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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하지만 대단한 선택

클레어 키건 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고

클레어 키건의 문장들은 일견 건조하게 느껴진다. 따로 떼어내서 보면 실제로 그래 보인다. 그러나 그 문장들이 한데 모여 단락을 이루고, 그 단락들이 모여 한 편의 글이 되면 놀랍게도 아름다운 작품으로 탄생한다. 태연하고 무심하게 보이지만 알고 보니 누구보다 섬세하고 애정 어린 사람의 손길임을 문득 깨달았을 때와 같은 느낌일까. 그러므로 건조하게 느껴진 건 선입견으로 가득한 내 첫인상의 극히 일면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나의 애정 없음일 뿐 저자의 애정 없음이 아니었다. 오히려 화려한 수사 없이도 이야기를 충분히 이끌고 갈 수 있는 저자의 저력이라 이해하는 편이 옳다는 생각이다. 또한 중첩되는 문장도 불필요한 문장도 찾아볼 수 없이 모든 문장이 유기적으로 짜인, 지극히 경제적이고 효율이 극대화된 글이 바로 키건의 글이 아닌가 한다. 신형철이 말한 '정확한' 글쓰기의 실례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키건의 작품엔 노트에 옮겨두고픈 명문도 많다. 무엇보다 압축적이고 함축적인 문장의 힘을 제대로 맛볼 수 있다. 아, 살면서 동시대에 이런 작가의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건 큰 행운이리라.

그래서일까. ’맡겨진 소녀’에 이어 나는 책장에 일 년 넘게 터줏대감처럼 자리 잡고 있는 책들도 무시하고 최근에 책장에 꽂힌, 작년 출판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이 책 ’이토록 사소한 것들‘을 어젯밤 나도 모르게 손에 들고 읽고 있었다. 

‘맡겨진 소녀’가 사소한 일상의 조각을 한 폭의 감성적인 수채화로 담아냈다면, ‘이토록 사소한 것들’은 제목과 달리 결코 사소하지 않은 것들을 다룬다. 내용 면에서 나는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를 떠올렸다. 모두 수치스럽고 가슴 아픈 인간 역사의 단면을 중심 소재로 삼아 작가의 상상력을 입혀 소설화시킨 작품이기 때문이다. ‘소년이 온다’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뤘다면,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 사건을, 그리고 ’이토록 사소한 것들‘은 18-20세기 아일랜드에서 벌어졌던, 정부와 가톨릭교회가 합세하여 ‘타락한 여성들’이라는 명분으로 미혼모를 포함한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사회적 약자층 여성들을 집단 수용하여 강제 노동시키고 학대했던 ‘막달레나 세탁소’의 현장으로 독자들을 데리고 간다. 

막달레나 세탁소는 공교롭게도 수녀원이었다. 성스러워야 할 장소는 인권유린의 현장이 되었다. 수녀들은 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그들을 학대했다. 그곳에서 태어난 아기들은 흔적도 기록도 없이 어머니를 잃어야 했다. 아마 가톨릭에서 말하는 '죄'라는 명목을 들이대어 그들을 정죄하고 판단한 결과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정죄와 판단은 더 큰 죄악이 되었다. 한 사람을 보호하고 교화시키려다가 수많은 사람들을 집단 살인한 결과와 한치도 다르지 않은, 지울 수 없는 피의 열매를 맺었기 때문이다. 

작품 속 주인공 이름은 빌 펄롱, 때는 그 어느 겨울보다 추웠던 크리스마스 시즌이다. 빌 펄롱은 석탄을 보관하고 배달한다. 한파가 몰아쳐 그 어느 때보다 바쁜 일과를 보내고 있다. 그래봤자 아내와 다섯 딸로 이뤄진 한 가족의 끼니를 거르지 않고, 또 큰 빚을 지지 않을 정도로 삶을 겨우 지탱해나가고 있을 뿐이다. 그에겐 여유로운 것이 없었다. 하지만 부족한 것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매일 반복된 일상을 살아가며 그는 요즈음 뭔지 모를 공허를 느낀다. 

빌의 어머니는 일찍 죽었다. 사인은 뇌출혈이었다. 빌은 뒤늦게 어머니에게 자신이 미처 물어보지 못한 게 있다는 걸 알았다. 아버지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빌은 미혼모의 아들이다. 비록 어머니는 하녀 신세로 살아가는 저소득층에 속했고, 아버지는 본 적도 만져본 적도 없지만, 빌은 어머니와의 어린 시절 기억을 평생 가지고 있다. 그리고 어머니를 끝까지 보호해 주고 사회적으로 아무런 문제 없이 살 수 있게 해 준 미시즈 윌슨을 은인으로 여긴다. 미시즈 윌슨은 빌의 어머니가 뜻하지 않게 임신을 했을 때에도 그녀를 내치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서 일하게 해 주었다. 그건 은혜였다. 특히 가족들 모두가 그녀를 버렸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빌은 그렇게 자라고 결혼도 해서 딸을 다섯이나 낳았다. 

