경험한 과거의 기억에 의해 증폭된다. 그러므로 직접적인 경험의 부재는 가슴으로 공감하는 효과를 ..
웅크리는 시간에 해야 할 세 가지웅크리는 시간은 도약을 위해서이지만, 웅크린다고 해서 항상 도약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사실 대부분의 웅크리는 시간은 또 다른 형태의 웅크리는 시간으로 빠르게 전환된다.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준비하다가 중간에 목표가 파기되거나 재설정되는 일이 다반사이지 않은가. 아마도 우리 중에 적지 않은 이들도 이런 지난한 준비기간으로 인생을 수놓고 있으리라 짐작한다. 언제 올 지 모를 도약에 대한 소망도 점점 빛이 바래간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당신만 그런 건 아니다. 인생의 무대 아래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신과 비슷한 과정을 겪는다. 중요한 건 얼마나 큰 도약을 이뤄냈는지, 웅크리는 시간이 얼마나 효율적이었는지 따지고 평가받는 데에 있지 않다. 그것은 행복과도 연결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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