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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무엇에 이끌리는가.

슈테판 츠바이크 저, ‘감정의 혼란’을 읽고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는 말에서 물어야 할 건 ‘언제’이다. 우리는 언제 이성적일까?

우리는 생각한 대로 살아갈까? 아니면 살아왔던 대로 살아갈까? 이성은 습관을 이길 수 있을까? 이길 수 있다면 왜 우리의 오늘은 과거의 지배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는 걸까? 과연 인간이 이성적이라는 말은 옳은 걸까?

이성이 지배하는 세상은 예측과 통제가 가능한 시공간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적어도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지배하는 건 이성이 아닌 듯하다. 우리의 세상은 늘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은가.

세상 뿐만이 아니다.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건 한 세상을 이해한다는 것과 동의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불가능에 가깝다. 사람은 예측과 통제가 불가능한 존재이다. 고로 세상은 물론 사람도 이성의 지배를 받진 않는 것 같다. 영향을 끼칠 수 있을뿐 이성은 지배력이 약한 듯하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는 말은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이해해야 한다. ‘인간은 이성을 사용할 수 있으나,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 동물’, 혹은 ‘인간은 아주 가끔 이성적일 수 있는 동물’, 혹은 ‘인간은 이성의 사용을 선택할 수 있으나 대부분은 그러지 않는 존재’라고.

한편 ‘저 사람은 감정적이야’라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아마도 인간이 이성적이라는 전제를 진리로 가정하기 때문에 생긴 반동적인 결과일 것이다. 틀린 전제에서 도출한 명제가 옳긴 어렵다. 그러나 저 명제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감정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이성과 감정의 줄다리기에서 우리의 대부분의 일상은 과연 어느 쪽으로 치우쳐 있을까? 이성이 이기지 못하는 습관을 이루는 중추는 혹시 감정이 아닐까?

편하고 익숙한 것을 따라 살아가는 삶. 곧 습관이 지배하는 삶이다. 그것이 설사 어떤 기준에 부합하지 않아 수정되어야 한다고 이성적으로 판단이 된다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그 이성의 목소리를 따르지 않는다. 이성이 요구하는 것들은 도전으로 다가오고 에너지를 소비해야만 하는 애씀이 동반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약간의 손해를 볼 뿐 살 만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군중에 묻혀 익명성에 따라 살아가는 구름처럼 허다한 사람들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나도 당신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편하고 익숙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성보다는 감정이 지배하는 행동 양식에서 비롯되는 것 아닐까? 옳고 그름도 중요하지만, 이성을 따르면 더 건강하고 균형잡힌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데까지는 동의하지만, 그래도 나는 불편하고 생소한 삶 속으로 내 삶을 밀어넣고 싶지 않겠다는 최종 결정은 아무래도 감정의 영향 탓일 것이다. 일단 결정은 그렇게 해 놓고, 그것이 얼마나 나름대로 일리가 있고 틀리지 않은지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어쩌면 우리가 가진 이성이 가장 활발하게 작동하는 건 아닐까? 결국 이성은 감정의 뒤처리를 담당하는 역할에 머물진 않을까?

물론 성급하게 일반화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감정이 우리 인간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며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감정적’이라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넘어 반드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사실 감정적이라는 단어는 부정적일 수 없다. 감정은 이로 인해 억울한 누명을 쓴 것처럼 보인다. 인생의 전반전을 마치고 후반전을 살고 있는 내 눈에 비친 인간과 인간의 삶은 다분히 감정적이다. 이성이 아닌 감정이 지배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더 많은 것 같다. 그래서 해가 갈수록 나는 감정의 누명을 풀어주고 싶어 진다. 이성이라는 가면 안으로 숨지 않고 솔직한 인간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그로부터 다시 모든 것을 사유하고 해석하고 싶어 진다. 인간이 이성적이라는 대전제에 저항하고 싶어 진다.

