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작년 말 아내에게 선물 받은 헤세 선집 중 일곱 번째 책의 감상문입니다. 한 달동안 바쁜 일정 가운데서도 장 그르니에와 카뮈를 짧게 책으로 만나보았습니다. 그러나 제겐 헤세가 더 잘 와닿습니다. 한 달만에 돌아온 헤세의 맛은 참 좋았습니다. 조금 슬프기는 했지만요.**


두 개의 심장.


헤르만 헤세 저, '로스할데'를 읽고.


책을 덮고, 아들을 향한 나의 마음은 주체할 수 없는 사랑과 함께 후회와 반성으로 벅차올랐다. 태어난 지 반 년도 채 지나지 않아 아들은 간질병 진단을 받았었다. 아직 젖도 끊지 않았고 말도 못하는 갓난아이에게 그것은 너무나 가혹한 형벌과도 같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상징후가 발견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 해맑은 웃음을 짓고 있는 아들에게 부모인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그저 의사가 처방해 준 정신과 약을 먹이는 것이 다였다. 인간의 무력함과 나약함을 나는 그 조그마한 어린 생명을 통해서 오랫동안 충분히 먹먹해질 만큼 통감했었다. 어느 날 새벽, 예고도 없이 찾아온 사건이었다.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우리에겐 가히 치명적이었다. 수개월 동안 나와 아내가 겪었던 그 절망감과 탄식, 소리 없는 절규와 기도의 외침들이 순식간에 되살아나 나를 감쌌다. 나는 한없이 작아졌다. 비록 아들은 기적적으로 치유가 되었고, 그래서 일단락된 사건이지만, 결코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 기억 속으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책을 읽고 나서 말이다.


'로스할데'는 요한 페라구트라는 저명한 화가와 그의 아내, 그리고 나의 아들과는 달리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고 고통 속에 죽어간 7살의 어린 아들, 피에르가 살았던 저택의 이름이다. 그곳은 시내와 떨어진 한적한 시골에 위치해 있었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장소였던 로스할데는 화가에게 늘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고, 진지하고 고상한 아내에게는 표면적이나마 평화를 선사했으며, 엄마와 아빠 사이를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였던 피에르에게는 동화 속을 체험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그러나 로스할데의 아름다움은 더 이상 그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았다. 행복은 먼 과거의 산물이었고, 현재에도 여전히 빛나는 로스할데의 아름다움은 그들의 빛 바랜 추억을 덮어주는 황금가면과도 같은 것이었다. 조용히 끈질기게 지속된 가정의 불화는 로스할데의 깊은 영혼을 갉아먹기 시작했었던 것이다. 참지 못한 큰 아들 알베르트는 그 때문에 다른 지방에서 기거하며 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화가인 요한 베라구트는 3년 전에 별채를 지어, 작업은 물론 식사 외의 모든 일상을 그곳에서 보내고 있었다. 본채와 별채를 자유로이 들락날락 거리는 피에르는 오래된 로스할데의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끈이었다.


방금 앉은 딱지가 깊은 상처를 치유한 증거가 될 수 없듯, 그들의 오래된 불화는 굳게 다문 입술처럼 굳어져 보였을 뿐, 속에서는 곪을 대로 곪아 있었다. 어느 날, 인도에서 온 화가의 옛 친구, 오토 부르크하르트의 방문은 그 딱지에 작지만 치명적인 구멍을 내는 뾰족한 못 역할을 해낸다. 로스할데의 풍부한 아름다움 아래에 숨겨져 있던 그들의 적나라한 현실이 비로소 수면 위로 드러나 타인에게 알려지는 계기가 된 것이었다. 제 3자인 부르크하르트의 눈에도 그들의 불화는 희망이 없어 보였다.


