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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onologue

폼 롤러

가난한선비/과학자 2022. 11. 18. 22:34

폼 롤러

클리블랜드 시절은 나에게 크고 작은 정신적, 육체적 흔적을 남겼다. 그중 하나가 수면 장애다. 2014년 즈음부터 나는 깊은 잠을 잘 이루지 못한다. 어릴 적엔 머리만 대면 5분 이내로 잠이 들었다고 한다. 내가 기억하는 바로도 나는 잠 때문에 고생한 적은 없다. 그러나 지금은 일 년 중 잠을 잘 잤다고 느끼는 날이 겨우 손꼽을 정도다. 거의 매일 밤 나는 잠들기 전 한 시간 안팎을 뒤척인다. 설상가상인 것은 잠이 겨우 들었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두세 시간마다 나는 잠에서 깬다. 정확히 한 시간 단위로 잠을 깨어 시계를 보며 나는 내가 미친 뻐꾸기라도 된 것 같은 기분에 종종 깊은 회의를 느끼기도 한다. 헤어 나올 수 없는 덫에 걸린 듯한 심정이 되는 것이다.

아내가 2년가량 일찍 한국에 들어와서 습득한 재주 중 하나는 필라테스다. 급기야 아내는 몇 달 전 필라테스 강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물론 지금은 장롱 면허 같은 존재로 취급되고, 아내는 가끔 방바닥에 뭔가를 펴놓고 꼼지락거리는 정도로 그 재주를 써먹고 있는 수준이지만, 어부지리로 가시적인 혜택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나다. 필라테스 도구 중 하나라고 하는데, 요상하게 생긴 이 녀석 덕분에 숙면을 취하는 날이 많아졌다. 이름하여 폼 롤러. 길쭉한 원통 모양으로 생겼다. 나는 이 물건으로 매일 밤 자기 전 십여 분 넘게 종아리와 허벅지에 위치한 근막을 살짝 아플 정도로 열심히 자극하며 마사지를 한다. 덕분에 상대적으로 쉽게 잠이 들 수 있게 되었다. 필라테스의 의문의 1승인 것이다.

의외의 사건들이 만들어내는 뜻밖의 조화. 현재에 벌어지는 과거의 치유.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에 잠길 만하면, 이런 순간들이 찾아와 인생 살 만하다고 다시 마음을 다잡게 만든다. 그리고 나는 일상에 흩어져 있는 소소한 행복의 조각을 하나 찾은 듯한 기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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