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 하나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한 계단을 오를 땐 근시안적이어야 한다. 바로 앞의 한 계단만 보고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디뎌야 한다. 모든 계단은 바로 그 한 계단의 반복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끊임없이 인지해야 한다. 그렇게 오르다 보면 언젠가는 마지막 계단을 밟게 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될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성실히 오르는 것이다.앞이 캄캄할 때 필요한 건 멀리 내다보는 장기 마스터플랜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인 것처럼, 매 순간에 집중하는 것만이 깊고 깊은 터널을 통과하는 유일한 길일지도 모른다.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의 무게에 짓눌릴 때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견뎌내는 것이다. 지력보다는 정신력, 정신력보다는 체력이, 즉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기본이..
각성과 초월의 삶헤르만 헤세 저, '유리알 유희'를 다시 읽고7년 만에 나는 요제프 크네히트를 조용히 삼켜버린 깊고 푸른 호수 앞에 또다시 서 있다. 방금 티토는 간신히 물밖으로 나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목욕 가운으로 몸을 연신 문지르고 있다. 아침 햇살을 받은 그의 몸에선 김이 피어오른다. 얼굴은 경직되어 있고, 눈은 끔찍한 것을 본 듯 공포가 서려있다. 몸을 문지르는 그의 손에도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자기를 따라오던 명인을 자주 뒤돌아보며 만족스러워했던 그였다. 갑자기 명인이 보이지 않자 급하게 방향을 틀어 잠수도 하면서 명인을 찾던 그였다. 그는 명인을 찾을 수 없었다. 그에게 이 작은 호수는 너무 크고 고요했다. 날벼락처럼 닥친 이 사건은 이 젊은이에게 과연 어떤 ..
지키려고 늘 애쓰는 글쓰기의 원칙 (작년에 썼던 글 수정 및 보완)1. Personal but not private 개인적이나 사적이지 않게>>> 아무도 당신의 사적인 일에 관심 없다. 그러나 사적인 차원을 넘어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생각과 감정을 건드리는 글이 되어야 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즉 개별적이고 특수한 나만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되 보편적인 무언가를 건드릴 수 있는 글이 되어야 한다. 2. Authentic but not too serious 진정성 있으나 너무 진지하지 않게>>> 불필요하게 무거운 글은 아무리 진심으로 썼다 하더라도 잘 읽히지 않는다. 글의 내용보다 글쓴이의 감정이 우세하게 읽히게 되면 부담이 느껴진다. 말과 다른 글만의 고유한 힘을 잘 활용할 필요..
슬기로운 과학자의 여정 2출간된 지 거의 두 달이 다 되어가는 ’슬기로운 과학자의 여정‘의 속편을 쓰려고 합니다. 현재 출간된 책 제목 뒤에 1을 붙일 준비가 된 거죠. 전편이 주인공 민수의 대학생과 대학원생 시절의 이야기를 담았다면 속편은 민수가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박사후연구원으로 유럽을 가게 되어 그룹리더 (교수와 동급)로 살아가다가 한국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이야기로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저는 전편과 동일하게 화자로서 등장하게 됩니다. 미국에 갔다가 실패를 맛보고 유럽으로 가서 민수와 함께 멋진 연구를 하게 되는 이야기로 구성할 계획입니다. 소설이 힘을 갖기 위해서는 이런 큰 이정표보다는 그 이정표들 사이의 과정과 전체 여정 중에 발생하는 사건과 사고들, 소소한 일상들, 인간이기에 누구나 겪을 수밖에 ..
마침내 오늘을 살아내기나는 잘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 설 때마다 나는 많은 후회와 자책으로 나 자신을 원망하게 될 때가 많다. 모든 게 다 나 때문인 것 같고, 나만 그러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 같은 생각에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멍한 상태가 된다. 가족과 함께 하는 순간들, 드러낼 것 하나 없는 평범한 일상들, 자주 권태와 나태로 빠지기도 해서 현재를 탈출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기도 하던 순간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그 소중한 순간들. 그 순간들을 나의 이기적인 욕망으로 모두 놓쳐 버리거나 왜곡시켜 버렸던 과거가 망령처럼 되살아나 나를 잠식시킨다. 하지만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과연 내가 선택했던 것들을 다시 선택하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두 번째 질문 앞에서 나는 다시 할 말을 잃..
