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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실격은 없다.
다자이 오사무 저, ‘인간 실격’을 읽고.
세상을 탓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들을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그 자체가 비극이다. 그러나 그 비극적인 결말을 자살한 개인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다. 그것은 죽은 자에 대한 폭력이다. 두 번 죽이는 일이다. 우리 중에는 실제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더라도 그와 비슷한 심정으로 남모르는 마음고생을 경험한 사람들이 많은 줄 안다. 이성과 논리가 힘을 잃어버리는 영역에서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벌어지는 일이지만, 자살 충동의 유경험자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탓하며 욕지거리를 해대는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공격하는 대상은 세상이나 남들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 말이다. 세상 혐오는 결국 자기혐오로 이어진다. 어쩌면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들에게 자살은 자기혐오의 끝에 위치한 출구였을지도 모른다. 우리 주위에 누군가가 세상을 탓하며 술 한 잔 기울이고 있다면, 우린 차라리 안심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직 늦지 않았기 때문이다. 탓하는 대상이 서서히 자기 자신으로 바뀌고, 또 그 방향이 마치 유일한 길처럼 여겨진다면, 그땐 이미 늦은 것일지도 모른다. 파멸은 이미 도래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그 파멸이 자살이라는 가시적인 비극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비통한 마음으로 책을 마쳤다. 잠시지만, 살아있다는 것 자체에 대한 일종의 죄책감도 느꼈고, 그렇게 큰 고뇌 없이 명랑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대해 나 자신이 조금은 혐오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마지막에 생사가 묘연해진 주인공 요조의 삶, 그리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이 책의 저자 다자이 오사무의 삶 앞에서 모처럼 나는 살아남은 자의 숙명적인 슬픔을 느낀다. 마치 무덤에 서 있는 기분이다. 입에선 쓴 내가 나는 것 같다.
주인공 요조는 저자 다자이 오사무의 분신이다. 동일하지는 않지만, 단순히 상상만으로 썼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구체적이고 생생한 심리 묘사가 곳곳에 등장해서 요조와 다자이 오사무는 겹치는 부분이 의외로 많을 것 같다. 자살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그저 주워듣고 상상만 해본 사람과 실제로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행에도 옮겨본 사람 간의 차이랄까. 이 짧은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자살 직전 혹은 이미 자살한 자의 일기를 읽는 듯한 기분이 들어 한기마저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책 뒤에 있는 짧은 해설을 읽다가 작가가 젊은 나이에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내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쳤다.
누군가는 이 책을 ‘인생의 책’이라고 추천하기도 했고, 민음사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는 작품인 데다가, 마침 알라딘 중고책으로 구매가 가능해서 얼마 전 다른 책들과 함께 이 책을 구입했다. 제목에서부터 밝고 긍정적인 이야기를 기대하기 힘들겠다는 확신을 가졌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음산함, 자기혐오, 파멸이라는 단어들의 의미를 이렇게 제대로 살려낸 소설은 처음이었다. 자살 이야기가 유독 많이 나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나 시바타 쇼의 ‘그래도 우리의 나날’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그 스산함이 아직도 잔상으로 남아 있다.
일본 소설 특유의 느낌이 묻어 나는 작품이었지만, 섬이 된 한 인간의 심리 묘사에 있어서 나는 마치 도스토예프스키를 읽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아니, 도스토예프스키 작품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는 것 같았다. 그것도 일본식으로 말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은 그 내용이 아무리 처절해도 궁극적으로는 대부분 구원을 빛을 비추는 데 반하여, 이 작품에선 구원과 같은 반전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저 세상과 인간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 한 인간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서서히 술, 담배, 창녀, 마약의 힘에 눌려 파멸해 가는 이야기를 무덤덤하게 보여줄 뿐이다. 마지막에 자살로 마무리를 지을 것 같았는데 저자는 내 예상과는 달리 주인공 요조의 운명을 그렇게 처리하지 않았다. 이게 어쩌면 단 한 가지 요조에 대한 저자의 배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저자 자신이 요조를 대신해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니, 어쩌면 이 작품의 진짜 마무리는 저자의 삶 자체로 보여준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렇게 적고 보니 섬뜩하다.
주인공 요조는 사람이란 존재에 대해서 누구보다 예민했던 것 같다. 사람을 생각할 때면 불안과 공포에 짓눌렸다. 이웃과 거의 대화도 못 나누고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그렇게 살 수만은 없었기 때문에 그는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 내고는 스스로 만족한 채 실행에 옮긴다.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인간을 단념할 수 없었던 그가 인간과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바로 ‘익살’이었다. 겉으로는 늘 웃는 얼굴을 하지만 속으로는 전혀 그렇지가 않은, 생각해 보면 섬뜩하기만 한 이율배반성이 긴장 가운데 극도로 표출된 사람이 바로 요조였던 것이다. 서글프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 흔히 타락이라는 단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는 습관에 길들여진다. 술과 담배와 여자, 그리고 나중엔 마약까지 손을 뻗친다. 그런데 요조가 이런 것들을 손댄 이유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는 그것들이 인간에 대한 공포를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상당히 괜찮은 수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상과 사람을 두려워하면서도 그 안에 속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모순된 본능이 요조 안에서도 꿈틀대고 있었고, 그것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그가 선택한 방법이 하필 타락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요조의 삶과 그가 토로하는 의식의 흐름을 쫓아가다 보면 타락이라는 것의 의미를 다시 한번 묻게 된다. 특히 그가 백치 아니면 미치광이 같은 창녀들한테서 마리아의 후광을 실제로 본 적도 있다는 표현 앞에선 더욱 그랬다. 경험해 본 적은 없지만 왠지 공감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비난의 화살을 요조가 아닌 세상으로 어느 정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왜 요조가 이렇게까지 됐을까, 하는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자꾸만 들었다.
요조는 합법적인 일이 아닌 비합법적인 일을 할 때 마음이 편했다고 한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양지가 아닌 음지의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마르크스주의에 잠시 빠져 지낸 것도 공산당 사상이 맘에 들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비합법적인 분위기가 맘에 들었기 때문이다. ‘익살’이라는 어설프고 서글프기까지 한 방법으로 세상과 사람과 연결되고자 했던 요조가 점점 더 섬이 되어 가면서 어두운 곳으로 은닉해서 위선과 음산함을 즐기게 되고 그 안에서 나름 편안함을 느끼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요조는 자살을 떠올리게 된다. 자조와 자기혐오에 이어 결국 파멸의 끝에 다다른 것이었다. 스스로 자신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사람, 즉 인간으로서 실격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소설 중간중간에 요조가 바라보는 세상과 사람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이 등장하는데 나는 그 문장들을 읽으면서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세상 사람들의 불가사의한 허영과 체면 차리기를 꼬집는 요조, 어느 정도 가식과 위선이 일상이 되어야만 ‘원활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눈치챈 요조, 그것들이 흔히 처세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요조. 어쩌면 요조는 가장 순수한 인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그의 파멸은 그가 세상이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순수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나는 이 책을 덮으면서 자연스레 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눈을 들어 내 주위를 살펴본다. 의도적 익살로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고 있는 사람이 없는지, 음산한 속내를 감추고 명랑함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사람이 없는지, 세상 탓에서 자기 탓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자살 직전의 징후를 보이고 있는 사람이 없는지. 모든 인간이 스스로가 평등한 인간임을 인지하고, 서로가 서로의 개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며, 처세술이라는 명목으로 가식과 위선으로 도배된 인간관계가 아닌 솔직함과 진정성이 투명하게 드러나서 모든 약자들도 마음 놓고 자신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그리고 인간에게 실격이란 없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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