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_’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를 읽고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는 순간존재자의 껍데기가 아닌, 그 존재자 안에 숨겨진 존재 자체가 한꺼번에 드러나는 순간을 하이데거는 '존재가 말을 거는 순간'이라고 한다. 현대 기술문명사회에서 한낱 에너지원으로 소급 및 인식되는 인간이라는 존재자가 저마다 고유한 모습을 드러내는 축제의 순간이다. 이런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를 엄습하는 불안이라는 근본기분을 느껴야만 하고, 그것으로부터 도피하지 말아야 한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피를 택한다. 계속해서 자신이 훌륭한 자원으로 인정받는 상태를 허망하다고 느끼고 싶지 않을뿐더러 그것을 유지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것이 매트릭스 안 세상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만약 ..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자와 건너지 못한 자와의 소통살다 보면 여러 번 강을 건너게 된다. 강은 저마다 의미를 가지지만 모두 다 같지는 않다. 어떤 강은 한 번 건너면 돌아갈 수 없다. 영원히. 다양성이 공동체에서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지에 대한 이야기는 많다. 나 역시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다른 감정을 느끼며 반응하는 이들과 언제나 함께 해야 건강한 공동체가 된다는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이런 다양성을 어떻게 끌어안을지에 대해서는 좀처럼 이야기되지 않는다. 이 글은 이 점에 대한 나의 사견이다. 문제는 이것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 가운데에는 그저 여러 다른 강을 건넌 이들만이 아니라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사람들이 언제나 소수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수평적인 다양성만이 ..
지식공동체 그믐에서 저의 여섯 번째 저서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로 3월 한 달 동안 채팅방에서 독서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4일 남았네요. 모임 멤버 중 가장 많이 나눠주신 한 분께서 이런 사진을 올려주셨습니다. 좋은 문장이 많다고 칭찬도 해주셨답니다. 저기 붙은 형광 책갈피들이 보이시죠? 어떤 저자가 이런 사진을 보고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이게 다 도스토옙스키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작가죠. 도스토옙스키 작품을 읽어볼 생각을 하신다면 석영중 교수님의 ’매핑 도스토옙스키‘와 제가 쓴 ’도스토옙스키와 저녁 식사를‘을 꼭 옆에 두고 가이드 삼으시길 바랍니다. 전자는 라시아문학 전공자가 쓴 도스토옙스키와 그의 작품들의 전반적인 배경에 대해 파악할 수 있도록 도..
삶으로 설교하다안진섭 저, '말씀 따라 한 걸음씩'을 읽고새누리2교회 대표목사이자 약 2년 전부터 나에겐 '우리 목사님'이 된 안진섭 목사님은 파킨슨씨 병을 앓고 계신다. 파킨슨은 알츠하이머 다음으로 대표적인 퇴행성 뇌질환이며, 알츠하이머가 기억력 감퇴 같은 인지 장애 쪽이라면 파킨슨은 도파민 신경세포의 소멸로 인한 운동 장애가 주된 증상이다. 60세 이상에서 약 1퍼센트 내외의 발병률을 보이는 이 병을 앓았던, 혹은 앓고 있는 사람들 몇몇을 나는 알고 있다. 전설적인 권투선수 무함마드 알리, 영화 '백 투 더 퓨처'의 주인공이었던 마이클 J. 폭스, 그리고 가톨릭 교황이었던 요한 바오로 2세, 한국인으로는 600백만 불의 사나이, 인디아나 존스, 그리고 '스타워즈'의 한 솔로 목소리를 맡았던 성우 양지..
한 편의 소설, 한 편의 수업문지혁 저, '중급 한국어'를 읽고'초급 한국어'와는 달리 '중급 한국어'의 공간적 배경은 미국이 아닌 한국이다. 주된 시간적 배경은 저자의 분신이자 동명의 작품 속 화자인 문지혁 작가가 귀국하고 8년이 지난 후, 여전히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코로나19의 영향 아래 놓여 있던 2021년 3월부터 강원도에 위치한 어느 학교에서 글쓰기 수업을 진행했던 한 학기 동안이다. 이번에도 한 학기 밖에 가르치지 못한 신세가 된 화자의 등단하지 못한 채 남아 있는 작가로서의 자조적인 뉘앙스는 ‘초급 한국어’에 이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뉴욕에서와는 달리 이젠 한 여자의 남편이자 한 아이의 아빠가 되어 있는 화자는 삶의 다른 부분에서의 의미와 행복을 찾은 듯해 보인다. 그래서일까? ..
