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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 통속과 심오의 혼종, 돈의 위력.
석영중 저,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를 읽고.
2년 넘게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어오면서 나에게 각인이 될 만큼 강한 흔적을 남긴 그의 인상은 무엇보다 인간 본성의 심연을 파헤친 심오한 심리학자의 이미지다. 선과 악이 공존하고 성과 속이 함께 하는 인간의 이율배반성은 그의 모든 작품 안에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중심 주제와 맞닿아 있다. 어쩌면 너무나 천박해서 감히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인간의 바닥 심성까지 있는 그대로 표현된 그의 작품을 읽노라면, 독자들은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차원을 훌쩍 넘어 어느새 자신 안에도 동일하게 내재된 이율배반적인 본성을 인지하고는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된다. 톨스토이 역시 인간 본성을 깊이 들여다본 혜안을 가진 거장이었지만, 그가 탁월한 교훈을 던져주는 훌륭한 설교자였다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사실적인 여러 등장인물들의 말, 사상, 삶의 민낯을 조명함으로써 인간 본성의 다채로운 심연을 누구보다도 적나라하게 드러낸 르포트타주 기자이자 그렇게 눈에 보이는 처절한 현상들 이면에 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연결시킨 심리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그의 작품에는 우리가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싶을 정도로 지독한 현실성이 진득하게 배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본 도스토예프스키의 천재성이고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이유다.
도스토예프스키 작품 중 몇 편을 직접 번역하기도 한 석영중은 노어노문학과 교수로서 지금도 대학에서 학생들과 함께 러시아 문학을 읽고 그들을 가르친다. 이 책에서도 저자의 오랜 기간에 걸친 깊은 연구와 풍부한 경험이 맛깔나게 잘 어우러져있다. 문어체보다는 구어체 위주로 되어있기 때문에 읽다 보면 마치 직접 강의를 듣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다. 저자의 강의 몇 개를 이미 유튜브를 통해 들은 적이 있는 나로서는 저자의 목소리로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유튜브 강의 도중 평소 내가 전혀 사용하지 않는 “좌우지간”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해서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책에서도 그 단어가 자주 등장해서 현장감이 더욱 잘 느껴졌다.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지만, 저자가 왠지 친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3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었지만, 아주 재미있게 이 책을 금방 다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작년 말 한국에 잠시 방문했을 때 대전 시청 근처에 위치한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기쁜 마음으로 구매했었다. 보관함에 늘 저장되어 있던 책이었는데, 실물을 서점에서 영접했고, ‘달러’가 아닌 ‘원’으로 구매한 나의 첫 중고책이 되었다. 알라딘 엘에이 지점과 비교해서 비교도 안 될 만큼 커다란 매장 규모는 아직도 내 뇌리에서 잊히지가 않는다. 지금도 떠올리면 가슴이 뛴다. 사정상 두 시간 정도밖에 머물지 못했지만, 시간만 있었다면 아마 나는 하루 종일 점심까지 기꺼이 거르면서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미국 거주자로서 가장 그리운 한국 생활 중 하나가 나에겐 바로 서점이다.
이 책은 ‘가난한 사람들’, ‘미성년’, ‘도박꾼 (노름꾼)’,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이렇게 일곱 작품을 다룬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돈’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도스토예프스키의 생애와 그의 작품 세계를 해부하고 이해하는 작업이 행해진다. 이 책은 도스토예프스키 작품만을 감상하던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텍스트 이면에 존재했지만 내가 몰랐던 콘텍스트를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어서 아주 유익했던 책으로 기억이 될 듯하다. 작품이 아닌 저자를 이해하는 건 또 다른 영역의 일인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문학을 전공한 분들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며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앞서 언급했지만, 내게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 본성을 가장 깊고 예리하게 작품 속에 담아낸 작가이다. 너무 심오해서 감히 함부로 표현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의 아우라를 가진 작가인 것이다. 그러나 저자 석영중은 ‘돈’이라는 키워드로 대표적인 일곱 작품을 통해 도스토예프스키의 삶을 조명하고 해석해낸다. 돈?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와 그리 다르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다. 돈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고상한 이미지보다는 속물적인 이미지가 떠오르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이런 속물적인 이미지와 내게 각인된 심오한 심리학자의 이미지가 동일인물을 가리키고 있었으니! 이 부분에 대해서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표현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위대함은 이토록 통속적인 소재로부터 세기를 뛰어넘는 철학과 사상과 예술을 빚어냈다는 것에 기인할 것이다. 아니, 그건 돈이라는 소재 자체가 가장 통속적인 동시에 가장 철학적일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8페이지에서 발췌)
