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고 싶은 설교프레드릭 비크너 저, '진리를 말하다'를 읽고설교자들이 주요 독자층인 듯한 이 책은 설교를 주로 듣기만 하는 나에게 다시 설교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해 주었다. 저자가 말하는 설교를 듣고 싶은 마음에 잠시 내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런 설교를 들어본 횟수가 손꼽을 정도인 것 같아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이 시대 이 한국 교회에 목사는 참으로 많은데 참 설교자가 요원하다는 안타까움과 함께 말이다.진부할 정도로 너무 당연해서 아무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 명제 중 하나는 '설교는 진리를 말해야 한다'일 것이다. 모든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고 늙어가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비슷한 여정을 겪는다. 특히 늙어가는 중엔 비틀거리면서도 어쨌거나 가야 할 길을 인도받아 뚜벅뚜벅 걸어가는..
소중한 사람들이 시대에 책으로 대화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건 감사할 일이다. 특히, 책 중에서도 소설이나 시 같은 문학작품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건 더 그렇다. 함께 작품 속으로 들어가 작품 속 세계와 그 세계를 이루는 등장인물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에 개입하여 공감하고 그러면서 궁극적으로 나 자신을 돌아보며 위로도 얻고 치유를 경험하기도 하며 중요한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잊고 있던 소중한 것들의 의미를 재발견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말이다. 이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음은 살면서 누구나 누릴 수 있지만 아무나 누릴 수 없는 축복일 것이다.현실에 민첩하고 돈의 흐름을 꿰뚫고 있으며 사리에 밝아 만날 때마다 영웅담을 과시하는 성공자들과의 만남은 이상하게도 점점 멀리하게 된다. ..
브릭에 연재하고 있는 저의 대학/대학원생 시절의 이야기와 허구가 4:6 정도로 이뤄진 팩션 '슬기로운 과학자의 여정' 7화가 공개되었습니다. 저의 주종목은 마우스 유전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전자를 제거하여 그 유전자의 기능을 밝혀내는 작업이지요. 그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이공계 기피 및 인재들의 한국 기피가 심화되는 이 시대에 풋풋한 예비 생물학자의 이야기에 귀기울여 보세요.https://www.ibric.org/s.do?uRofVfCznl
처음으로 감수에 이름을 올린 따끈따끈한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추천사도 함께 썼는데, 이 책 소개를 저의 추천사로 대신합니다. 제가 읽어본 과학과 신앙 사이의 고질적인 문제 해결에 대한 책 중에서 저는 단연 이 책을 손꼽고 싶습니다. 창조과학이니 창조론이니 유신진화론이니 여전히 시끄러운 이 시대에 이 책이 마음을 시원케 하는 효과를 내리라 생각합니다. 일독을 꼭 권합니다. 추천사 아담과 게놈 하나님을 더 알고자 하나님이 저자이신 두 책, 성경과 자연을 진지하게 읽어나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언젠간 묻게 된다. 더욱이 과학 시대를 살아가며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고 자유함을 얻은 모든 그리스도인이라면 두려워하지 말고 겸손하게 물을 필요가 있다. 아담은 오늘날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의 생물학적 조상인가? 아담과 하와는..
발생과 창조 그리스도인들에게 묻겠습니다. 사람은 만들어지는 걸까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걸까요? 혹시 이 질문 앞에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느끼시진 않았나요? 제가 대답을 해보겠습니다. 먼저, 생물학자로서의 대답입니다. 사람은 만들어집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대답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자, 어떤가요? 이 두 대답이 모순된다고 여기시나요? 그렇다면 과학과 신앙은 모순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과학과 신앙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생물학자로서의 대답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대답 역시 모순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만들어지고, 또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제가 서두에서 던진 질문 앞에서 우린 하나를 택해야만 하는 압박을 전혀 느끼실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가..
