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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벨
드문드문 방황하며 교회당에 출입하지 않던 2-3년 정도의 기간을 제외한다면 국민학교 3학년부터 교회를 다녔으니 벌써 교회 다닌 지 거의 40년이 되어간다. 그동안 들었던 교회 목사님들의 설교를 모두 기억하진 못하지만, 대충 통계를 내보면 팔 할 이상이 신약성경을 본문으로 했던 것 같고, 나머지인 이 할 이하가 구약성경을 본문으로 했던 것 같다.
신약성경을 본문으로 한 설교의 경우 대부분이 예수의 탄생, 죽음, 부활, 그리고 기적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공생애 기간에 예수가 어떻게 인간의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서, 어떻게 가난하고 소외되고 버려진 자들과 소통하며 전복적인 메시지를 전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설교를 들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내게 예수는 마치 마술 같은 기적을 행하는 존재, 그리고 죽기 위해 산 존재처럼 느껴졌었다. 예수의 삶은 온데간데없고 탄생과 죽음과 부활과 기적만이 예수의 모든 것이 되어버린 듯했다. 신이자 인간이신 존재라고 배웠는데도 설교는 인간 예수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대부분이 신성만 강조되는 설교였다. 그러니 예수를 본받아야 한다는 목사님들의 설교가 내 귀에 들어오기나 했겠는가. 예수의 탄생, 죽음, 부활, 기적만이 강조된 상태에서 내가 무엇을 본받을 수 있었겠는가. 내가 성령으로 태어날 수도 없고, 대속제물로 죽을 수도 없으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도 없고, 초자연적인 기적을 행할 수도 없으니 내가 본받을 수 있는 거라곤 하나도 없는 듯했다. 나는 마치 중간을 건너 뛴 듯, 이미 정해진 결론에 성급하게 이른 듯한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중요한 고리가 항상 빠져있는 듯했다. 그래서 내겐 예수를 본받으라거나 예수처럼 살라는 목사님들의 말씀이 언제나 공중에 붕 뜬 메아리로 들렸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아쉬운 부분이다.
전도서의 헤벨을 말하려다가 곁길로 샌 것 같다. 하기야 어차피 아쉬운 부분을 말하려던 거라 많이 돌아간 것 같진 않지만 말이다. 아무튼 내가 평생 들은 설교 중에서 이 할 이하가 구약성경을 본문으로 했는데, 그중에서도 전도서로 설교를 들은 적은 그 이 할에서도 이 할 정도도 안 될 것 같다. 놀랍지 않은가. 그런데 더 놀랄 게 남아 있다. 그건 그 이 할 중 이 할 중 팔 할 이상이 ‘헛되다’라는 단어에 초점이 맞춰졌다는 점이다. 이 단어는 전도서 1장 2절부터 등장한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래서인지 학창시절부터 전도서는 내게 인생무상, 공허함, 덧없음을 상징하는 대명사로 각인되었다. 정말 아쉬운 부분이다.
며칠 전 제임스 스미스의 ‘시간 안에서 사는 법’을 읽으며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크게 깨달은 것 한 가지는 전도서에 자주 등장하는 ‘헛되다’라는 단어의 재해석이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전도서는 내게 있어 vain, futile, meaningless 등의 단어를 상징하는 책이었다. 모든 게 헛되고 덧없고 공허하니 변치 않고 언제나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라는 메시지로 들리기만 했다. 무슨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에 비교되는 현실세계도 아니고,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육적인 세계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모든 게 헛되다는 문장을 해석하여 하나님의 영원성을 강조하는 목사님의 설교는 플라톤과 영지주의가 말하는 이분법적인 해석에서 한치도 벗어나 보이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이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겠는가. 장차 망할 성이라고 믿거나 하루라도 빨리 죽어서 천국에 가야겠다고 마음 먹는 게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여기서도 무언가 중요한 것을 건너 뛴 듯한 느낌이 강했던 것이다.
그러나 제임스 스미스는 ‘헛되다’의 히브리어 원단어가 ‘헤벨’이라고 알려주면서 해석을 달리했다. 아마 이런 해석은 이미 존재했겠지만 나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헤벨은 안개, 입김, 수증기를 뜻하는 단어라고 했다. 해가 뜨면 사라지는 아침 안개 같은 것 말이다. 즉 ‘덧없고 공허하고 쓸모도 없고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잠깐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것’이 헤벨의 원뜻이었다.
전도서가 전혀 다르게 해석되기 시작했다. 잠시 있다 사라지는 유한성 때문에 오히려 지금,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현재에 충실해야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참고로, 영원성과 유한성에 대한 비유는 내가 어제 쓴 감상문을 보면 되겠다.
바른 해석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는다. 목사님들의 설교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믿었던 나의 지난날들이 참 아쉽다. 신학은 모두에게 필요하다. 성경만 읽어서는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연구를 해야 한다.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면 곤란해진다. 고든 피의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의 앞부분에서 강조하듯이 언제나 주해가 먼저다. 그다음에 해석이 따라와야 한다. 평신도들의 신학공부는 필수라고 생각한다. 전도서를 오늘부터 다시 천천히 읽으며 묵상할 생각이다. 신학책을 참고하며 그동안 잘못 읽어왔던 전도서의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읽고 이해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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