**과신뷰에 연재 3월호 글이 공개되었습니다. 제목을 편집장님께서 멋지게 뽑아주셨네요^^****1,2월에는 불멸성을 살펴보았다면, 3,4월에는 분화를 살펴봅니다. 생물학과 신앙 사이를 오가며 묵상할 수 있는 글을 시간 내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세포를 통해 배우는 영적 묵상 분화, 영적 공동체의 존재 방식 불멸성이 줄기세포와 암세포의 공통점이었다면, 이번엔 차이점인 ‘분화’를 매개로 하여 신앙적인 성찰과 통찰을 얻도록 하자. 3. 분화 (1) 분화의 시작, 하나의 조상 우리가 익히 들어본 여러 이름의 세포들, 이를테면 뇌세포, 피부세포, 혈액세포, 간세포 등 200여 종이 넘는 세포들은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줄기세포로부터 만들어진다. 줄기세포가 자기복제만을 위해 세포분열을 한다면 이..
식상함틀에 박힌 생각과 전개, 남들이 들어도 별다른 문제 제기가 없을 것 같은 미리 계산된 멘트들, 자신이 정해놓은 바운더리 안이 가장 안전한 곳이라는, 이성을 넘어서는 강력하고 오래된 관성 같은 믿음. 나는 이런 것들을 식상하다고 말한다. 진부하다는 표현도 좋겠다. 이를 달리 말하면 생명력이 없다는 말이다.가장 이해 안 되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식상함 혹은 진부함 안에 스스로를 가두어놓고 그 안에서 안정감을 누리는 부류다. 아니, 진짜 안정감을 누리는지에 대해서는 미지수다. 그런 것처럼 보이는 모습을 남들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것 한 가지는 확실한 것 같지만. 이 글에서는 이들이 내게 안겨준 놀라운 점 몇 가지를 적어보려 한다. 첫째, 이런 부류가 의외로 많다는 사실이다. 자기 생각이 없는 이들이 어떤 ..
진짜 비극"이 세상에는 오직 두 가지 비극만이 존재하네. 하나는 자기가 원하는 걸 갖지 못하는 비극이고, 다른 하나는 마침내 갖는 비극이지. 두 번째가 훨씬 나빠. 이게 진짜 비극이라고!" 문지혁 작가의 '중급 한국어' 167페이지에 적힌 문장이다.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원더미어 부인의 부채' 중에 나오며, 저자 자신으로 생각되는 화자가 자기 책상에 붙어 있는 문구라고 한다. 역시 오스카 와일드는 천재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전체를 두 개로 나누고 그 두 개를 모두 부정하는 방식. 왜 나는 적어도 하나는 긍정이어야 한다고 믿었던 걸까. 아니, 둘 다 긍정일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역시 나는 오스카 와일드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둘 다 부정이어야 말이 된다. 그래야 문장이다. 그래야 책상..
큐티큐티의 부흥 시기를 직접 경험했고 그것의 문제점들을 또 직접 경험했으며 지금은 더 이상 일반적으로 알려진 방식으로 큐티를 하지 않는 나는 큐티 문화가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증진시키는 효과보다는 정체시키는 효과가 크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이 점에 대한 나의 사견일 뿐이라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큐티의 유익은 시간과 장소를 구별하여 매일 하나님 말씀을 들여다보고 묵상하며 자칫하다간 휩쓸리기 쉬운 시대의 조류 한가운데에서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사명을 점검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일반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그리스도인들은 세 가지 장소에서 그에 따른 정체성을 입는다.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직장(혹은 학교), 그다음으로 시간을 많이 보내는 가정, 그리고 상대적으로 가장 시간을 적게 보내는 교회에서 각각 ..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이질적인문지혁 저, ‘초급 한국어’를 읽고문지혁 작가의 소설 ‘고잉 홈‘을 읽으며 뭔가 익숙하면서도 여전히 낯설고 이질적인 감성을 느낀 까닭은 그가 묘사한, 혹은 자신의 분신이기도 한 미국 유학생의 불안정한 신분과 그에 따른 불확실한 삶, 그리고 그 삶 저변에 조용히 깔려있는 불안감에 남다른 공감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문지혁 작가를 작가 반열에 올린 첫 작품인 ’초급 한국어‘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다. 내가 느낀 건 아마도 '향수'였을 것이다. 미국 생활 11년은 내 인생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전환점으로 자리 잡았지만, 그 긴 기간을 살아낸 내 감성을 한 단어로 압축하라면 아무래도 나는 ‘불안‘을 꼽아야 할 것 같다. 아무런 배경 없는 머나먼 타국에서의 이방..
