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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기억과 집착이 만든 섬.

모니카 마론 저, ‘슬픈 짐승’을 읽고.

아무도 가 보지 않은 길. 낮은 곳에서 용기 내어 나선 길. 그 길 위에서 좋은 길잡이를 만난다는 건 반가운 축복이 아닐 수 없었다. 인생의 후반전에 들어설 즈음, 마치 사춘기를 다시 시작하듯 발걸음을 뗀 독서 여정에서 나에게 신형철은 그런 존재가 되어 주었다. 약 2년에 걸쳐 그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추천한 작품 중 열 권을 읽어 오면서 어느새 내 안에선 조용히 그에 대한 신뢰가 생겨 버렸고, 급기야 나는 책 뒤에 부록으로 붙어 있는 추천도서 이외에도 그가 각 꼭지에서 다룬 작품 중 마음에 와 닿았던 것부터 하나씩 기회가 되는 대로 읽어나가고 있다.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도 그 새로운 여정에서 만난 작품 중 하나다. 아마도 신형철이라는 길잡이를 못 만났다면 평생 내 손에 들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신형철은 1부 ‘그녀, 슬픔의 식민지’라는 꼭지에서 이 작품을 다루었다.

이 작품은 자기 나이도 잘 기억하지 못할 만큼 처절하게 섬이 되어버린 한 여자의 이야기다. 기억을 하지 못한다는 건 단순히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거나 기억상실에 걸렸기 때문이 아니다. 같은 기억도 무한히 반복해서 되새기면 변형이 되는 법. 확실한 것은 점점 사라지고, 무엇이 사실인지 무엇이 거짓인지, 혹은 무엇이 실제 일어났던 일인지 무엇이 일어나길 바랐던 것인지 시간이 갈수록 묘연해지게 되는 것이다. 기억이 집착을 만나면 환영이 되는 이유도 아마 이런 기작이 있기 때문이리라.

그녀는 과거에 경험했던 불꽃같던 사랑을 조금씩 기억해낸다. 부정확하고 불연속적인 기억들. 그리고 그 기억들을 가득 메우고 있는 그녀의 독백들. 기억의 파편 하나하나에는 슬픔이 진득하게 배어있고, 그 슬픔은 서서히 그녀를 점령해버리고 말았다. 수십 년 전 이야기 속에 집을 짓고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살아가는 그녀. 집착이라는 소름 돋는 단어를 사용해도 무방할 만큼 그녀는 오늘도 프란츠와의 기억 속에서 살아간다. 

그녀의 이야기가 처절한 슬픔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프란츠도 그녀도 각각 가정을 가진 상태에서 만나는 은밀한 관계였기 때문이고, 보다 거시적인 이유는 그들의 만남과 헤어짐이 모두 ‘기이한 시대’를 거치며 일어났기 때문이다. 동독과 서독으로 나눠진 독일. 작가 모니카 마론은 동독의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성장했고 전업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며 다시 통일된 독일. 그녀는 한때 서독으로 이주해 있다가 통일이 된 이후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와 작가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시대가 작가를 통과하면 작품이 되는 법. 그 ‘기이한 시대’를 모두 통과한 모니카 마론은 한 평범한 서독 출신의 남자와 한 평범한 동독 출신의 여자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며 그 기이한 시대가 남긴 흔적과 상처를 평범한 사랑과 집착, 불안과 기다림, 그리고 슬픔이라는 단어로 응축해낸다. 마치 거대한 역사가 결국 스며드는 곳도 바로 우리네 평범한 일상임을 증명해 보이려는 듯, 작가는 소설 속의 ‘나’를 기이하지만 평범한, 그러나 처절한 슬픔 속에 잠기게 한다. 섬이 되게 한다. 신형철은 이를 ‘식민지’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사람이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오직 사랑뿐’이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이 말은 소설 속 ‘나’가 프란츠를 만나고 그녀 안에 꿈틀거리던 사랑을 해방시킨 말이기도 하다. 그녀가 프란츠를 선택한 게 아니었다. 그녀 안에 있던 사랑이 결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랑이 행동하기 시작한 시기가 바로 ‘기이한 시대’가 끝나던 무렵이었다. 분단으로 인한 상처가 사랑을 죄수로 만들었고, 통일이 그 종신형 죄수로 하여금 감옥을 부수고 나오게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그 해방으로 인해 만난 사랑도 결국엔 헤어짐으로 끝나고, 그녀에게 남은 건 오로지 슬픔뿐이었다. 그녀는 책의 마지막에서 프란츠와 함께 누워있곤 했던 침대에 크고 작은 짐승들과 함께 눕는다. 그녀의 슬픔은 환영까지 불러온 것이다.

읽고 나면 어떤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 비록 강하진 않지만 오래 남는 작품이다. 저자의 글쓰기에서 나는 저자가 처한 시대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고, 그녀가 느꼈던 감정들을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나를 통과하면서 과연 어떤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하고 책을 덮으며 조용히 생각하게 된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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