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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다시 인간을 보다.
조선희 저, '세 여자'를 읽고.
조선희 작가의 ‘세 여자’는 팩션 (faction)이다. 역사적 사실 (fact)이 작가의 상상력이란 옷을 입고 탄생한 소설 (fiction)이기 때문이다. 책 끝머리에서 작가는 “역사기록에 반하는 상상력은 자제했고, 소설이 역사를 배반하지 않도록 주의했다”고 썼다. 책에 이름 석 자로 등장한 사람들은 모두 실존인물이다. 정확하게 표기된 날짜들은 모두 실제 역사기록이다. 역사도 해석의 산물이기에, 더군다나 불완전하며 불연속적인 기록의 파편들로 짜깁기될 수밖에 없는 시대를 다루고 있는 책이기에, 작가가 이 책을 쓰는 입장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책을 완성하기까지 실로 방대한 연구와 고증 절차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작가가 이 책을 출판하기까지 걸린 12년이란 세월은 웅숭깊은 그녀의 정성이 그대로 담겨있는 듯하다. 작가는 허정숙, 주세죽, 고명자의 눈이 되어 1920년부터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 생생한 한국 역사의 현장을 바라보며 이 책을 썼지만, 12년이란 긴 시간은 이 책을 네 여자의 이야기로 만들기에 충분했던 것 같다.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쓰여진 이 책의 숨은 화자는 네 번째 여자, 조선희 작가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난 비교적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우리나라 20세기 전중반의 암울한 역사와 다분히 가려졌던 시대정황을 작가의 눈을 통해 볼 수 있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났던 그 숱한 일들이 살아나 한 편의 흑백영화가 되어 그 필름이 아직도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세 여자를 모두 소환하여 마치 나도 그 현장에 있던 것처럼,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느끼고 아픔과 한을 공감할 수 있게 만든 건 분명 작가의 역량일 것이다.
700 페이지가 넘는 장편소설인 이 책은 오래된 흑백사진 한 장에서 시작한다. 주세죽과 박헌영의 딸인 비비안나 박이 한국을 방문할 때 들고왔던 여러 사진 중 하나다. 사진 속엔 세 여자가 단발을 한 채 청계천에 발을 담그고 있다. 1920년대 한국은 근대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봉건적 잔재가 압도적인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정황을 감안할 때, 그 사진이 지닌 혁명성은 그들의 운명을 벌써부터 예견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렇다. 세 여자는 모두 시대가 만든 혁명가였다. 주목할 점은, 그들이 남자가 아닌 여자였고, 자본주의가 아닌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공산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 사회의 마이너리티에 속했던 여자와 공산주의자라는 조건을 지닌 혁명가의 눈으로 이 책은 한국의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까지의 역사, 그리고 그 이면까지도 함께 바라보게 해준다. 학창시절 국사 시간에 배운 역사와는 많이 다를 수도 있다. 정치, 경제, 사회적 강자였던 남자이자 미국 제국주의 영향을 짙게 받은 자본주의자의 입장에서 서술되었던 역사와는 질적으로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는 왜곡됐던 사실을 바로 아는 기회가 될 수도 있고, 사실인 줄 알았으나 치우친 해석에 불과했던 역사적 진실을 비로소 마주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학창시절 국사 시간을 가장 싫어했던 나는 부끄럽게도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무지했고 관심도 없었다. 역사에 관심도 없고 공부도 하지 않는 자의 머리 속에는 형편없는 지식이 들어있을 수밖에 없다. 정리되어있지 않을 뿐 아니라 아예 정리 자체가 불가능하다. 믿고 싶은대로 믿었던 주관적 지식의 파편들과 이곳저곳에서 주워들은 (대부분 승자와 강자의 해석일 것이다) 이야기 조각들, 그리고 사지선다의 정답으로 채택되었던 교과서적 지식으로 난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마흔이 넘은 내 머리 속에 들어있던 한국 20세기 전중반에 대한 역사지식은 거의 전무했다. 3.1 운동, 유관순 누나, 윤봉길 의사, 안중근 의사, 백범 김구, 도산 안창호, 제 2차 세계대전, 미국이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떨어뜨린 원폭으로 인한 일본의 무조건 항복, 해방, 8.15 광복, 그리고 김일성과 이승만, 한국전쟁, 맥아더 장군, 3.8선, 휴전, 미국과 소련을 양극으로 하는 냉전체제의 시작 등의 단편적인 지식들이 헝클어져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그 당시 여자들이 혁명가로서 역할을 했다는 사실과 자본주의가 아닌 공산주의가 그 시대에 항일운동을 비롯한 혁명을 이끌었다는 사실은 내겐 일종의 충격이었다. 