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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 아내에게 선물 받은 헤세 선집 중 여덟 번째 책의 감상문입니다.**


하나의 색을 넘어 하나의 빛을 향하여.


헤르만 헤세 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읽고.


프리즘을 통과한 빛의 스펙트럼 중 우리 눈에 보이는 색의 시작과 끝, 그리고 희망의 약속이 담긴 무지개 색의 시작과 끝. 우린 빨간색을 좋아할 수도 있고 보라색을 좋아할 수도 있으며, 빨간색이 될 수도 있고 보라색이 될 수도 있다. 단, 기억해야 할 두 가지는 두 색 모두 하나의 빛에서 나왔다는 사실과 보이지 않는 빛의 영역이 보이는 영역보다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이다. 아쉽게도 우리의 인생은 너무도 짧은 나머지, 그나마 드러난 현존재 격인 가시광 영역의 다양함과 다채로움조차도 모두 맛보지 못한 채 죽음에 이르는 숙명을 지닌다. 빛 자체가 될 수 없다면, 인간다운 삶은 밋밋한 단파장의 교만한 외골수가 아닌, 풍성히 모든 파장을 아우르는 낮고 겸손한 방향을 추구하는 과정에 있어야 할 것이다. 빛 자체가 아니고선 삶을 장악할 수 없으며, 삶이란 장악하는 대상이 아닌 탐험하며 알아가는 대상이라 믿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의 삶이란, 스스로 꺾여서 받은 빛을 굴절시키고 무지개를 만들어 누군가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되거나, 한 걸음 더 나아가, 풍성한 빛 이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빛의 영역까지도 암시해줄 수 있는 하나의 프리즘으로 거듭나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다양한 사람이 있듯, 내 안에도 다양한 자아가 존재한다. 드러난 자아와 미처 드러나지 않은 자아까지도 모두 모여 나를 이룬다. 이 책에 등장하는 나르치스의 말에 따르면, 그 어느 것도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에, 각 자아는 부분적인 것이고, 성장하는 것이며, 무한한 가능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잠재적인 것이 실현되고 가능성이 현실성으로 바뀔 때가 있다. 하나의 자아가 선택되어져 대표격으로 성장하는 과정의 일환이다. 이를 통해 '나'는 한층 더 '내'가 되며, 우린 이를 자아실현이라고도 부른다.


그렇다면 내 안의 무수한 자아 중 과연 어떤 자아가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것일까? 내가 가진 고유한 색깔을 드러내는, 즉 나의 천성에 맞는 자아는 어떤 것일까? 우린 때로 적성 검사나 본인이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 등으로 이를 알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살아가며 직접 숱한 경험을 거치지 않고는 결코 단번에 알아낼 수는 없다. 어른이 되어가는 것은 그런 경험들을 통해 얻은 지식으로 여러 자아를 성찰하고 그 중 하나를 선택하여 성장시키고 실현해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헤세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도 자아의 성찰과 성장, 그리고 실현의 이야기를 다룬다. 두 개의 자아가 한 인물 안에서 분열하여 변증법적인 성장을 이루는 그의 작품 '황야의 늑대'나 '페터 카멘친트', 그리고 '싯다르타'와는 달리, '수레바퀴 밑에', '게르트루트', 그리고 '데미안'에서처럼, 이 작품에서도 헤세는 상반된 두 자아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독립된 두 영혼을 창조해낸다. 그리고 그렇게 창조된 두 인물에게 이름을 붙였고, 그 이름은 곧 이 책의 제목이 되었다.