Pay it forward이 영어 표현은 알아둘 필요가 있다. 누군가에게 빚진 것을 당사자에게 직접 갚는 대신, 도움이 필요한 다른 사람에게 선행을 베푼다는 뜻이다. 이 행위가 중요한 이유는 선행이 그저 베푼 사람과 받은 사람 사이에서 주고받으며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확장되는 루트가 되기 때문이다. 이 행위를 위해서 필요한 건 두 가지다. 첫째, 선행을 베푸는 사람은 돌려받을 마음을 품지 않을 것. 둘째, 선행의 수혜자는 나중에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는 상태가 되었을 때 반드시 자기보다 더 어려운 사람에게 선행을 베풀 것.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함은 은혜의 루프가 두 사람 사이에 국한될 때의 이야기다. 진정한 은혜는 100% 그냥 주는 것이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이다. 빌려주는 게 아니라 다 주는..
인간이란 존재자좌절을 겪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좌절을 겪었다는 것 자체가 훈장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한 사람의 좌절과 그로 인한 고통은 저울에 올릴 수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흔치 않은 좌절과 고통을 겪은 사람들로부터 우린 지혜를 배울 수 있다. 경험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이기도 하거니와 인간이란 존재자는 경험을 통해 무언가를 배우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 변화를 일궈내기 때문이다. 그 방향은 종종 예상 밖이거나 더욱 끔찍한 좌절과 고통을 가져올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변화의 방향은 언제나 불확실하다. 그러나 그것이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진보도 퇴보도 없다는 말이다. 어리석은 바보는 무풍지대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 그 안에서 서서히 죽음을 맞이한다. 한..
당연한 건 없다위화 저, ‘인생’을 읽고며칠간 푸구이의 인생을 들으며 어느새 높아졌던 내 마음이 다시 있어야 할 곳으로 낮아졌다. 내게 주어진 것들, 그리고 내가 무감각하게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결코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을 수 있었다. 나로 가득했던 내면에 여백이 생겼다. 감사와 겸손과 사랑이 그 빈 곳을 채웠다. 잊고 있던 충만함이 느껴졌다. 한 사람의 인생을 주의 깊게 들여다볼 수만 있다면 그 시간은 결코 우리를 배신하지 않고 넉넉한 열매를 안겨준다. 눈은 가까운 곳이 아닌 먼 곳을 바라보게 되며, 나 하나도 수용하지 못할 정도로 비좁던 마음 밭엔 어느새 따스한 미풍이 불어 날카롭기만 하던 이성과 논리를 내려놓고 내가 인간임을, 나약하고 불완전하며 유한한 존재임을 자각하게 되며, 비로소..
'슬기로운 과학자의 여정' 교보문고 '오늘 뭐 읽기' 코너 매대에 2주간 진열 지난 일요일, 그러니까 11월 16일부터 2주간 교보문고 11개 지점 '오늘 뭐 읽지?' 코너 매대에 '슬기로운 과학자의 여정'이 진열됩니다. 이 책의 존재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읽히면 좋겠습니다. 드라마 작가 눈에 띄면 얼마나 좋을까나 ㅎㅎㅎ 수능도 끝나고 연말에 아이들에게 이공계 대학생, 대학원생의 실제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이 책을 통해 제공해 주실 수 있으니 많은 애용 바랍니다. 그리고 지역 도서관 희망 도서에 꼭 신청 부탁드려요~ 5분 채 걸리지 않으니 미루지 말고 바로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리스도인보다 더욱 그리스도인다운엔도 슈사쿠 저, '내가 버린 여자'를 읽고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어릴 적 소아마비로 다리를 약간 저는 대학생 요시오카는 친구인 나가시마와 함께 좁고 허름한 하숙집에서 함께 살고 있다. 늘 돈과 여자가 있으면 좋겠다고 노래를 부르며 아르바이트로 겨우 생계를 이어나가는 실정이다. 어느 날 전단지를 돌리는 단순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밝은 별'이라는 낡은 잡지 하나를 줍게 되고 집으로 돌아와 마지막 페이지 독자란에 실린 글귀를 읽게 된다. 와카야마 세츠코 씨 팬으로부터 편지를 기다린다고 쓴, 영화를 좋아하는 19살의 여성 모리타 미츠의 글이었다. 요시오카는 여자를 경험해보고 싶다는 단순한 호기심과 저급한 욕망에 이끌려 미츠의 이름 옆에 적힌 주소로 편지를 보..