진정한 묵상가한동안 잊고 있었다. 작년 여름에 이종연 편집장님으로부터 선물 받은 헨리 나우웬의 '제네시 일기'를 매일 조금씩 읽다가 겨울 즈음에 다른 책들에 파묻힌 이후 잊고 있었다. 오늘 저녁, 보름 간의 책태기를 벗어나면서 책들을 정리하다가 다시 이 책을 발견했다. 가름끈은 9월 24일, 25일, 26일 일기가 적혀 있는 페이지 사이에 놓여 있었다. 24일 일기는 아주 짧았다. 헨리 나우웬이 존 유드 신부와 의견을 나누다가 진정한 묵상가에 대해 사유한 것을 적고 있었다. 내겐 어떤 메시지 같았다. 기념하고자 여기에 옮겨본다. 208페이지 맨 아래 놓인 문장이다. "진정한 의미의 묵상가는 자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속세를 등지는 게 아니라 세상으로 뛰어들어 그 중심에 서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이들을 가리..
버려라. 취하기 전에. 변화하고 싶으면.무엇인가를 지속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한 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여유’다. 여유는 진부하지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정신적 여유와 육체적 여유. 정신적 여유에 대해서는 그리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가지 않는 곳에 몸을 담을 수 없다는 건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육체적 여유는? 이것이 이 글에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인데, 맞다, 육체적 여유는 당신이 생각하는 체력과 동의어다. 체력의 필요성과 중요성은 누구나 공감한다. 그러나 어떤 일을 지속하기 위해 체력이 필요하다는 건 아무나 공감하지 못한다. 이상한 일이다. 그게 그건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체력과 어떤 일의 지속을 연결시키는 것에 서툰 것 같다. 그들이 생각하는 체력..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_’로자 룩셈부르크와 혁명의 변증법’을 읽고혁명은 변증법적 발전으로 얻을 수 있는 귀한 열매처음 들어보는 철학자의 사상을 단 스무 페이지로 요약한 글만 보고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불가능하다고 안 하게 되면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며 나는 항상 제자리, 아니 퇴보하게 된다. 제자리는 고여 있는 자의 자리가 아니라 언제나 다시 돌아온 자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흐르는 물처럼 제자리는 언제나 변화를 맞이하고 성장을 거듭하는 자의 자리이며 그래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제자리는 고여 썩는 우물이 되어선 안 된다. 제자리는 언제나 변함없지만 새로운 곳이다. 그러므로 제자리를 지키는 건 끊임없는 공부와 실천이 필요하다. 제자리를 지키기만 해도 멋진 삶이라고 할 수 ..
달리기, 잠 그리고 감사달리기를 시작한 이후 눈에 띄게 달라진 게 있다. 잠이다. 누군가에겐 이게 뭐 대수냐 싶기도 하겠지만, 불면증을 겪어본 사람은 깊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누워서 잠을 청하면 5-10분 이내로 잠들어 6-7시간을 내리 잘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만족스럽고 삶을 충만하게 만드는지. 미국에서부터 불면증에 시달렸다. 잠이 드는 것도 문제였지만, 2-3시간 마다 잠에서 깨어 다시 잠드는 것도 힘들었다. 6-7시간은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정작 잠 자는 시간은 3-4시간 정도 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생활이 반복되면 체력은 물론 모든 활력이 감소될 수밖에 없고 정신적으로도 위축될 수밖에 없다. 불면증은 사람을 조용히 갉아먹는 쥐와 같은 것이다. 불면증은 읽고 쓰는 삶을 시작..
안주는 안전하지 않다오래전의 일이다. 늘 성장하기를 원한다고 했고, 우물 안에 갇힌 것 같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기도 했으며, 낯설고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여 진정한 자아를 찾겠노라고 다짐까지 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이런저런 합리화를 하면서 끝내 안주하기를 선택했고, 나는 그의 앞에서 아무 말도 해 줄 수가 없었다. 좋은 말과 좋은 글이 좋은 말과 좋은 글로만 끝나는 장면들을 도대체 나는 살면서 얼마나 더 지켜봐야 하는 걸까. 기대는 실망으로, 실망은 구천을 맴돌다가 끝내 나 자신에게로 화살을 돌린다. 이 무한반복에서 나도 벗어나고 싶다. 하지만 이 반복이 나를 강하게 한다는 사실을 무시하지는 못한다. 이게 어쩌면 내가 짊어져야 할 숙명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도 하게 된다. 어차피 ..
