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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논리를 두려워하지 않는 합리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움베르토 에코 저, ‘장미의 이름’을 읽고.

평범한 추리소설의 경계를 가뿐히 허물어버리는 듯한 이 범상치 않은 작품은 역사는 물론 기호학, 과학, 철학, 신학까지 모두 한상에 올려 성찬을 베푼다. 탄탄한 플롯은 스릴감 넘치는 전개와 더불어 독자를 단숨에 사로잡는다. 약 900 페이지에 달하는 장편소설을 읽으면서 어쩔 수 없이 소비되는 물리적 시간마저도 책을 다 읽고 나면 어느새 꿈만 같은 추억으로, 그래서 다시 꾸고 싶은 꿈처럼 기억되는 작품이다. 소장 가치, 재독 가치가 충분하다. 단, 중세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만약 다시 읽게 될 경우, 당대 주요 철학과 신학의 흐름을 미리 간단하게라도 공부해 놓거나, 이 책에 대한 해제가 담긴 ‘장미의 이름 작가노트’, 혹은 ‘장미의 이름 읽기’와 병행한다면, 보다 깊은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이미 마니아 층이 형성된 이 작품을 읽은 전 세계 수많은 독자들 중 상당수는 아마도 벌써 이런 비슷한 과정을 밟지 않았을까 싶다.

기본적으로 이 작품은 액자 형식을 따른다. 서문에 등장하는 ‘나’라는 화자는 1968년 8월 16일, 한 권의 책을 손에 넣게 되고 이탈리아어로 번역한다. 1842년 라 수르스 수도원장 ‘발레’가 프랑스어로 번역 및 펴낸 책이었다. 발레가 번역한 책도 원본은 아니었다. 18세기 석학 ‘마비용’ 수도사가 편집한 사본이었다. 원본은 시대를 더 거슬러 올라가, 14세기 베네딕트 수도회 소속 멜크 수도원 출신의 수도사 ‘아드소’의 수기이다. 아드소가 백발의 노인이 된 뒤, 수십 년 전 당시 자신이 작성했던 노트와 기억에 의지하여 라틴어로 양피지 위에 작성한 사건의 기록이다. 다소 혼란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고 (사실 나는 이 부분에서 길을 잃고 2년 전 읽기를 관둔 적도 있다) 본론을 이해하는 데에 그다지 큰 영향을 안 준다고 볼 수 있는, 이러한 두 번의 번역 과정과 ‘나’의 손에 우연히 들어오게 된 배경을 굳이 설명하면서 저자가 이 작품의 문을 여는 까닭은, 아마도 6세기가 지난 20세기 현재, 라틴어로 쓰였던 원본 ‘아드소의 수기’에 대한 역사성 및 사실성, 그리고 희귀성과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은 저자의 의도가 반영된 탓일 것이다. 

작품의 액자 역할을 하는 서문을 통과하면, 본격적으로 아드소 수도사의 수기가 펼쳐지는데, 이는 1327년 11월 말, 정확히 7일 동안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어느 수도원 (아드소는 의도적으로 이 수도원의 위치와 이름을 함구한다. 그래서 이는 ‘서문’에서 ‘나’라는 화자가 수기를 통해 추측한 것이다)에서 아드소가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한 일을 베네딕트 수도회의 성무 공과 시간에 따라 시간 순으로 기록한 회고담이다. 즉 아드소는 모든 사건의 직접 관찰자였고 증인이었으며, 그 충격적인 내막과 엄청난 결론까지도 세밀하게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리고 수십 년의 세월을 보내고 이성과 감성이 충분히 숙성되고 난 이후에도 여전히 강렬하게 남아있는 기억을 쏟아내며 이 수기를 작성한 것이다. 그는 수기 마지막에 나로선 의미를 좀처럼 파악할 수 없는 고백을 다음과 같이 남긴다.

“나는 이제 이 원고를 남기지만, 누구를 위해서 남기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무엇을 쓰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이렇듯 제목 ‘장미의 이름’은 작품 마지막 문장에서 탄생했다. 소설을 한 번 읽은 나로선 (아마 두 번 읽어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작품 속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다가 마지막 문장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장미’의 의미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여러 상상이 가능하겠지만, 장미라는 단어에 주목하지 않고 문장 전체의 의미를 짐작해 볼 때, 아마도 ‘세월이 흐르면서 장미의 붉은빛과 향이 사라지듯 지난날 기억은 그것이 아무리 강렬했다 할지라도 오감을 통과하는 생생함을 잃기 마련이고, 결국 우리에게 남는 것은 덧없는 이름뿐이듯 우리들의 기억도 그것이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 (이를테면 정체성 같은)만이 남을 뿐이다’라는 뜻이 아닐까, 하고 나는 얕은 추측을 해볼 뿐이다. 