꼰대의 기원 인생은 정착과 떠남의 무한반복으로 이뤄진다. 정착은 안정을 가져다주고, 떠남은 전환을 선사한다. 안정은 아주 쉽게 태만을 야기하고, 전환은 자주 불안으로 점철된다. 태만의 강에 빠지지 않고, 불안의 바다에 잠식되지 않는 인생을 살 수만 있다면, 그 인생은 정착과 떠남의 연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반복된 삶의 구조를 살아가지만 그 구조를 껴안을 수 있으며 그 구조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을 수 있다. 마침내 초월의 인생을 살 수 있다. 우물은 하나의 완전한 세상이다. 정착하고 싶을 만큼 안정적인 공간이다. 그곳의 안정으로부터 부와 명예와 권력을 얻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그 우물을 하나의 완전한 세상을 넘어 유일한 세상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들의 말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은 그곳이 유일한 세상이므..
'나'라는 지하 세계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다시 읽고 차라리 골랴드낀이 나았다,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름도 밝히지 않는 이 작품 속 일인칭 화자는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지하’라는 또 하나의 세상에서 잉태된 최종 병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스스로를 소외 혹은 고립시키면 사람이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이 작품을 통해 여실히 볼 수 있었다고나 할까. 조금 과장해서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이를 위해 도스토옙스키가 고안한 가상의 생체 실험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 페이지를 닫으며 다시 조용히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역시 도스토옙스키다! 아무렴, 이 맛에 도스토옙스키를 읽지! (그런데 왜 이 말을 하고도 나는 겸연쩍은 걸까!)..
작은 정의 C는 A로부터 B에 대한 얘기를 듣는다. 부정적인 뉘앙스로 가득차 있다. C는 별 생각 없이 A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A의 B에 대한 시선은 고스란히 C의 것이 된다. 비판적 사고의 결여가 낳는 폐해다. 살면서 수차례 이런 폐해로 꽤 많은 사람을 잃었다. 미꾸라지 같은 인간의 뱀 같이 교활한 혀로 인해 나는 소중한 관계에 위협을 받아야 했다. 안타까운 사실은 A가 주위에 산재해있다는 것.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주위에 C가 A보다 더 많다는 것. 아주 빈번하게 A는 영향력 있는 사람일 경우가 많다는 것 (목사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것). 늘 배제되고 소외되는 건 B라는 것. A의 교활함과 C의 무비판적 수용을 피해가고 싶지만 피할 수 없다는 게 우리네 현실이다. 나는 앞으로도 A 때문에 억울..
조용히 뭔가를 해나가고 있는 사람이 주위에 있다는 건 인생을 그리 헛되이 살지 않았다는 증거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작은 일의 무게를 알고, 그 무게를 책임질 줄 알며, 책임지는 과정으로부터 즐거움과 만족을 느끼는 사람. 결코 여유가 없는 삶인데도 불구하고 이런 삶을 성실하게 지속하고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내게 든든한 힘이 되고, 자고 있는 나를 깨우며, 삶의 이유까지 깨닫게 해 준다. 나아가,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가득 차게 만든다. 선한 영향력이란 이런 것일 테다. 원만한 인간관계를 위해 적당히 노력할 필요는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내 24시간이 채워진다면 아마도 내가 느끼게 될 감정은 공허함일 것이다. 나 역시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웃고 울고 떠드는 시간으로부터 위로와 공..
별의 재료를 아는 사람이 아닌 별의 노래를 듣는 사람이길 이종태 저, '경이라는 세계'를 읽고 철학, 신학, 문학, 과학 등의 모든 학문, 그리고 모든 지식과 깨달음의 문을 열고 정직하게 걸어가다 보면 반드시 마주하게 되고, 또 마주해야만 하는 것. 앎이라는 과정의 동반자이자 길잡이, 나아가 그 과정 자체의 의미를 돌아보게 하고, 그것으로 한 걸음 다가간 대상과의 거리를 줄이기는커녕 더 확대시켜 결코 다가설 수 없다는 인정을 마음 중심으로부터 기쁘게 받아 내고야 마는 것. '경이'일 것이다. 인간은 저마다의 모습으로 앎이라는 과정을 겪게 된다. 모름과 앎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변증법적인 발전을 해나간다. 그래서 앎은 앎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모름으로, 그 모름은 다시 앎으로 변모해 나간다. 특히 인간은..