사소한 것들사소한 것들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우리의 일상을 이루는 주축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들은 종종 예기치 못한 사건의 복선이 되기도 하고, 하나의 경로가 되기도 하며, 때론 그 자체로 비밀스러운 의미를 드러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일들만이 우리의 시간을 추동하는 힘이라면 시간은 더디 흐르다가 멈춰버릴지도 모른다. 우리가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소한 일들이 시간의 톱니바퀴를 이룬다. 그것들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역학이 바로 우리의 시간이다. 그 안에서 모든 것들이 일어난다. 시간은 공간이 되고, 사건은 새로운 층위의 삶을 여는 문이 된다. 사소한 것들이 시간이자 공간이라는 것. 우리를 이루는 모든 배경이라는 것. 그러므로 우리를 알아챈다는 것은 우리의 배경을..
현재성과 생명력살다 보면 잊은 지 한참 지난 나의 꿈을 다시 기억나게 해주는 일을 만난다. 그러면 그 꿈을 처음 가지게 되었을 때의 내 손과 발, 그리고 귀에까지 들리던 심장 박동을 다시 듣게 된다. 가슴이 다시 뛰고 모든 게 순식간에 재해석되며 나도 모르게 사소한 일 따위로 불평과 불만에 가득 차 있던 내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또 한 번 성장하는 순간이다. 양파 껍질 같은 우물을 한 겹 더 탈출하는 순간이다. 우연을 가장해서 내 평범한 일상으로 침투해 오는 필연을 맞이할 때마다 나는 다시 아이가 된다. 그 아이는 이것저것 많이 알아버려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결정한 비겁한 어른의 껍데기를 깨부수고 나온다. 다시 젊어지는 순간이다. 눈이 한층 더 깊어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나는 눈이 깊은 사람은 아..
우연과 운명어릴 때부터 클래식을 좋아했다. 일주일 용돈 오백 원일 때에도 나는 깐도리나 바나나맛바 혹은 짱구나 새우깡을 사 먹지 않고 모으고 모아 헌책방에 가서 애거서 크리스티의 빨간색 표지의 추리소설을 사거나 (당시 중고책 한 권에 오백 원 정도였다), 좀 더 돈을 모아 노란색 커버의 클래식 카세트테이프를 샀다. 원하던 무엇인가를 감내하고 마침내 구한 것은 그냥 돈 주고 산 것보다 더 귀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내게 추리소설과 클래식 테이프는 보물과도 같았다.아내와 아이가 미국으로 가고 나서부터 적적한 집에서 나는 KBS 클래식 FM을 즐겨 듣는다. 클래식을 좋아해서이기도 하지만,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 감성을 어떻게든 유지하고픈 나의 절박한 몸부림이기도 하다. 요즘은 너무나도 쉽게 숏폼 같은 동영상에..
이유내가 철학 공부를 놓지 않는 까닭은 첫째, 생각 없이 휩쓸리는 무리에 속하고 싶지 않아서, 둘째, 얕고 가벼운 감성팔이 문장들을 끄적대며 글을 쓴답시고 자족하고 싶지 않아서다. 밀도 있는 글을 좋아한다. 그렇게 잘 쓰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도 내가 많이 미숙해서일 것이다.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마치 가지고 있는 것처럼 행세하고 싶지도 않다. 글 읽기를 좋아하고 쓰기도 사랑하는 나는 그렇게 무언가를 가진 척하는 글을 어렵지 않게 알아본다. 나 역시 누군가가 보면 그중 하나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적어도 스스로 배우는 일을 하지 않으면서 가르치려고 하거나, 자신의 가벼움을 치장해서 있는 척하지는 않는다. 가식과 허세는 일란성쌍둥이라서 나는 그런 것을 볼 때마다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느낀다. 그런 글 속의..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운명을 믿든 믿지 않든 모든 인간에게 어느 날 문득 닥쳐오는 운명적인 만남을 보여준다. 그 만남은 언어와의 만남이었고, 문장과의 만남이었으며, 책과의 만남이었다. 그리고 그레고리우스는 그렇게 만난 세상 안에서 저자였던, 이미 고인이 된, 아마데우를 조우한다. 누구를 만나게 되는지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운명적인 만남은 어느 날 문득, 갑자기, 전혀 예기치 못한 순간에 느닷없이 일상으로 침투하여 깊숙한 내 안의 나를 일깨운다. 내 안의 내가 긴 잠에서 깨어나는 사건에 방점이 있다.그 순간을 경험한다면, 그 순간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누구나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자아가 한 번 깨어났다는 건 이제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뜻이니까. 그게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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