나르치스는 정신적인 사람으로 대표되며, 상상력보다는 논리와 이성을 중시하는 학자 스타일이다. 그는 상대적으로 차갑고 어두운 느낌의 성숙함을 타고났다. 반면 골드문트는 천부적인 예술가 재능을 가진 사람의 대표격이다. 그는 외모에서도 따뜻하고 밝은 느낌의 어린애 같은 순진함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나르치스가 빨간색이었다면 골드문트는 보라색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두 파장의 색이 모두 하나의 빛에서 출발했듯,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서로 상반된 천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고귀한 성품이었다. 두 영혼 모두 같은 창조주에 의해서 빚어진 고유한 성품을 가진 존재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저 다를 뿐이었다. 그리고 이 책은 그들이 각자의 자아를 실현해나가는 과정, 그러니까 각자에게 부여된 똑같이 고귀한 성품을 자기의 천성에 맞는 자아를 찾아감으로써 성장시키고 실현시키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쓰여진 이 책은 4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에도 지루할 틈을 일체 주지 않는 치밀한 논리와 스토리 전개를 자랑한다. 중학생 때 한 번 읽어봤기 때문에 나로선 이번이 재방문임에도 이 책은 놀랍도록 내게 새로움을 듬뿍 선사해주었다. 미성년자로서 읽었을 때와는 달리, 이번엔 9살 아이를 가진 결혼 14년 차의 마흔을 넘긴 한 성인 남성이자 아버지로서 읽었기 때문인지, 책을 공감하는 넓이와 깊이도 달랐다. 특히 골드문트가 나르치스를 떠나 홀로 방랑하며 겪었던 수많은 경험들, 이를테면 외로움과 배고픔과 추위를 이겨내는 과정, 그리고 숱한 여자들과의 사랑과 불륜으로부터 쾌락과 함께 행복과 공허함을 맛보는 과정, 또한 폭력과 살인, 흑사병으로 말미암은 수많은 죽음들을 직접 현장에서 목격하고 체험하는 과정들이 예전보다 훨씬 더 사실적으로 다가왔다. 25년 남짓한 세월이 내겐 자아실현의 아름다움보다 인간의 죄악에 대한 사실적 공감을 더욱 증진시킨 셈이다.


헤세의 이 작품과 가장 비슷한 작품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데미안'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두 작품 모두, 정신적으로 숭고한 가치를 지녀 누구보다도 그 면에서 앞서있는 자가 (데미안과 나르치스) 존재하고, 그들로부터 각각 정신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받아 마침내 자신의 자아실현을 이루는 자가 (싱클레어와 골드문트)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이도 있는데, 그것은 헤세가 선정한 각 작품의 제목에서 짐작해낼 수 있다. 소설 '데미안'은 데미안의 도움을 받아 자아실현을 이루는 싱클레어의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쓰여졌음에도 불구하고, 제목에서는 싱클레어가 없다. 반면,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는 두 이름이 모두 등장한다. 이러한 차이는 여러 가지 추측으로 설명이 가능할 수 있으나, 자아실현을 해내는 인물의 관점에서 볼 때 난 하나의 개인적인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즉, 두 작품 모두 제목은 자아실현을 해내는 자에게 영향을 끼친 인물의 이름이 적히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데미안'에서는 데미안에서 싱클레어로 흐르는 일방적 영향을,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사이에 흐르는 쌍방적 영향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이 책의 제목에 두 이름이 모두 적힌 이유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어 서로의 자아실현을 한층 더 도왔기 때문이다. 실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서로의 잃어버린 반쪽이었던 셈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쌍방의 관계를 선호한다. 데미안처럼 결코 다가갈 수 없는 신적인 존재가 아닌,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관계에서처럼 서로에게 부족한 점을 배워가며 서로를 인정하고 격려하는 동일한 비중의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다.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만큼 높이 솟은 산이 되기보다 주위에서 누구나 오를 수 있는 오름직한 동산이 되어 모두가 모두에게 동일한 비중의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를 꿈꾼다. 빨간색이든 보라색이든 상관없이 그 어느 색이라도 자신의 색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다른 색과의 조화로 인해 더욱 풍성한 스펙트럼을 만들어내는 세상을 꿈꾼다. 동시에 모두 하나의 빛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높고 낮음이 아닌 다르지만 동등한 색으로 존재하길 기대한다. 그래서 이토록 풍성한 빛의 향연으로 인해 그 이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고 비교할 수 없이 커다란 빛의 영역을 겸손하게 인지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빛의 근원을 향해 모두가 머리를 숙이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진정한 자아의 실현은 나를 넘어서는 것이다. 하나의 색이 아닌 여러 색을 만들어낸 하나의 빛을 향하는 것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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