기적이 아닌 사랑 엔도 슈사쿠 저, '사해 부근에서'를 읽고 묵직한 한 방을 제대로 맞았다. 날카로운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먹먹한 가슴이 되었다. 꽤 오래갈 것 같은 예감이다. 아, 이렇게 또 엔도 슈사쿠를 만났다. 명쾌한 답이 아닌 질문을 던지는 책. 의심을 사라지게 하는 대신 자명하게 여겼던 것들까지도 반추하게 만드는 책. 내가 알던 지식과 내가 믿던 믿음이 건강한지, 치우치진 않았는지 다시 묻게 만드는 책. 책은 도끼이기도 하지만 안개 자욱한 숲으로 인도하는 안내자이기도 하다. 나는 찍히고 깨달으면서도 동시에 불안과 의심의 깊은 숲을 홀로 통과하게 된다. 확신의 죄에서 해방받는 유일한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또한 나는 책을 읽는, 아니 읽어야만 하는 이유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여섯 번째..
인간스러움과 인간다움 다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열 명이 넘는 사람의 경우를 보면, 창조과학을 지지하는 사람과 현 정권을 여전히 지지하는 사람들이 같은 과로 구분이 된다. 놀라운 사실이다. 그들의 공통점이 무엇일지 생각해 봤다.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인데, 그것은 바로 ‘반지성’이라 할 수 있을 그 무엇이었다. 이들은 굉장히 닮았다. 과학, 신학, 철학, 정치, 이렇게 서로 다른 영역이지만 이들에겐 같은 패턴이 보인다. 즉 영역과 상관없는 문제인 셈이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이라는 이유일 것이다. 내가 관찰한 이들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듣지 않는다. 상대방의 말을 듣는 척하면서 머릿속으로는 자기가 다음에 할 말을 생각하고 있다. ..
냉소의 강 건너기 배움과 공부를 통해 우물 밖으로 나온 자는 필연적으로 냉소의 강을 건너게 된다. 혼란의 시기일 수도 있다. 다시 우물 안으로 돌아가고 싶을지도 모른다. 초기의 반동적인 힘 때문일까. 자기가 속했던 곳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들로 머릿속이 가득 차 어지러울 것이다. 그동안 물처럼 자연스러웠던 일종의 안정감이 사라지면서 두려움과 불안에 잠식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속고 살았다는 불유쾌한 기분은 영혼에 각인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면서 자아의 분열을 겪기도 할 것이다. 무언가를 알게 되었다는 것의 거부할 수 없는 힘을 느끼며 교만한 현자인 동시에 방황하는 영혼 같다는 묘한 기분을 한동안 느끼게 될 것이다. 환영한다. ..
배움과 용기 우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동력은 배움, 즉 공부다. 공부를 통해 ‘나’라는 우물 밖으로 나와 마침내 나를 바라볼 수 있다. 공부는 자기 객관화를 지향하고, 자기 객관화는 공부의 궁극적인 열매다. 우물 안에 머물면 성장은 없다. 그러나 시간은 똑같이 흐른다. 그 시간의 끝엔 나밖에 모르는 나이 들고 고집 센 아이가 남게 된다. 남의 시선에 휘둘리면서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아이. 말은 많이 하나 자기조차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분열된 자아들로 똘똘 뭉친 아이. 새가 되기 위해서는 알을 깨뜨려야 한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파괴는 창조의 전신이다. 파괴하지 않으면 창조는 없다. 파괴를 두려워하지 말자. 파괴를 위한 파괴가 아닌, 창조를 위한 파괴. 우물 안의 평화는..
작은 일의 무게 성실한 지속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해내지 못하는 일 중 하나다. 나는 언제나 이런 것들에 진리가 담겨 있다고 믿는다. 압도적인 성취의 순간이 아니라 진전이 없는 것 같아 보이는 지난한 과정들 안에 모든 게 담겨 있다고 믿는다. 그 시기를 어떻게 견디고, 즐기며, 그러면서도 정의롭고 공의롭게 살아내느냐에 인생의 방점이, 즉 자신의 믿음과 가치관과 세계관이 모두 담겨 있다고 믿는다. 크고 화려한 것들이 아닌 작고 빛바랜 것들이 품고 있는 가치가 내겐 더 소중하다. 그 어떤 성공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어제 단상을 남겼다. 연장선에서 오늘은 공부 안 하는 사람의 치명적인 특징 하나를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작은 것들의 무게를 잘 모르고 무시한다는 것..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