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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적 상황과 전개가 주는 뜻밖의 위로

가즈오 이시구로 저,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을 읽고

몇 주째 지속되는 원인 불명의 불안 때문이었을까. 마침 읽고 있던 가즈오 이시구로의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은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내 내면의 심리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운명을 믿진 않지만 운명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공간을 향유하는 공감각적인 독서는 종종 독자를 과도한 자기 주관으로 이끌곤 한다. 하지만 불안했던 마음이 그로 인해 조용히 위로를 받을 수만 있다면, 그 주관적인 해석을 부정적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위로는 언제나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는 법이니까. 마치 운명처럼 알 수 없는 이유와 이해하기 힘든 과정을 통해서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법이니까.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감정선이 있다면 불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에겐 불안의 시기를 함께 했던 고마운 친구로 기억될 이 작품은 중간중간 전지적 작가 시점을 병행하는 듯한 부분도 보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기술된다. 중년 남성인 주인공 라이더는 세계적으로 성공한 피아니스트다. 800 페이지를 가뿐히 넘기는 분량을 가득 메운 자잘한 모든 이야기는 유럽의 어느 이름 모를 한 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현재 그는 여느 유명한 음악인들처럼 세계를 돌며 연주 일정을 소화 중이다. 

표면적으로는 목요일 밤에 있을 공연 중 피아노 연주와 짧은 연설이 그가 이 도시를 방문한 주된 이유다. 소설은 그가 며칠간 묵을 호텔에 발을 디디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유명세에 걸맞게 누군가의 환대를 기대했던 듯하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소설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그 상황을 묘사한다. “나를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심지어 프런트 직원마저 자리에 없는 것을 보고, 택시 운전사는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라이더만이 아니라 그 상황을 지켜보는 독자마저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인상을 받게 되는 장면인 것이다. 소설의 첫 문장부터 이러한 어긋남에 대한 묘사로 할애되고 있다는 점만 봐도 이 작품에 흐르는 전체 분위기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 이 작품에 대한 감상을 압축된 한 단어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아마도 ‘어긋남’ 혹은 ‘미끄러짐’ 정도가 아닐까. 특히, 카프카의 ‘성’을 읽어본 독자라면 내가 그랬듯 이 작품의 주인공 라이더와 ‘성’의 주인공 측량기사 K가 중첩되는 듯한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K는 성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만 끝내 목표를 이루지 못한 채 소설 끝까지 성 주위를 맴돈다. 마찬가지로 라이더 역시 일정에 있는 무언가를 실행하려고 할 때마다 그 도시에 거주하는 여러 사람들의 간섭과 사사로운 부탁 때문에 일이 계속 연착되고, 때론 전혀 계획에도 없었던 일에 휘말리기도 하다가, 결국엔 자신이 이 도시로 온 주된 이유인 피아노 연주와 연설을 하지 못하는 상황까지 직면하게 된다. 닿으려고 하지만 닿을 수 없고, 계속해서 어긋나고 미끄러지기만 하는, 어찌 보면 마치 우리네 인생의 축소판 같은 며칠 간의 카프카적 상황과 전개가 이 작품의 주된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긋나고 미끄러지는 이 카프카적 상황과 전개는 이 작품을 해석하는 하나의 중요한 키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문제가 남는다. 작가인 가즈오 이시구로는 의도적으로 주인공 라이더의 과거 기억 속에 있는 해결되지 못했던 사건과 상황의 파편들을 이 도시의 사람과 사물을 통해 형상화해 놓는다. 라이더를 건망증이 심한 인물 혹은 단편적인 기억 상실증에 걸린 인물로 해석해도 무방할 수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설이 전개되는 모든 이야기를 철학적 비유나 상징으로 해석하지 않겠다는 전제 하에서만 가능할 입장이다. 나는 그런 입장보다는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사람들이나 사물들이 주인공의 기억 혹은 과거의 상처와 맞물려 망령처럼 되살아나 주인공을 괴롭히고, 주인공은 그 과정을 불완전하게 처리하며 변화를 맞이하는 이야기로 해석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입장이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이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나 명확한 해설을 내놓지 않지만, 처음으로 만난 짐꾼이 알고 보니 장인어른이고, 그 짐꾼의 사소한 부탁을 들어주려 만나게 된 여자와 소년이 알고 보니 아내와 아들이며, 호텔 침대에 누워 가만히 있자니 갑자기 그 방이 자신이 어릴 적에 살던 집 안의 방과 똑같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장면이나, 주위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 중 상당수가 자신이 과거에 알고 지냈던 사람이라는 사실 등, 자칫 어느 한 기억 상실증 환자의 섬뜩한 단편적인 이야기로 해석하는 입장을 고수하다 보면 이 작품은 3류 소설 혹은 이해하기 어려운 괴기스러운 실험작 정도의 작품으로 폄하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소설 속 등장인물들과 배경들을 주인공 라이더의 기억과 맞물린 비유나 상징으로 보고 그에 따라 철학적이고 정신분석학적인 해석을 가한다면 비록 관념적이긴 하지만 오히려 말이 안 되는 부분이 줄어들게 된다. 물론 가즈오 이시구로가 자신의 철학을 문학적 장치인 소설로 구현하려고 했을 리는 없을 것 같다. 앞에 언급한 두 입장 중 어느 하나만 옳다고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따를 것이다. 그러므로 하는 수 없이 독자인 우리는 이도 저도 아닌 카프카적인 어긋남과 미끄러짐 가운데 놓일 수밖에 없다. 답답하기도 하고 묘연하기도 하며 다분히 환상적이고 실험적인 소설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개인적인 상황과 맞물려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제목과는 상관없이 적잖이 위로가 된 작품이었다.

가즈오 이시구로가 황혼을 노래한 3부작, ‘창백한 언덕 풍경’,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그리고 ‘남아 있는 나날’에서 느꼈던 그의 고유한 필체를 이 작품에선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내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전 작품을 읽기로 작정했던 이유는 그 필체에 반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목적에서 어긋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어긋남 때문에 나는 그의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매력을 느낀 그의 필체는 사라진 것도 아니다. 그의 최근 작품인 ‘클라라와 태양’에서도 그것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작품에서도 공히 다뤄지고 있는 소재는 바로 기억이다. 황혼 3부작의 주된 소재가 기억이라고 할 수 있고, 전혀 다른 필체로 쓰여진 이 작품에서조차 기억이 중심 소재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나는 가즈오 이시구로를 기억을 요리조리 요리할 수 있는 작가로 기억할 것 같은 느낌이다. 하나의 필체만을 고집하지 않고 여러 모습을 보여주는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 배울 게 정말 많은 작가임에 틀림없다. 이제 읽지 않은 그의 작품이 몇 안 남았다는 사실이 조금 서글프게 느껴진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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