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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을 감수하는 환대의 공공신학으로.

최경환 저, ‘공공신학으로 가는 길’을 읽고.

시대에 따라 정도가 달랐을 뿐 종교 (특히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과 공적 역할에 대한 논의는 언제나 존재했다. 종교는 항상 정치, 경제, 사회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려고 노력하면서도 암묵적으로는 그것들과 가장 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도 했다. 이는 안타깝게도 기독교에서도 유효했다. 정경유착 이면에 일부 보수 기독교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마 흔치는 않을 것이다. 과거 부흥의 상징이었던 대형교회는 언젠가부터 대기업이라는 이미지를 입었다. 그로 인해 압도적으로 많은 인원을 자랑하는 보수 기독교인들을 무기로 하여 정치 선거에서 힘을 마음껏 과시하는 것도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겉으로 드러난 정치, 경제, 사회의 부패, 타락의 흐름 저변에 흐르는 최종 심급은 자본이다. 자본은 힘의 상징이자 힘 그 자체가 되어 부익부 빈익빈으로 가시화되는 불평등을 가속화시키고 있으며, 그에 따라 민주사회의 가장 기본 가치이자 기독교가 지향하는 가치와도 일치하는 ‘다양성’과 ‘평등’은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다. 거대한 운동장을 기울게 만드는 이러한 뒤틀린 힘의 한 축을 일부 보수 기독교가 담당하고 있음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오늘날의 슬픈 현실이다.

기독교의 잊힌 본질 중 하나는 ‘환대’다. 과부와 고아와 가난한 이들, 고통받고 차별받고 소외되고 억눌려 신음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는 이들, 오늘날 사회적 약자라고 불리는 이들의 목소리를 가장 먼저 들어주고, 그들의 곁을 가장 먼저 지켜주고,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그들을 환대하여 동등한 사회적 성원권을 회복시켜줌과 동시에 가장 교회답고 가장 기독교 다운 예수의 정신을 구현하는 신학. 이것이 바로 내가 이 책을 통해 이해하고 바라마지 않는 공공신학이자 그것의 정신과 방향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가장 쉽게 말하면, 공공신학은 공적 삶 속에서 교회의 위치와 사회적 형식 그리고 사회 속에서 교회의 역할을 주로 다루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공공신학은 태생 자체가 성서라는 텍스트가 아닌 일상과 현실이라는 콘텍스트다. 그래서 조직신학이나 성서신학과는 달리 시대가 요청하는 질문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공공신학의 정체성과 방법론은 아직 제대로 확립되지 않고 여전히 토론 중에 형성되어가고 있으며, 그로 인한 혼돈과 오해도 많은 게 현실이다. 공공신학은 해방신학과 정치신학과 궤를 같이 하면서도 그 맥락이 다른 신학이며, 그것들보다 더 다양하고 넓은 의미를 가진다.

이 책은 생겨난 지 100 년도 채 되지 않은 공공신학의 큰 지형도를 그려주는 안내서이자 공공신학의 내용과 기원을 간략하지만 충실히 소개하는 길잡이다. ‘공공성’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의 보편적 의미로 환원될 수 없고, 다양한 상황 속에서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조직신학이나 성서신학의 개론서를 읽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맛을 낸다. 그러나 이 책 한 권만 읽게 되면 적어도 공공신학이 어떻게 생겨났으며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에 대한 대략적인 윤곽을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총 8장으로 구성된 이 책의 첫 장은 서론 역할로써 공공신학의 현황과 의의에 대한 요약이다. 본론에서 저자 최경환이 중심축으로 삼고 있는 것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공공 신학자 더키 스미트가 제시한 공공신학의 기원에 대한 여섯 가지 이야기다. 이 짧은 감상문에서 다루지 않겠지만, 2장부터 7장까지의 여섯 장은 더키 스미트의 여섯 가지 이야기에 대한 해제라고 볼 수 있다. 스미트가 제시한 기본 틀에 이론적인 설명과 역사적인 사례를 덧붙여 더 구체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공공신학을 보여주면서 저자는 제목에서 나타난 ‘공공신학으로 가는 길’을 여섯 가지로 제시한다. 여러 명의 공공 신학자들뿐 아니라 복음의 공공성과 사회 참여 등을 벌써 이야기했던 여러 신학자과 철학자들의 이론을 두루 섭렵한 저자의 스토리텔링은 아직 뿌리가 확실히 내리지 않은 공공신학의 무게를 더해주는 역할을 한다. 저자의 통찰은 교회와 세상의 잘못된 이분법의 올가미, 그리고 공공신학은 이론이나 사상이기에 앞서 실천이고 윤리이기에 실제 현실과 연결함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는 보편성과 특수성의 문제, 그로부터 파생하는 교회다움 혹은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고찰에까지 이른다.

마지막 장인 8장에선 저자의 공공신학에 대한 바람과 미래 연구 과제의 청사진을 엿볼 수 있다. 첫 장에서 제기했던 질문, “누구를 위한, 어떤 공공신학인가?”에 대한 자신의 답을 ‘환대의 공공신학’이라고 대답하면서 말이다. 그는 낸시 프레이저의 정의론의 논의를 출발점으로 삼아 공공신학이 추구해야 할 방법론으로 번역과 대화를 넘어서 타자를 포용하고 끌어안는 환대여야 함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 책의 마지막 단락은 저자의 한이 담긴 부분이기에 그대로 옮겨 보면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나 역시 저자의 바람에 함께 하기 때문이다.

“공공신학의 중요한 역할과 과제는 다름 아닌 목소리를 빼앗긴 이들의 목소리를 복원시켜 주고 이들을 위한 자리와 공간을 마련해주는 것이 아닐까? 희생자들과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공적인 자리를 만들어주고 이들의 목소리를 경청해주는 것, 그리고 희생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과 함께 울어주는 것, 이런 작은 행동과 몸짓이 시대의 요청에 응답하는 공공신학의 과제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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