하지만 빌은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면 흔적도 없이, 아무런 어머니에 대한 기억도 없이, 어디론가 이슬처럼 사라져 버릴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빌의 어머니도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면 아일랜드 정부의 손아귀에 잡혀 수녀원의 탈을 쓴 막달레나 세탁소에 수용되어 학대를 당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시즈 윌슨은 조용히 그녀가 해야 할 일을 했다. 어쩌면 해야만 한다고 믿었던 일을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대단한 선택이었지만, 결코 큰 일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에겐 사소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선택이 가능했던 이유는 미시즈 윌슨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덕분에 빌의 어머니도 빌도 비극적인 운명에 놓이지 않을 수 있었다. 미시즈 윌슨의 선택이 그녀 자신에겐 사소했을지 모르지만, 빌의 어머니와 빌에게는 인생 전체였다. 

빌이 느끼는 공허가 어쩌면 부채감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석탄 배달을 하러 수녀원을 찾았다가 우연히 발견한 한 소녀를 보고 난 이후 그것은 눈덩이처럼 커졌을 것이다. 석탄 창고에 갇혀 밤새 추위에 떨다가 빌에게 우연찮게 발견된 그 소녀는 학대받는 아이였다. 막달레나 세탁소에 잡혀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강제 노동에 시달리던 아이였다. 그리고 그 소녀는 평행우주 속 빌의 어머니였을지도 모른다. 빌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 정도면 살 만하다고 여기며 감사하게 살고 있었지만, 그 소녀를 본 순간 자신의 평안한 삶이 결코 평안해선 안 되는 것처럼 여기기 시작했던 듯하다. 빌은 크리스마스의 즐거움도 잊은 채 깊은 고민에 빠졌다가 몰래 수녀원을 다시 찾아 그 소녀를 집으로 데리고 가는, 사소하지만 대단한, 결단을 내리고 실행에 옮긴다.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가는 길에 동네 주민들을 마주친다. 빌은 잠시 자신의 행동이 맞는 것인지 갈등하고 망설이기도 한다. 앞으로의 일들이 그려져 염려되기도 한다. 하지만 꿋꿋이 아이의 손을 잡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는 마음 저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르는 희열을 느낀다. 공허가 사라짐을 느낀다. 비로소 은혜로 비롯된 삶의 향방을 발견한 것이었다. 

막달레나 세탁소는 두 세기 동안 유지되었다. 아일랜드 정부와 가톨릭교회의 합작이었지만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주민들의 암묵적 묵인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빌은 몰랐지만, 그의 아내 아일린은 동네 주민들처럼 수녀원의 은밀한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딸 다섯이 그곳의 아이들과 다르다는 사실로 만족해했다. 그들은 그들 사정이고, 내 딸은 내 소관이라는 식으로 보이지 않는 선을 긋고 살아가고 있었다. 아일린은 빌을 제외한 많은 주민들을 대표하는 이름이지 않을까, 하고 나는 해석해 본다. 작품에는 더 이상 이야기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빌이 그 소녀와 함께 집에 들어섰을 때 아일린의 표정과 반응이 궁금하다. 그리고 조용히 나는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과연 빌일 수 있는지, 혹시 아일린이나 동네 주민에 머물고 있진 않은지.

불의를 묵인하는 건 사소하다. 정의를 지키기 위한 작은 선택을 하는 것 또한 사소하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 대단한 일이다. 큰 파급효과를 낸다. 불의를 묵인한 자는 불의 앞에서 눈을 돌리고 정의 앞에서도 눈을 돌리게 된다. 눈을 둘 데가 없어 그저 허공이나 바닥만 쳐다보게 된다. 방어적이고 사적이게 된다. 하지만 정의를 지키기 위해 작은 선택을 한 자는 불의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 있고 자신의 희생을 감내하더라도 타자를 살려내는 일에 몸을 던진다. 그것이 지극히 사소한 일이라도 상관없다. 살리는 일이면 된다. 은혜를 갚는다는 마음이라도 좋다. 살릴 수 있다. 나의 사소한 선택은 대단한 선택이 될 수 있다. 

클레어 키건의 두 작품을 내리읽으며 그녀의 문장들 속에서 사흘을 보냈다.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다. 글만이 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걸 다시 깨닫게 된다. 문학의 힘을 다시금 믿게 된다. 

책을 다 읽고 책 앞부분에 적힌 헌사와 그 뒤에 따라오는 아일랜드 공화국 선언문을 발췌한 몇 문장도 다시 읽었다. 읽히지 않았던 것들이 읽혔고, 깨닫지 못했던 것들이 깨달아졌다. 행간이 이해가 되고 왜 그 글이 거기에 쓰여있는지 이해가 되었다. 작품의 시간적 배경이 왜 크리스마스 시즌인지, 왜 그해 12월엔 까마귀의 달이 되어야만 했는지도 덩달아 이해가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다시 한번 클레어 키건이라는 작가를 경이에 찬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다산북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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