뿐만 아니다. 저자는 ‘백치’를 다루는 6부에서도 해학이 묻어나는 통쾌한 문장을 적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정말 맞다 싶었다. 통속과 심오의 혼종! 이를 가능케 만든 돈! 탁월한 분석, 해석,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소설은 독특하다. 가장 통속적인 이야기들이 가장 심오한 주제와 어우러져 오늘날까지 독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것이다. 통속적이고 멜로드라마적인 특성 덕분에 그의 소설은 시공을 초월한다. 그러니 돈의 부족이야말로 이 놀라운 혼종의 예술품을 탄생시킨 장본인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235페이지에서 발췌)
이 책을 읽기 전에도 나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생계형 작가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평생 돈에 쫓기며 살았다. 단 한 번도 돈에 구애받지 않고 작품을 써본 적이 없다. 언제나 작품 가치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돈을 선불로 받고 그 선불의 노예가 되어 작품을 써내야 했던 작가였다. 거기에다 두 번째 아내를 만나기 전까지는 도박에 중독되기도 했었다. 그래서 나는 도스토예프스키를 단순히 돈과는 인연이 없었던 작가 혹은 불운의 사나이 정도로 조금은 측은한 심정을 가지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저자의 연구에 따르면, 도스토예프스키가 원고료와 인세로 받았던 돈의 액수는 요즈음 초대형 베스트셀러 작가가 버는 돈과 거의 맞먹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돈에 항상 쪼들렸던 이유는 전적인 그의 소비 습관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책임져야 했던 가족과 친지들에게 나간 비용, 무분별하게 지출되었던 자선 비용, 남들에게 베풀었던 과도한 선물 비용, 게다가 도박 비용까지… 알고 보니 도스토예프스키의 수입은 충분했지만, 지출에 대한 철학이랄까 규칙이랄까 하는 것들이 체계적으로 잡혀있지 않아 늘 돈이 부족했던 것이었다. 다행히 두 번째 아내 안나를 만나고 나서 난잡하던 지출이 정리가 되었고 비로소 경제적 여유를 누릴 수 있었지만, 그는 얼마 안 되어 생을 마감하고 만다. 결국 도스토예프스키는 거의 평생 돈에 쫓기며 살다 간 작가였던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는 도스토예프스키를 마냥 비판, 비난만 하지는 않는다.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두둔하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저자에 따르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처해서 형편이 어려운 친지들을 경제적으로 도왔다고 한다. 길거리에서 돈을 달라고 구걸하는 사람들을 절대 지나치지 않았다고 한다. 행여 주머니에 돈이 없을 땐 집으로 데리고 와서 그들 손에 돈을 쥐어주었다고 한다. 또한 거짓말인 줄 뻔히 알면서도 거짓말로 돈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을 거절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누구보다도 깊은 연민을 갖고 있었으며, 그것을 삶에서 실천함으로써 그들을 도왔던 천사였던 셈이다. 물론 자신의 경제 사정을 좀 잘 살핀 뒤 현명하게 대처했으면 더 좋았을 법했지만, 그의 인간적인 면모는 결코 폄하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책 덕분에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인간 대 인간으로 좀 더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작품이 아닌 작가를 이해하는 시도가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 작품에는 작가의 사상, 정서 등의 흔적이 담기지 않을 수 없지만, 결코 작가와 동일하지는 않다. 그래서 작품을 접하기 이전에 작가의 부정적인 측면을 먼저 알게 된다면, 그것이 선입견이 되어 작품 감상을 방해할 수도 있다. 오류인 줄 알면서도 한 번 착용한 선입견이라는 렌즈는 좀처럼 벗어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이 책을 뒤늦게 읽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일곱 작품을 직접 다 읽기 전까지 일부러 미루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책의 경우는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을 읽기 전에 읽어도 부정적인 영향을 거의 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이 안에 담긴 일곱 작품을 읽지 않은 채 이 책을 읽게 된다면 아마도 잘 공감할 수 없거나 깊게 이해하지 못한 채 저자 석영중의 해학과 위트가 묻어나는 현실감 있는 글쓰기를 즐길 기회를 찾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적극 추천하고 싶다.
* 도스토예프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22765477768221
2. 백치: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81911478520287
3. 악령: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671867029524729
4. 미성년: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791541264223971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236636616381098
6. 죽음의 집의 기록: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311510975560328
7. 가난한 사람들: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633890636655692
8. 분신: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717746821603406
9.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817986684912752
10. 노름꾼: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875476759163744
11.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272627856115307
12.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석영중):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894599463918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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