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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의인은 ‘충성’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피스티스의 의미 알기.
매튜 W. 베이츠 저, ‘오직 충성으로 받는 구원’을 읽고.
스캇 맥나이트는 그의 저서 ‘예수 왕의 복음’에서 오늘날 ‘구원의 문화’가 ‘복음의 문화’로 둔갑한 현실을 진단 및 폭로하면서 참 복음이 무엇인지를 고린도전서 15장을 중심으로 논증한다. 그에 따르면, 복음은 단순히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 받는지에 관한 체계가 아니다. 복음을 개인적, 실존적, 사적인 죄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만 이해한다면, 복음의 일부를 전부로 착각하는 것과 같다. 복음은 개인 영혼 구원을 넘어서는 더 큰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약성서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이야기이고, 그 이야기가 예수님에 의해서 완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복음은 내가 중심이 되어 어떻게 구원 받는지에 대한 방법 정도로 그치는 게 아니라, 오직 예수, 즉 예수가 왕, 주님이시라는 이야기다.
달라스 윌라드 역시 그의 저서 ‘하나님의 모략’에서 복음이 구원으로 축소되고 구원이 개인적 죄사함으로 축소된 것을 두고 ‘죄 관리의 복음’이라고 표현하면서 오늘날 기독교 문화를 강력하게 비판한다. 그는 저 유명한 ‘바코드 신앙’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내면서, 마치 어떤 제품이 내용이 무엇인지 혹은 어떤 상태인지에 전혀 관계 없이 오로지 바코드에 의해서만 기계적으로 인식되는 것처럼, 기독교인들의 구원도 그저 사영리와 같은 교리에 정신적으로 동의만 하면 얻을 수 있다거나 교회에 등록만 하면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인식된 이 시대의 기이한 풍토를 날카롭게 꼬집는다. ‘바코드 신앙’의 핵심은 죄 용서받기 위해서는 굳이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며, 지적 동의나 일회적 결정만으로 구원으로 가는 천국 열차에 탑승할 티켓을 거머쥘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마치 든든한 보험을 하나 들어놓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것도 공짜로 말이다. 이는 복음을 잘못 이해하여 그 의미를 디트리히 본회퍼가 말한 ‘값싼 구원’의 의미로 추락시킨 결과이며, 이 흐름은 자연스레 칭의와 성화의 단절을 야기한다. 달라스 윌라드는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이 구원에 있어서 그저 추가적인 옵션 정도로 추락하고 만 현대 기독교의 실태를 이렇게 적나라하게 표현하면서 우리들에게 선으로 악을 이기는 등 역설적이고 전복적인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모략’의 동참자가 되라고, 다시 말해 진정한 예수의 제자가 되라고 촉구한다.
제목에서부터 주목을 끌게 만드는 이 책 ‘오직 충성으로 받는 구원’에서 저자 매튜 베이츠는 위에서 언급한 스캇 맥나이트와 달라스 윌라드와 궤를 같이 하면서도 특별히 ‘믿음’이라는 한 가지 개념에 더 주목하고 그 의미를 깊게 파헤치면서 그것이 가진 더욱 온전한 의미를 회복시키려는 시도를 한다. 어쩌면 당돌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저기 저 오른쪽에 치우친 사람들에게는 자칫 불경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주장을 하면서 말이다. 그는 종교개혁의 시작점에 있었던 마틴 루터가 영감을 얻었던 성경구절이자, 사도 바울이 쓴 로마서 1장 17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를 감히 다음처럼 수정한다. “오직 의인은 충성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리고 이렇게 믿음을 충성으로 대체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유익에 대해서 풍부한 근거를 들면서 조목조목 자신의 주장을 펼쳐나간다.
아니나 다를까. 이 책은 스캇 맥나이트가 서문을 장식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매튜 베이츠 역시 복음의 정수는 예수가 어떻게 왕이 되었는지 보여주는 권능 있는 이야기라고 밝힌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 더 덧붙인다. 이 복음에 대한 우리의 유일하고 적절한 반응은 오로지 충성뿐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늘날 이 충성에 대한 명확한 요구는 많은 경우 ‘믿음’이나 ‘신념’이나 ‘은혜’라는, 이미 우리들에게 어떤 획일적인 뉘앙스를 풍기며, 마치 행위와는 단절된 듯한 지적인 동의나 반지성적 사상의 냄새까지 풍기는 단어들로 인해 원래 의미가 제대로 드러나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칭의와 성화를 분리시키고 믿음과 행위를 분리시켜, 마치 그것이 바울을 제대로 해석한 것처럼 여기는 현 실태를 정확히 짚어내면서 ‘믿음’이라고 한국어로 해석되는 헬라어 단어 ‘피스티스 (pistis)’가 가진 원래의 풍부한 의미를 드러내는 데 이 책의 많은 부분이 할애되고 있다.
