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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의 뿌리.
한나 앤더슨 저, '겸손한 뿌리'를 읽고.
하나님 형상과 모양대로 지어진 인간이 하나님을 닮고, 또 닮으려고 노력하며, 실제로 닮아가는 현상은 자연스러운 모습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자연스러운 과정에 죄가 개입했다는 사실도 우린 익히 알고 있다. 인간의 타락이 묘사된 창세기 3장에 따르면, 인간은 뱀의 거짓말에 마음이 동하여 하나님이 금하신 명령을 어긴다. 모든 짐승 중 가장 간교한 뱀은 선악과만 따먹으면 인간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했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뱀 덕분에, 자신은 피조물이면서도 조물주와 같아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하나님을 닮는 정도가 아니라 같아질 수 있는 기회였다. 그리하여 결국 인간은 스스로 선악과를 따먹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소위 '원죄' 이야기다.
죄가 '자기애'라는 정의는 이제 더 이상 새로운 해석이 아닐 정도로 잘 알려져 있다. 자기애는 곧 교만, 그리고 자기중심적 세계관과도 직결된다. 타자를 배제하는 마음과 행동, '남'을 죽여서라도 '나'를 살리려는 의지와 실천, 타인을 그저 자기 주위에 존재하는 도우미 아니면 훼방꾼으로 제멋대로 판단하고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방식 등은 모두 자기애, 즉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의 발현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만과 반대되는 개념인 '겸손'이 기독교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클 수밖에 없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하는 말 안에도 이미 겸손이 전제가 된다. 진정한 사랑은 '나'를 넘어서 '남'을 향할 때만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요약은 저자가 서문에서 우스갯소리로 한 말처럼, 세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너는 하나님이 아니야." 그렇다. 이는 내가 서두부터 창세기 3장 이야기를 끄집어내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하나님 닮는 것을 넘어 하나님과 같아지기 위한 인간의 도약. 원죄라고도 불리는 이 사건은 곧 겸손과 교만의 경계를 넘어서는 일이었다. 저자는 말한다. 겸손은 인간이 하나님을 닮도록 지어졌으나 하나님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 책의 제목, '겸손한 뿌리'의 속뜻일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죄가 들어왔던 근원으로 올라가야 그와 반대되는 겸손의 뿌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이 책의 저자는 버지니아 산골에서 사역하는 한 목사의 아내이자, 남편의 목회를 돕는 사모, 그리고 세 자녀의 엄마인 '한나 앤더슨'이다. 처음 만나는 그녀의 글에서 나는 어떤 편안한 끌림을 느꼈다. 잔잔한 에세이 형식으로 쓰여진 이 책은 주로 그녀의 원예 이야기를 통해 얻은 겸손함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다. 그녀가 밝히는 이 책의 목표는 '불안과 동요 가운데 교만이 스스로 드러나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겸손이 스트레스와 성과와 경쟁이 반복되는 굴레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며, 그녀는 이 책이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의존하는 존재로 생각하고 그렇게 살도록 도와주는 책'이 되기를 바란다.
세상의 성공과 인정은 우리가 우리의 존재를 스스로 책임질 수 있어야만 얻을 수 있다고 암묵적으로 요구한다. 자신의 한계와 맞서 싸우기를 요구한다. 열정과 노력이면 누구든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고 말하는 자기계발에 관계된 책이나 강연은 또 이 세상에 얼마나 허다한가. 그러나 경쟁을 피할 수 없는 이 세상에 살면서, 심지어 경쟁에서 이겨 승자의 자리에 오른 사람조차도 마음 속에는 걱정과 두려움을 대면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고 난 생각한다. 한계를 뛰어넘으면 해결될 것 같고, 좀 더 높이 오르면 걱정과 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만, 정작 한계를 뛰어넘으면 또 다른 한계를 마주하며, 좀 더 높이 오르는 일에 성공한다 할지라도 그보다 더 높은 자리가 우리를 유혹하는 법이다. 교만한 존재에게 만족과 평안은 없다. 그들에게 사랑이 없음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세상살이에 환멸을 느끼고 종교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은 세상 모든 염려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하여 세상을 등지기도 한다 (기독교인 중에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는 기본적인 전제를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고, 여전히 이분법적인 사고체계에 갇힌 채 피의 피라미드를 끊임없이 오르는 자들에 대한 반동적인 세력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잠시 세상을 떠난 듯해 보일 때조차도 어떡하면 더 효과적이고 빠른 방법으로 그 반동적인 세상에서 승자가 될지 고민한다. 그곳에서도 피라미드를 구축하기에 발 빠른 것이다. 저자 또한 이러한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박함을 추구한다고 해서 반드시 우리가 겸손한 사람이 된다거나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그 소박함이 모두 우리의 교만과 자기의존을 숨기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덧붙인다. "겸손해지려는 시도조차도 빠른 시간 내에 교만에 물들 수 있다." 즉, 겸손이란 결국 어떤 인간의 행위로 표현되어지지만, 그 행위 자체가 겸손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겸손의 뿌리가 중요한 이유다. 겸손한 뿌리는 역시 하나님과 인간 존재의 경계와 위치를 정확히 아는 지혜와 그 지혜에 따른 순종에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겸손에 대한 다양한 측면을 이야기해준다. 영혼 없는 '좋은 말 대잔치'처럼 그저 겸손해야 한다고 말하는 덕담이나 지침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어떤 큰 사건 (이를테면 세상의 큰 성공이나 큰 실패)을 겪고 나서 크게 깨달은 폭풍과도 같은 메시지로 이루어져 있지도 않다.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으로부터 그녀의 깊은 묵상과 함께 길어낸 지혜의 말들이다. 거짓 겸손의 여러 모습을 예리하게 간파하면서도 그녀는 그녀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금 묵상할 수 있도록, 그래서 어느새 높아진 자아의 위상을 다시 겸손하게 낮추며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도록 돕는다. 잔잔한 그녀의 필체는 부드럽게 타이르는 엄마의 손길처럼,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의 마음 속 교만까지도 수치심을 이겨내고 드러내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리라 생각한다. 세상살이와 인간관계, 교만과 겸손, 그리고 그것들이 뿌리 박고 있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보길 권한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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