수기의 주인공은 물론 아드소이다. 그러나 7일 간 일어났던 엄청난 사건의 해결을 위해 아드소를 조수 (필사 서기 겸 시자)로 부리면서 스토리를 이끌고 나가는 인물은 프렌체스코 수도회의 박식한 수도사, 배스커빌 사람 ‘윌리엄’이다. 윌리엄과 아드소 수도사의 관계는 아서 코난 도일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셜록 홈즈’와 ‘존 왓슨’, 혹은 애거서 크리스티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에르퀼 푸아로’와 ‘아서 헤이스팅스’ 정도로 이해하면 될듯하다. 세 작품 모두 전자는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으로, 후자는 전자를 보조하며 모든 사건을 기록하는 화자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저자 움베르토 에코가 그의 첫 추리소설인 이 작품에서 이러한 인물 구도를 가져온 것은 아주 적절했고 효과적이었던 것 같다. 이런 구도는 자칫 ‘슈퍼맨 이야기’로 흐를 수 있는 위험으로부터 작품을 보호할 수 있으며, 스토리 전개와 작품 전체의 객관성을 좀 더 확보할 수 있다는 이점을 가지기 때문이다. 특히 역사성이 중요하게 부각되는 이 작품의 특성상, 나는 이 방법을 선택한 저자가 아주 현명했다고 생각한다. 

7일 동안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연쇄 살인이다. 윌리엄 수도사는 아드소와 함께 4명의 수도사가 시체로 발견된 이후에 비로소 사건 진상의 결정적인 단서 (즉 장서관의 미궁 속 숨겨진 방을 찾는 단서)를 찾아내고 범인을 마주한다. 신학에도 철학에도 능통한 윌리엄 수도사는 자연과학에도 탁월한 지식을 갖고 있다. 시대가 14세기 초인만큼 자연과학은 기독교를 대적하는 악마의 발명품이나 장난감으로 오인되던 시기였는데도 불구하고 윌리엄 수도사는 시대를 앞서간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돋보기안경을 가지고 원시를 극복하는 장면, 자성을 가진 돌을 이용해 나침반을 고안하는 장면, 거울의 착시를 알아채는 장면, 약초의 독성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모습 등 윌리엄 수도사는 당대 수도사들과는 달리 자연과학을 이단시하지 않고 친구로서, 그리고 진리를 발견하는 도구로써 여기고 사용할 줄 아는 인물로 묘사된다. 이러한 사실은 윌리엄 수도사로 하여금 여러 무속적이고 이교도적인 잘못된 기독교 신앙과 확신에 빠지지 않고 이성과 논리를 이용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관점으로 사건을 해결해 나가도록 도와주는 배경이 된다. 아마도 저자는 이러한 장면들을 통해 기독교 신앙이 가지고 있던 여러 미신적이고 반지성적인 믿음을 꼬집고 풍자하고 싶었을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윌리엄 수도사는 과거에 이단 조사관으로 일했던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진해서 그만두었다. 그 이유가 기막힌데, 다음과 같다. 작품 속에서 여러 번 다른 표현으로 등장하지만 여기선 122페이지에 나온 짧은 문장을 인용한다. 

“조사관 시절에 나를 괴롭혀 온 문제가 바로 이것이었어요. 그래서 조사관 노릇을 그만두고 만 것이랍니다. 내게는 사악한 자들의 약점을 조사해낼 용기가 없었던 거예요. 알고 보니 사악한 자들의 약점은 도덕 높은 분들의 약점과 같더란 말입니다.” 

이것만 봐도 윌리엄 수도사가 어떤 인물인지는 대충 감이 올 것이다. 그는 기독교 고위 성직자와 그들이 이단으로 규정하고 살인까지도 허용하는 인물들, 즉 양극단에 위치한 사람들의 공통점을 간파할 정도로 그 당시 썩어버린 기독교 내의 정치와 이권 다툼 등의 타락을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식의 언변은 작품이 진행되면서 종종 등장하게 되는데, 근본주의에 천착하지 않은 기독교인 독자라면 아마도 나처럼 이 작품을 읽으면서 여러 번 윌리엄 수도사의 대사로 인해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을 느꼈을 것 같다. 가령 다음과 같다. 내가 밑줄을 긋지 않을 수 없었던 부분이다. 

“악마라고 하는 것은 물질로 되어 있는 권능이 아니야. 악마라고 하는 것은 영혼의 교만, 미소를 모르는 신앙, 의혹의 여지가 없다고 믿는 진리… 이런 게 바로 악마야!”

“가짜 그리스도는 유대 족속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먼 이방 족속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잘 들어 두어라.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느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성자 중에서 이단자가 나오고 선견자 중에서 신들린 무당이 나오듯이… 아드소, 선지자를 두렵게 여겨라.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XXX (스포일 하지 않기 위해 이름 숨김)가 능히 악마의 대리자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저 나름의 진리를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허위로 여겨지는 것과 몸 바쳐 싸울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안에 내재하고 있는 이러한 오래된 문제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부분적으로 존속하고 있다. 이는 저자가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강력한 숨은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이성과 논리를 두려워하지 않는 합리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아, 기가 막히지 않은가. 한낱 심심풀이로 읽을 수 있는 이런 추리소설 같은 픽션에서 여러 신학/신앙 서적에서 느끼지 못하던 깨달음을 얻게 되다니! 기독교 신앙의 유무를 떠나 나는 이 작품을 모든 사람에게 일독을 권한다. 재미와 교훈, 통쾌함과 깊은 성찰에 이르기까지 일석이조의 효과를 수차례 경험하게 될 것이다.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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