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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kage(누수)
인생의 큰 물줄기에 따라 삶의 방향이 바뀐다. 예측하지도 못했던, 아니 예측했다 하더라도 피할 수 없었던 사건 혹은 상황이 어느 날 바로 코 앞에 닥쳐오고 우린 본능적으로 생존을 염두에 둬야 할지도 모르는 그 흐름에 현재를 맞춰간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가까운 미래가 된다. 어쩌면 인생은 불가항력적인 흐름에 겨우 몸을 맡긴 채 버티며 살아가는 순간들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오늘 아내와 전화하면서 고백한 게 있다. 가까운 미래를 얘기하다가 나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왔다. "불확실하지만 불안하진 않아." 진심이 담긴 문장이었다. 점점 더 버티는 게 무엇인지, 그렇게 버티는 순간들의 느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낮고 겸허한 마음이 된다. 이런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라서 깊은 안도를 느꼈다.
인생책방 2월 정기모임에서 함께 나눌 책은 파스칼 메르시어의 '언어의 무게'다. 연말연시를 가족과 함께 보내고 온 지 이제 열흘 째, 600 페이지가 넘는 이 작품의 삼 분의 일 지점을 읽어나가고 있다. 초독 때 느끼지 못했던 맛까지 음미하면서 천천히 읽어나간다. 모든 문장들이 빛난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내가 읽은 천 권이 넘는 책들 중 손에 꼽을 수 있을 작품이다. 작품의 서사도 매력적이지만, 그런 서사조차도 이 작품의 정수라고 여겨지는 문체와 묘사와 정서와 흐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읽어나가는 과정 자체가 황홀한 작품이다. 가능한 작품 속 세계 안에서 흠뻑 젖어 들어가 머물러야 제맛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파스칼 메르시어는 소설가이기 이전에 철학자다. 페터 비에리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철학 저서가 여러 권 한국말로 번역되어 있다. '언어의 무게'에서나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나 내가 반했고 나를 황홀하게 만든 숱한 문장들은 소설가 파스칼 메르시어가 아닌 철학자 페터 비에리로부터 온 것이라는 게 내 지론이다. 가슴에 박히는 문장을 쓰기 위해서는 그 문장이 깔고 있는 깊은 시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박한 재주로 다다를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게다. 글을 쓰는 작가라면 반드시 철학을 공부하고 철학적인 사유를 해야만 하는 이유도 되겠다.
한 순간만 보면 어려운 철학 공부나 신학 공부가 스트레스만 조장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좋은 문장은 절대 임기응변이나 재치로 나올 수 없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조금씩 조금씩, 낙숫물에 바위가 파이듯, 천천히 천천히 쌓이고 쌓여 조금씩 글에서 한 문장 두 문장씩 새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 leakage(누수)를 언제나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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