억누를 수 없는 감정. 주체할 수 없는 마음. 제어할 수 없이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 오르는 욕망. 흔히 말하는 ‘운명’이라는 단어도 이성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한다. 운명을 믿지 않는 사람도 언젠간 운명적인 만남이나 사건을 부딪히게 된다. 이성을 가뿐히 넘어서는 그 무엇. 머리를 통과하지 않고 가슴을 울리는 그 무엇. 우리는 살면서 한 번쯤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시기를 만나기도 하고, ‘새로운 나’로 거듭나기도 한다. 이런 중요한 변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무게중심은 이성이 아닌 감정에 있지 않을까 한다. 이성으로 아무리 수긍해도 결국 나의 무거운 육체를 움직이게 하는 힘은 감정이 동반될 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종 이성의 수긍 없이도 감정의 동요만으로 우린 우리 몸을 움직이기도 한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첫 저서를 읽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내가 사랑하는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평전을 썼다고 해서 알게 된 작가이다. 그러고 보면 그를 알게 된 것도, 일차 저작을 읽고 나면 이차 저작까지 섭렵하고 싶어지는 내 욕망에 따른 결과다. 19세기말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작가로 활동하다가 부조리한 세상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 망명한 브라질에서 아내와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당대 최고의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 책 머리에 적힌 바에 따르면, ‘그의 작풍은 인간의 데모니슈, 즉 인간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감정들에 대한 이야기를 탁월한 심리묘사를 통해 그리고 있는 것들이 많다’고 한다. 이 작품 ‘감정의 혼란’ 역시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고도로 지성적이지만 이성의 힘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걷잡을 수 없는 감정과 충동에 이끌리는 인물들의 심리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인간은 아름다움을 감지할 수 있고, 또 그것을 찾고 향유하려는 본능을 가진다. 심미적인 성향은 인간의 본성 중 하나일 것이다. 아름다움의 정의는 사람마다 그리고 상황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누구나 살다 보면 심미적 체험을 하게 되고 그것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된다는 점은 보편적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롤란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대학을 가서도 방탕한 삶을 살던 롤란트는 예상치 못한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방문에서 뜻밖에도 첫 번째 심미적 체험을 갖는다. 당시 그는 한 여자와 하숙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버지는 많은 말씀을 하지 않으셨고, 그 절제와 배려는 롤란트에게 감동을 불어넣는다. 논리와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뜻밖의 도약을 감행하게 된다. 향락에 찌든 자신의 방탕한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거기로부터 나와 정신적인 것에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옮긴 학교에서 롤란트는 우연히 셰익스피어 강의를 듣게 되고, 뜻하지 않은 두 번째 심미적 체험을 하게 된다. 그 강의를 하던 교수의 진정성 깃든 열정이 롤란트의 눈과 귀를 열게 된다. 이후 그 교수와의 친밀한 관계가 이루어지고 롤란트는 문학의 세계로 깊숙이 빠져든다. 그것은 지적 호기심에 의한 회심이 아니었다. 교수에 대한 순수한 흠모와 그 교수를 통해 보게 된 문학의 아름다움이었다. 학문의 문외한이었던 롤란트는 심미적 체험을 통해 학문에 눈을 뜨게 되었던 것이다.

롤란트는 행복했다. 새로운 삶은 그에게 삶의 의미를 찾게 해주었다. 남들이 뭐라고 해도 개의치 않았다. 하숙집까지 교수가 사는 집의 윗층에 얻은 후 그는 매일 같이 교수와 시간을 보낸다. 학문의 깊이와 넓이를 맛보게 된다.

몇 주 후, 하루 정도는 쉬라는 교수의 말에 순종하며 교수를 만나기 이전으로 잠시 돌아간다. 책을 내려놓고 강으로 수영을 하러 나간다. 거기서 어쩌다가 날렵하게 물을 가르고 나아가는 한 여자를 제치고자 힘을 다해 보지만 실패하고 마는 롤란트. 그는 그녀에게 매력을 느낀다. 예전처럼 작업을 걸게 된다. 그런데 이게 어인 일일까. 그녀는 그가 어디에 사는지 알고 있었다. 오늘도 저녁에 올 거냐고 묻는 것이었다. 아뿔싸. 그녀는 교수의 아내였던 것이다. 롤란트는 또 한 번 감정의 혼란를 겪는다.