베라구트는 부르크하르트에게 모든 자초지종을 숨김없이 토로했고, 친구가 돌아간 이후에 혼자서 침잠하며 오래된 문제의 본질과 그 동안 미뤄왔던 해결책을 실행에 옮기기로 서서히 결단해 나간다. 그의 유일한 미련은 바로 아들 피에르였다. 수면 아래 깊숙이 있었던 오래 묵은 문제를 끄집어낸 뒤, 그는 더욱 예술가의 혼에 집중하여 그림을 그려나갔고, 그러면서 점점 아들 피에르까지도 단념하기로 마음먹게 된다. 그러면 모든 것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생은 결코 마음 먹은 대로 되어지지 않는 법. 아내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피에르까지 내려놓기로 결단하고, 그래서 모든 것에서 초월한 듯한 가벼운 마음까지 갖게 되었지만, 피에르가 기다려주지 않았다. 피에르는 뇌수막염에 걸려 며칠 만에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내심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유일한 사랑을 느끼게 해주었던 아들이 죽고 나서, 화가는 다시 가정의 화목을 도모하기는 커녕, 오히려 더욱 초연해져서 아내와 큰 아들에게 모든 것을 양도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하면서 여행을 떠나 보낸다. 모든 것을 놓아준 것이다. 그리고 그는 더욱 예술가의 영혼을 불태우며 그림 그리는 일에 매진한다. 어쩌면 영원한 떠남이 될지도 모르는 부르크하르트와 약속한 인도로의 여행을 기쁨으로 기다리면서 말이다.


저자인 헤르만 헤세 역시 첫 결혼에 실패한 아픔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은 결혼 후 10년 뒤에 출간되었고, 그의 평탄하지 않았던 결혼 생활의 얼룩진 자국이 짙게 묻어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한 가지 묘하고도 흥미로운 건, 그가 이 책을 통하여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예언해 버린 셈이었다는 점이다. 헤세 역시 이 책의 주인공 역인 화가 요한 베라구트처럼 문학이라는 예술에 정진하기 위하여 아내와의 공식적인 이혼을 책을 출판한 후 9년 뒤에 치러내기 때문이다.


헤세는 아마도 이 책을 통하여, 예술가의 혼을 꺼뜨리지 않고 더욱 깊은 우물을 파내는 창조적인 일을 하기 위해서는, 가정이 가져다 주는 행복마저도 내려놓을 수 있는 결연한 의지가 필요하다고 암시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결혼 생활이 불행으로 치달을 줄은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겠지만, 베라구트가 아들의 죽음 이전에 아들을 포기하는 장면과, 아들이 죽은 후 마치 해방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 장면이 의미하는 바는 이를 잘 뒷받침하는 듯하다. 아들 피에르는 예술가의 심장이 아닌 한 아이의 아빠로서의 심장, 또한 한 인간으로서의 따뜻한 피가 흐르는 심장을 유일하게 뛰게 해주었던 존재였다. 아들의 죽음과 함께 멈춰버린 그의 따뜻한 심장을 다시 뛰게 할 사랑이 그에게 다시 찾아올 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예술가의 심장만이 남은 화가에게서 난 왠지 모를 차가움과 가련함이 느껴졌다. '꼭 그래야만 하는가?' 하는 석연치 않은 질문이 남는 건 그저 나의 기우에 불과한 걸까?


만약 내게 두 개의 심장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베라구트나 헤세와는 달리 후자를 택할 것이다. 예술적인 면에선 어떤 의미를 남길지 몰라도, 자기 자신을 건조하게 만들며 바싹 태워 차가운 뼈와 고기 덩어리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육체에 남은 심장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전자를 택한 헤세의 선택 덕분에 한 세기가 지난 지금 내게도 그의 예술가적인 성향은 충분히 영향을 미치지만, 그의 삶을 생각하면, 특히 그의 불행했던 결혼 생활을 생각하면 안타깝고 측은한 마음이 앞선다. 어떤 면에선 능동적인 선택이라기보단 되어진 일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의미를 입히고 재해석한 결과이겠지만, 그래도 한 인간의 행복을 격려하고 응원하는 것이 내겐 훨씬 더 가치가 있어 보인다. 나 같은 냉철한(?) 과학자의 눈에는 읽히지 않는 영역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오늘은 헤세가 슬퍼 보인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