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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노래하는 예술

토마스 만 저, ‘토니오 크뢰거’를 읽고

이 작품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19세기 말 유럽 예술의 흐름을 파악해 둘 필요가 있다. 그 시기는 ‘데카당스’라는 단어를 빼곤 설명할 수 없는데, 이 단어는 라틴어 어원을 가지는 불어로써 ‘쇠락’ 혹은 ‘퇴폐’를 의미한다. 프랑스 예술가 보들레르로 대표되는 데카당스 예술은 관능이나 도취를 일삼는 탐미주의 혹은 세기말적인 그로테스크 예술 양식과 맞닿아 있다. 가장 큰 특징이라면 삶에 대한 강한 반감, 삶으로부터의 도피라고 할 수 있는데, 삶 자체는 가장 인간적인 것이기에 데카당스 예술은 삶과 인간 모두에 반하는 사조, 그래서 삶과 예술을 분리시킨 예술로 이해하면 되겠다. 생의 철학, 힘에의 의지, ‘네 운명을 사랑하라’는 (주의: 수동적인 운명을 받아들이라는 의미가 절대 아님) ‘아모르 파티’를 주창했던 니체가 이러한 데카당스를 비판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니체의 영향을 많이 받은 토마스 만은 작가, 즉 글을 읽고 쓰는 예술가로서 삶과 예술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답하면서 삶을 살아낸 장본인 중 하나다. 그의 초기작인 이 작품 ‘토니오 크뢰거’는 삶과 예술의 경계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둘 다 속하길 원하는 한 예술가의 처절한 고뇌가 담겨있다. 작가 토마스 만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진하게 녹아있는 단편소설이기도 하다. 

토니오 크뢰거는 작품 속 주인공 이름이다. 이름에서부터 작가 토마스 만의 고뇌가 함축적으로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크뢰거’라는 성은 명문 가문 출신을 상징하는 데 반하여 ‘토니오’는 이국적인 느낌을 풍기며 상류층에겐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토니오 크뢰거는 아버지로부터 명문가적인 피와 어머니로부터 남국적인 예술가의 피를 물려받은 인물로 그려진다. 상류층 자제로 (토니오 크뢰거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모두 영사였다) 태어난 토니오 크뢰거에게 전자는 삶과 인간을 대변하고 후자는 예술과 정신을 대변한다.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내며 깊이 사랑하기도 했던, 그러나 어느 이상 가까이할 수 없었던 파란 눈의 친구 한스와 멀리서 동경했던 금발 머리의 잉에는 상류층 자제들의 전형적인 삶을 살아내는 (‘순응하는’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인물로 그려진다. 반면, 여자 친구이자 화가인 리자베타는 한스와 잉에의 대척점에 놓인, 그러니까 삶과 동떨어진 채 외로운 길을 걸어가는 전형적인 예술가로 그려진다. 그리고 중간에 낀 토니오 크뢰거는 두 진영 모두에게 온전히 속해있지 않으면서 두 진영 모두 사랑하며 그 안에 온전히 속하길 갈망하는 경계인인 것이다. 

이 작품은 토니오 크뢰거의 성장소설로도 읽힐 수 있다. 부모의 보호를 받으며 학교를 다니던 시절부터 토니오 크뢰거는 남다른 속성을 가진 인물로 그려진다. 마치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그는 그에게 주어진 삶에 순응하지 못했다. 그는 남몰래 시를 썼다. 왜 자기는 친구들과 다를까, 하고 고뇌했다. 그리고 그 고뇌는 도저히 그만둘 수 없었다. 예술가는 어떤 학습에 의해서 길들여진다기보다는 타고난다는 뉘앙스로 충분히 읽힐 수 있는 부분일 것이다.

토니오 크뢰거는 남다른 길을 걸었고 성인이 되어 작가로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의 고뇌는 점점 더 심화되었다.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삶과 예술, 이 둘은 분리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하고 그는 수없이 많은 생각을 거듭했다. 그러던 중 고향을 방문하게 되고 이국 땅을 여행하면서 그는 스스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어쩌면 이미 답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삶을 사랑하는 예술가, 삶과 예술이 분리되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예술가, 그리고 너무나도 인간적인 예술가가 되길 다짐하게 된다. 생동하는 예술은 삶을 떠나서는 가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온전히 인정하게 된다. 이는 서두에 언급했던 데카당스 예술 사조에 대한 강력한 반기이자 변증법적 성장의 열매이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겐 잘 와닿지 않는 고뇌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모든 예술가들의 마음을 잘 대변하여 전적인 공감을 자아내는 고뇌가 아닐까 한다. 나 역시 읽고 쓰는 일을 사랑하는 한 작가로서 토니오 크뢰거의 다짐을 조용히 응원하고 지지하게 된다. 화려하고 아름다우나 죽어있는 예술은 진정한 예술이라고 할 수 없을 테니까. 일상을 배제한 채 환각으로만 보일 수 있는 예술은 우리의 삶을 오히려 파괴할 뿐이니까. 진정한 아름다움은 우리의 사사로운 일상 가운데 거할 테니까. 그것을 발견하여 관찰하고 성찰하고 통찰해내는 자가 바로 예술가일 테니까.

#김영웅의책과일상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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