안타깝게도 믿음과 행위의 단절로 파급된 부작용은 오늘날 복음주의권에서 너무나도 안정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분명히 바울은 믿음의 순종이나 그리스도의 법을 따르라는 말을 했고, 야고보 역시 행위에 대한 중요성을 강력하게 언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많은 교회에서는 행위의 측면을 구원과 연결시키려고 하는 약간의 낌새만 보이기만 하면, 그것이 곧 이신칭의를 거부하는 행위론자로 오인될까 두려워 모두가 듣기 좋은 두리둥실한 말로 은근슬쩍 넘어가는 분위기가 압도적이다. 순수한 신앙인이란 결코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고백해야 한다는 인식이 우리들 사이에서는 암묵적으로 팽배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서문에서 스캇 맥나이트가 지적하다시피, 예수는 “나를 너희 마음에 받아들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지 않고,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너희는 안전하다” 혹은 “너희의 정통신앙을 덧입으라”라고 말씀하지 않고, “네 자신을 부정하고 네 십자가를 지라”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회개하고 내가 말한 것들을 믿으라”라고 말씀하지 않고, “나의 이러한 말을 듣고 이를 행하는 자”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알고 보면, 바울만이 아니라, 복음의 핵심인 예수조차 행위가 배제된 막연한 믿음만을 강조하신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만약 당신이 단지 믿기만 한다면”이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며 “믿는다”라는 말의 의미를 그저 정신적으로 단 한 번만 받아들이면 마치 구원을 획득할 수 있는 것처럼 그동안 분위기를 조장해왔다. ‘값싼 구원’의 상황은 안타깝게도 사실상 지금도 조용히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근본적인 부분에 질문을 던지고 그 해결책으로서 ‘피스티스’의 원래 의미를 우리로 하여금 더욱 풍성하고 정확하게 알길 강하게 권고한다. 피스티스를 믿음이 아닌 충성으로 해석할 때 이전엔 몰랐던 더 의미를 회복할 수 있음은 물론이며, 그동안 암묵적으로 눈치를 보며 이러지도저러지도 못했던 난제들을 해결하는 단초가 될 수도 있다면서 말이다.
물론 저자는 피스티스를 항상 충성이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영원한 구원을 위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묘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거시적 용어가 충성이라는 뜻에 가깝다. 충성은 신뢰 개념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주며, 믿음 및 신념과도 결부되어 있고,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영어 연상의 의미를 피할 수 있게 해주는 최고의 용어라고 주장한다. 이와 동시에 충성은 지적 동의, 절대적 충성, 구체적 충성과 같이 구원을 위해 중요한 의미들을 포함하기도 한다.
저자는 특히 1장에서 믿음에 대한 오해를 쉬운 말로 풀어헤치고 있는데, 저저가 시정하고 있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첫째, 믿음은 흔히들 근본주의자들이나 반지성적인 신앙인들이 오해하듯 증거를 고려한 합리적 판단의 정반대 개념이 아니다. 참된 기독교적 믿음은 신앙주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 믿음은 무모한 행위가 아니다. 참된 믿음은 비합리적으로 허공 속으로 몸을 던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행사하신 주권에 대한 순종의 반응이 될 때 비로소 선한 것이 된다. 셋째, 믿음은 행위의 반대가 아니다. 넷째, 믿음은 모든 게 좋다는 식의 긍정적 사고방식이나 맹목적 낙관주의가 아니다. 다섯째, 믿음은 지적 동의로 결코 환원될 수 없다. 이 다섯 가지는 기독교에 처음 발을 디딘 새신자들에게도 충분히 알려줄 수 있고, 알려야만 하는 사실이라 믿는다.