재독의 맛한국으로 돌아오고 1년이 지나갈 무렵 '도스토옙스키와 저녁식사를'이라는 독서모임이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성사되었고 기적처럼 매달 열 명 안팎의 사람들이 1년 반 동안 지속적으로 모여 열다섯 작품이 넘는 도스토옙스키 선작을 함께 읽어냈다. 돌이켜보면 정말 꿈만 같았던 추억이 아닐 수 없다. 함께 했던 독서모임 가족들에게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 감사를 해야 할 것 같다. '도스토옙스키와 저녁식사를' 독서모임에서는 매번 감상문 쓰기가 숙제였다. 숙제라는 단어가 거북하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이 과정은 함께 읽고 나누기 위해 서로에게 하는 최소한의 예의이자 배려라고 나는 생각했다. 요즘 시대에 책만 읽어도 그게 어딘데, 감상문까지 쓰라고 하면 어디 엄두가 나지 않아 이 모임이 지속될 수 있겠어?라는..
글쓰기에 대하여8년 전부터 #김영웅의책과일상 이라는 해쉬태그로 여기 페이스북에 독서감상문을 올려왔다. 그 이후, 아카이브 용도로 사용하는 티스토리 블로그, 그리고 내 글쓰기 실력을 객관적으로 확인받고 싶어 약간의 허세 어린 시도로 시작했던 브런치, 그리고 알라딘 나의 서재에도 같은 글을 포스팅해오고 있다. 450편가량의 감상문이 인터넷에 떠돌고 있기 때문에 의외로 많은 경우 어떤 책을 검색하면 내 글이 뜨기도 한다. 8년 동안 쉬지 않고 지속한 결과일 것이다. 코로나가 터지기 전, 그러니까 2017년 언저리, 페이스북에는 서평가들이 넘쳐났다.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몇몇 살아남은 자들 가운데 나도 있다. 평균 일주일에 한두 편 올리는 것을 지속했더니 초창기에 내 글에 반응을 많이 해주던 분들도 이젠 ..
과학을 쉽게 이해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과학자가 되고자 한다면 과학자의 삶을 알아야 한다‘슬기로운 과학자의 여정‘으로 진행되었던 이번 북토크에서 크게 깨닫게 된 사실 한 가지는, 과학을 보여주려면 과학자의 삶을 보여줘야 된다는 것이었다. 이 말은 많은 것을 함축한다. 그중 하나는 요즈음 더 흥행하고 있는 과학 커뮤니케이터들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무슨 말인고 하니, 아무리 과학 커뮤니케이터들이 어려운 과학을 쉽게 풀어준다고 해도 사람들은 재미와 함께 과학을 조금 더 이해하는 정도에 머물 뿐 학부모로서 자기들의 자녀들에게 과학자를 꿈 꿔보라고 제안하지도 않고, 자녀들 역시 어려웠던 개념이나 원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을 뿐 장래에 과학자가 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더 이상 사람들이 과학자..
살아남은 자의 몫가즈오 이시구로 저, '남아 있는 나날'을 다시 읽고밤늦게 책을 덮고 먹먹한 심정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어두워진 창밖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스탠드 불빛에 비친 내 모습만이 흐릿하게 어려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아채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 인생을 훑을 수 있었다. 놀라운 건 그게 내겐 너무나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는 점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나처럼 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어떻게 해도 완독 후 내 감정을 텍스트로 완전히 포착할 수 없을 테지만, 긴 잠을 자고 깨어난 듯한 기분이었다고 하면 조금은 설명이 될는지도 모르겠다. 아, 나는 이런 책들을 사랑한다. 읽고 나서 어떻게 할지 ..
체감하는 축복오늘 우스갯소리로 동료와 이런 이야기를 나눴다. 운동을 하며 몸을 움직이며 몸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걸 체감한다는 것 자체가 축복일지 모른다고. 이 말에 대한 반응으로 노화를 체감하는 게 왜 축복이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숨 쉬기 운동만 하며 일상을 살아가게 되면, 다시 말해 몸을 많이 사용하지 않는 생활 패턴에 길들여지게 되면 몸의 노화를 알아채는 데에 둔할 것이고,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다고 해서 노화가 안 일어나는 것도 아닐 테니, 누구나 겪는 노화를 매일 체감하는 편이 오히려 더 건강한 생활습관에 가깝다는 논리다. 몸이 안 좋아지고 있는 걸 아는 편이 모르는 것보다 낫지 않냐는 말이다. 게다가 그것을 알아채고 운동으로 극복할 수 있는 부분은 극복하려고 애쓰는 시도도 할 수 ..