1980년대, 새우깡 한 봉지가 100원 하던 시절, 포장지 끄트머리에 적혀있던 ‘멸공, 통일’이란 글자를 무심히 보면서 과자를 뜯어먹던 나에게 공산주의는 적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바로 알게 된 사실 한 가지는, 80년대 당시의 공산주의는 이미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한참을 벗어나 김일성이 내건 주체사상에 입각한 개인숭배를 전제로 한 해괴한 파시즘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848년의 팸플릿에서 시작된 19세기의 이론은 20세기에 세계적 규모의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전개됐지만 세기가 바뀌기 전에 종료되었다. 한반도 북쪽의 소비에트 실험은 일찍이 공산주의 트랙에서 튕겨나와 해괴한 파시즘으로 가버렸다.” 또한 ‘작가의 말’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설은 세 여자와 그들 남자들의 인생과 함께 1920년대에서 1950년대에 걸쳐 한국 공산주의운동의 탄생부터 소멸까지를 다뤘다. 나는 1955년 주체사상이 나오고 1956년 연안파가 숙청되는 것으로 한국의 공산주의는 종료됐다고 보았다.” 즉, 70년대 중반에 태어나 80년대에 새우깡을 먹기 시작했던 내가 알았던 공산주의는 엄밀한 의미에서 공산주의가 아닌 셈이었다. 이 책에서 세 여자가 공산주의자였다는 것은 김일성의 주체사상이 나오기 이전, 그러니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한국 해방의 피묻은 뿌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김구가 아닌 여운형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고, 주세죽과 김단야가 사후 수십년이 지난 뒤 소련과 한국에서 복권되고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로 이름을 올렸으며 건국훈장을 받았던 이유일 것이다.
작가의 필력에 연신 감탄하며 책을 읽었다 (사실 이 감상문이 오점이 되지 않을까 내심 걱정도 된다). 그래서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 읽어주고 싶은 부분도 참 많다. 그러나 에필로그에서 한 부분만 발췌해 본다. 책에 흐르는 사상과 감정을 관통하여 간략히 정리도 해주는 글이다. “그들은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착취하면 안 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착취하면 안 된다고 믿었다. 농부는 자기 땅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아프면 돈이 있건 없건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사람이 평등해야 존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이들은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흥망성쇠를 자신의 생애로 겪어냈고 과학이라 믿었던 역사법칙의 오작동에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들은 온전히 시대의 자식들이었다. 폭격 맞은 나라에서 파편처럼 주변으로 튕겨나간 사람들, 그것은 절박하고도 다급한 디아스포라였으며 슬프고도 고난에 찬 글로벌 라이프였다. 그들 대부분은 무덤조차 남기지 못했다. 그들 부류의 삶 전체가 하나의 실수로 취급되었고 뒷날의 사람들은 그 얼룩을 지우고 싶어 했다.”
내가 그 시대에 태어났었더라면 나는 어땠을까 자문해본다. 난 혁명가였을까. 머리는 냉철하나 몸은 비겁하여 눈치보기에 급급한 중도주의자였을까. 아니면, 냉철한 머리를 스스로 세뇌시켜 비겁한 몸을 위해 사용한 우파였을까.
그리고 21세기 현재는 과연 달라졌는가 묻는다. 피를 토하며 목숨을 앗아가 내일도 기약할 수 없는 전쟁이라는 참극이 사라졌을 뿐, 여전히 우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일들에서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른다. 여전히 좌우의 논리를 가진 싸움은 지속된다. 어쩌면 최창익이 허정숙에게 말했던 마지막 말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다음과 같다. “이상적인 제도를 감당하기에 우리 인간이 너무 이기적인 존재인지도.” 그렇다. 이기적인 인간의 속성.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기독교의 원죄로 해석되기도 했던 자기애, 교만과도 같은 의미일 것이다. 결코 변하지 않는 인간의 속성. 비록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실패로 돌아갔고, 자본주의가 세상을 장악했지만, 인간의 이기적인 속성은 그대로 머물러 있다. 혁명과 이념은 지나가지만, 인간의 이기심은 남는 것이다.
혐오와 배제가 사라진 세상을 꿈꾼다. 서로 칼끝을 겨누는 좌우의 대립이 아닌, 약육강식과 승자독식 체제가 아닌, 정의롭고 공의로운 세상을 꿈꾼다. 마르크스주의도 해결하지 못했고, 자본주의도 해결하지 못하는 있는 ‘인간’의 문제가 이기심이고, 우리들은 모두 그 이기심이라는 병에 걸린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나’를 넘어서서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사랑을 나누는 행위는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분명 해독제가 될 것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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