저자는 계속해서 복음에는 분명히 지적 동의나 일회적 결정 이상의 무언가가 요구되며, 바로 그것이 충성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저자가 이런 주장을 처음 하는 건 아니다. 그는 저명한 신학자인 톰 라이트, 마이클 고먼, 존 바클레이, 리처드 헤이즈 역시 바울의 믿음을 충성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를 대며 자신의 주장에 무게를 가한다. 그리고 구원을 가져오는 충성에는 세 가지 차원이 있다고 정리한다. 첫째, 복음이 진리라는 정신적 확신. 다시 말하자면, 지적 동의다. 피스티스를 충성이라고 해석한다고 해서 지적 동의를 저버리라는 뜻이 아니다. 저자는 우리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선 참 왕이신 예수께 기꺼이 충성을 바칠 수 있는 만큼만 지적으로 확신하면 된다고 말한다. 둘째, 우주의 주님이신 예수께만 고백되는 충성. 즉, 충성의 고백이다. 예수가 주님이시라는 공개 선언 (고백)은 구원의 기초가 된다고 말하는데, 공개 선언은 복음에 대한 지적 동의와 하늘과 땅의 통치자이신 예수께 개인적으로 충성하고자 하는 삶의 욕망, 의지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셋째, 왕이신 예수께 대한 순종을 통해 실천되는 충성. 즉, 구현된 충성이다. 여기서 저자는 복음의 목적이 피스티스의 순종, 곧 실제적인 충성을 유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충성은 완벽하진 않더라도 진정성 있는 순종을 통해 실현되어야만 한다. 구현되지 않는 피스티스는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구원은 육체적 여정이므로 순종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혹시라도 바울의 이신칭의 개념과 자신의 충성 개념이 상충되지는 않을까 하여 저자는 바울의 복음을 더욱 더 깊이 파헤친다. 바울이 단호히 반대하는 것은 성공적인 규칙을 수행하는 것에 의존하는 구원 체계로서의 행위이지, 왕이신 예수께 대해 구현된 피스티스, 즉 충성으로서의 행위가 아니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알다시피 바울은 심판 날에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행위에 따라 그대로 돌려주실 것이라고 이야기했던 장본인이다. 순종은 행위로 이뤄질 수밖에 없으며, 바울이 반대한 행위는 그러한 자발적 순종 혹은 충성의 행위가 아니라 규칙 지향적인 구원 체계의 일부로서 주장되는 행위일 뿐이다. 결국 바울에게 구원이란 왕이신 예수께 대한 충성된 복종 가운데서 구체적인 행위의 실행을 요구하는 것이었고, 바울이 말하는 ‘참된 믿음’ 대 ‘행위’의 대립은 ‘왕이신 예수께 대한 충성으로서 실행된 행위’ 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창조와 별개로 수행된 행위’의 대립으로 더 정확히 설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저자는 충성이라는 단어를 강조할 때 벌어질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해서도 이미 깊게 고려한 듯하다. 충성으로 구원을 받는 거라면 얼마나 충성을 해야 구원을 받기에 합당할까 하는 질문이 자연스레 도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그가 준비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오직 충성으로만 구원을 받지만, 완벽한 충성이라는 것은 이 땅에서의 구원을 위해 요구되는 것이 아니며, 전통적으로 이해되었던 완벽한 믿음 만큼이나 실제로 행해질 수 없다. 완벽한 충성이라는 것은 요구되지도 않고 실현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불완전하게 유지하고 있는 충성에 의해 왕이신 예수와 연합될 때,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 또한, 저자는 충분한 충성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 엄밀한 규칙을 정량화하거나 개발하려는 것은 복음에 반하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충성은 정량화되거나 일일이 나열될 수 없다. 따라서 얼마나 많은 충성이 필요한지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충성이 필요한지 묻는 편이 낫다. 다시 말해, 불완전하다 하더라도 진정성 있는 충성이면 된다는 말이다.
충성이라는 단어는 곧 제자도와 직결된다. 저자는 현대 기독교 문화가 개인적 구원과 제자도를 분리하는 경향이 있음을 파악하며, 이에 대한 대안으로써 이 책을 통해 충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충성은 개인적 구원과 제자도가 만나는 지점이며, 둘은 그저 만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포용한다. 그러면서 제자가 되는 것과 구원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범주라고 주장한다. 복음은 총체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피스티스에 왕이신 예수께 대한 적극적 충성이 포함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복음을 지나치게 영적으로 몰아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저자는 많은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전도 프로그램이 정확하고 설득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단순한 용서로의 초청이 아닌 완전한 제자도로의 초청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확하고 설득력이 있는 제자 양성 프로그램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제자도가 구원에 대한 실천적 충성의 필수 요소임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구원의 여정을 시작하라는 초청은 제자도로의 초청과 같기 때문이며, 제자로 사는 것만이 최종 구원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도신경을 우리에게 충성을 요구하는 복음에 대한 축약적 제시라면서 교회에서도 사도신경을 잘 활용하여 충성의 맹세로 간주하게 하면 좋을 거라고 제안하기도 한다.
기독교에 몸은 담은 지 30년이 넘었다. 이젠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나의 정체성으로 부끄러움 없이 받아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보수적인 한국 교회의 풍토에 푹 젖어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 역시 어른이 되고 나서도 이신칭의의 온전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행위를 믿음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여기며 악마화시켰던 적도 있으며, 믿는다는 것의 의미를 반지성적으로 해석하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과거이지만, 그 당시엔 그렇게 하는 것이 바른 신앙인 줄 알았다. 그러한 풍토는 지금도 어딘가에선 주도적인 입지를 유지하며 많은 사람들의 눈과 귀와 사상과 마음을 장악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무너진다. 그리고 아마도 이 글을 읽는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은 나와 비슷한 과정을 거쳤거나 거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책을 통해, 그리고 이 간단한 감상문을 통해 우리가 흔히 아는 믿음의 협소한 의미에서 벗어나, 저자가 제안하는 피스티스의 온전한 의미를 충성이라는 해석을 통해 더욱 알게 되길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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