공감각적 독서독서는 공감각적이다. 같은 책을 읽어도 어느 장소, 어느 시간에 읽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효과를 내기도 한다. 나는 책만 읽는 게 아닌 것이다. 나와 책이 있는 시공간도 읽는다. 뿐만 아니다. 나만 읽는 게 아니다. 이 시공간도 나와 함께 책을 읽는다. 공감각적인 독서는 독서의 지경을 넓힐 뿐 아니라 깊이와 풍성함을 더하며 전환의 효과를 낸다.내가 사는 구축 아파트 뒷산으로 곧장 이어지는 한남대 둘레길을 조금 걷다 보면 한남대로 바로 진입할 수 있다. 사진에 담은 이곳은 내가 자주 찾는 장소이다. 여기서 나는 주로 책을 읽고 글을 쓰기도 하고 사색에 잠기기도 한다. 아무도 몰랐으면 하는 장소가 누구에게나 한 군데 쯤은 있지 않을까. 비밀도 아니고 모두에게 공개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왠지 이 ..
돌아보니아침마다 차를 타고 정문을 통과했지만 몰랐다. 건물 안으로 들어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정문 쪽으로 뒤를 돌아보니 그제야 보였다. 내가 지나온 길 양 옆으로 서 있는 나무들이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완연한 가을이 이미 내 일상을 깊숙히 침투한 것이다. 지난주 토요일 속리산 법주사 근처를 두 시간 정도 영천에서 올라오신 부모님과 거닐며 이제 막 진입한 가을을 즐겼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올해도 잠시 왔다가 알아채면 이미 사라지고 없는 가을을 느끼지 못할 뻔했다. 아무래도 혼자 있으면 좋은 곳을 다니는 횟수가 줄어들기 마련인가 보다. 어떻게든 가족과 다시 합치기를 바라지만, 그 방법에 대해서는 묘연하기만 하다. 나이 오십이 다 되었는데 당장 코앞에 놓인 미래도 전혀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사..
정착과 떠남의 경계에서줌파 라히리 저, '내가 있는 곳'을 읽고줌파 라히리가 미국을 떠나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어로 읽고 쓰고 말하고 생각하는 삶을 살던 시절 썼던 세 번째 책이다. 첫 책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와 두 번째 책 '책이 입은 옷'이 산문집이었다면, 이 책 '내가 있는 곳'은 소설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의 목소리는 한층 더 뒤로 물러나 있다. 이탈리아어에 조금 자신이 붙었던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소설가로서 이탈리아어 소설 한 편을 꼭 써보고 싶기 때문이었을까? 형식은 달라졌고, 화자 뒤에 숨어 목소리를 아꼈지만, 세 번째 책인 이 소설에서도 앞의 두 산문에서 보였던 존재에 대한 불안과 정체성의 혼란은 그대로 이어진다. 이 책은 46개의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묘..
익명성으로 숨길 수 없는 정체성줌파 라히리 저, '책이 입은 옷'을 읽고퓰리처상을 수상했던 미국 작가 줌파 라히리는 인도 벵골 출신이자 미국 이민자로서 평생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전성기를 누리던 2012년, 그녀는 돌연 이탈리아 로마에서 2년간 거주하며 벵골어도 영어도 아닌 이탈리아어로 읽고 쓰고 말하는 삶을 선택한다. 이 책은 이탈리아어로 탄생한 그녀의 두 번째 산문집이다. 이탈리아어로 쓴 첫 번째 산문집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책은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다. 제목 '책이 입은 옷'은 말 그대로 책의 표지를 뜻하지만 단순히 표지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옷 때문에 정체성의 혼란이 가중되었다고 고백한다. 미국으로 이민 후 다른 미국 아이들처럼 보이고 싶..
불꽃의 이면프랑수아즈 사강 저, '패배의 신호'를 읽고양은냄비처럼 쉬이 뜨거워지는 사랑, 한동안 꺼질 줄 모르는 굶주린 호기심, 모든 게 완벽해 보이는 환상과도 같은 착각. 풋풋하고 솔직한 젊음의 발현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공교롭게도 이 작품의 제목은 '패배의 신호'다. 승리처럼 보이는 젊음에 대한 찬사만으로 이 작품을 읽으면 안 된다는 저자의 암묵적인 메시지일까. 내게 이 제목은 불꽃같은 젊은 사랑의 이면을 함축하는 표현으로 읽혔다. 이상보다 현실을 보는 저자의 시선도 느껴졌다. 그렇다면 패배란 어떤 패배였을까. 한 계절에 모든 것을 불태우고 사그라드는 사랑의 종국을 말하는 건 아니었을까. 루실의 처음과 마지막 위치가 모든 것을 말해주는 건 아닐까. 루실과 앙투안의 첫 만남부터 불꽃이 튀었지만 그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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