그날 저녁 롤란트는 여느 때처럼 교수와 함께 저녁을 함께 하러 간다. 교수에게 어떤 비난을 들어도 좋다고 각오까지 했다. 교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교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교수가 갑자기 사라진다. 그렇잖아도 그에게 다정한 눈길과 보살핌과 가르침을 주었던 교수는 종종 그에게 쌀쌀한 태도를 보이는 등 롤란트가 느끼기에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던 차였다. 또한 교수와 그의 아내 사이에 흐르는 벽 같은 단절에 이상함을 느끼던 차였다. 롤란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롤란트는 마치 버려진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어떻게 말 한 마디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는 것인가. 그동안 가장 다정하게 지내던 사람인 자기에게조차! 롤란트는 처음 교수에게 반하던 때와 정반대의 감정의 혼란을 겪는다. 롤란트는 결국 일탈을 하게 되고 육체를 탐닉하던 그 시절의 모습으로 잠시 돌아간다. 그리고 교수의 아내와 하룻밤을 같이 하게 된다.

다음 날 롤란트는 죄책감에 온몸을 부르르 떤다. 모든 걸 내려놓고 떠날 준비를 한다. 그때 마침 교수가 갑자기 돌아온다. 차마 교수에게 자초지종을 직접 말할 수 없었다. 편지를 하겠다고 했더니 교수는 제대로 작별해야 한다며 대화를 하자고 한다. 롤란트의 마음은 이미 무너졌다. 어찌할 바를 몰라 온몸을 떨며 감정을 숨기지 못한 채 표정으로 드러내고야 말았다. 눈치를 챈 교수는 이것저것 묻다가 아내가 그 이유인지 묻게 되고, 롤란트는 부인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고야 만다. 놀랍게도 교수는 태연했다. 젊은이가 그럴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롤란트는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이 혼란스러움은 약과였다.

교수에게는 비밀이 있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고 말할 수 없었던 비밀을 롤란트는 그날 밤, 교수와의 마지막 날 밤 듣게 된다. “나도… 나도 자네를 사랑하고 있네.”

교수는 어릴 적부터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였다. 그는 지금까지 지킬 박사로 살 때는 저명한 교수로, 하이드로 살 때는 비밀스러운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어두운 거리를 다녀왔다. 그가 갑자기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며칠간 떠났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교수에게는 롤란트가 순진무구한 사랑으로 자기에게 다가온 나날들이 너무나 가슴 벅찬 시간이었다. 그러면서도 롤란트를 보호하기 위해 쌀쌀맞게 대하고 모진 말을 건네곤 했던 것이다. 자꾸만 터져나오는 자기 안의 하이드를 물리치기 위하여, 그 하이드로부터 롤란트를 보호하기 위하여, 오해 받을 것을 감안하면서도 그렇게 해야만 했던 것이다. 롤란트는 그렇게 다시 한 번 감정의 혼란을 겪게 된다.

이 작품 속에서 소개되는 이야기는 롤란트가 겪는 수 차례의 감정의 혼란을 위주로 전개된다. 모두 예측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일들은 노년의 교수가 된 롤란트의 기억에 선명하게 각인된 사건이 되었다. 우리의 삶 가운데에도 이런 일은 빈번하게 일어난다. 우리의 기억을 이루고 있는 중추는 이성이 아닌 감정, 그중에서도 감정의 혼란이 자리하고 있진 않을까. 때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로, 때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계기로, 때로는 한 사람과의 작별을 감당할 수밖에 없는 사건으로 기록되는 것이다. 그때 그때마다 이성 역시 한 박자 늦지만 활발하게 작동한다. 이미 벌어진 그 감정의 혼란이 가져오는 트라우마를 해소하고 재해석하고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말이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인간의 본성 깊숙한 곳에 도스토옙스키와는 다른 결로 다가간 작가라는 생각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인간은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존재다. 인간은 신비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 작가를 만남으로써 나는 인간이라는 한 세계를 조금이라도 더 깊고 풍성하게 알기 위한 좋은 길잡이를 하나 더 발견한 기분이다. 전작 읽기를 시도해야 할 작가가 또 하나 생겼다.

#녹색광선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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