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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onologue

결여된 소망의 소환

가난한선비/과학자 2017. 1. 25. 02:42

페이스북의 주요 장점은 비교적 쉽게 질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시대의 흐름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과 반응이 어떠한지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물론 가상 공간이라는 제한적인 요소가 정보의 진실성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순 없겠지만, 현대 사회에서의 아고라 광장과도 같은 역할을 페이스북이 담당하고 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한편, 기독교의 본질을 추구하면서도 생각이 개방적이고 진보적이어서 우리네 인간 삶의 각 분야에 걸친 하나님의 나라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많은 기독교인들도 페이스북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그들은 특히 최근 우리나라의 시국과 관련하여 각자가 가지고 있던 신앙의 깊이를 여과 없이 보여주기도 한다. 글을 찬찬히 읽어보면 글쓴이의 내공이 느껴진다. 미처 생각할 수 없었던 부분이나, 너무도 당연하게 옳다고 여겨왔지만 잘못된 것으로 판명이 나야만 하는 부분들, 반대로 그릇된 것으로 인지하고 있었으나 실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재해석해야만 하는 부분들까지, 그들의 눈은 면밀하고 그들의 혀는 과감하다. 이제 신학 서적을 끄적거리며 읽기 시작한 내 눈에 비친 그들은 너무나도 정확하고 바르게 기독교의 핵심 사상을 삶에서 재해석하여 적용하는, 배울 게 너무나 많은 랍비들이다.


몇 달간 그들의 글을 팔로우했다. 겸손하지만 색깔이 분명하고, 과감하면서도 정확하고, 나아가 사람들의 깊고 넓은 공감을 이끌어내는 그들의 글은 나에겐 굉장한 자극이었고 나의 기독교 세계관에 영향을 줄 정도로 임팩트가 컸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뭔가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목소리에서 사이다와 같은 청량감을 느껴왔고 지금도 그렇지만, 사이다 뚜껑을 따고 마시다 보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김이 빠지듯이, 오늘따라 그들의 글이 더이상 사이다가 아니라 김 빠진 설탕물처럼 느껴져 버린 거다.


여전히 달짝지근하지만 톡 쏘는 시원함은 무뎌져서 그런지 더 이상 느낄 수가 없고, 처음엔 산처럼 높아 보였던 그들의 내공도 점점 바닥이 드러나는 것인지, 비슷한 논리의 연장선에서 그저 언어 유희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들이 한계점에 도달한 걸까. 아니면 내 머리가 그새 커져버려 교만해진 걸까. 그것도 아니면, 그들이나 나에게 있어, 우리 모두에게 있어 무언가가 빠져 있었던 건 아닐까?


완전한 창조세계를 다룬 처음 장들 이후로 성경 이야기는 창세기 3장에서 뭔가 잘못되어 간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에게 반역을 시도하고, 그분의 선의를 불신하고, 그분의 권위에 불순종하며, 그분이 그들의 자유를 위해 정해 놓은 경계선을 무시한다. 이로 인해 창조세계 안에 확립된 모든 관계가 철저히 깨진다. 죄의 시작이다.


죄의 등장 이후로도,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거듭해서 나타난다. 뱀의 머리는 상하게 될 것이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옷이 입혀진다. 가인은 보호를 받는다. 노아와 그의 가족은 구원을 받는다. 삶은 계속되고 노아 언약 아래서 피조물은 보존된다. 그러나 인간의 죄의 무게는 점점 커져만 갔다.


시날 땅에 정착한 인간은 교만과 불안함으로 인하여 탑을 세우기로 한다. 하나님의 뜻을 또다시 거부하면서 하늘에 이르려 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그 결과 무질서한 분열이 일어났고 땅은 인간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는다.


이렇듯 창세기 1-11장은 하나님만이 답하실 수 있는 우주적 질문을 제기한다. 노아 때 홍수로 인하여 다시 시작한 인류조차 원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파괴적이고 악한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완수하기 위해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는가? 하나님의 다음 계획은 오직 하나님만이 생각하실 수 있는 엄청난 일이었다. 하나님은 바벨 땅의 한 나이 많고 자식 없는 부부를 보시고, 그들을 부르신다.


아브람을 부르신 것은 인간의 악함, 나라 간의 분쟁, 그분의 피조물 전체가 망가져 신음하는 것에 대한, 요즘 말로 총체적 난관 (그것도 우주적인 규모로)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의 시작이었다. 우주적 구속의 시작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언약을 맺으신다. 아브라함을 통해 만민이 복을 얻게 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바로 복음이다.


좋은 소식, 복음 자체를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나는 지금 복음이 성취될 것에 대한 소망을 말하고 있다. 생각만 해도 기쁨으로 가득해 질 수 있는 소망이, 글을 쓰는 자에게나 읽는 자에게 빠져 있었음을 상기시키고 싶은 거다. 소망은 기쁨이다. 우울한 기분에 한 잔 들이키는 소주 같은 존재에 그치지 않는다. 답답한 가슴을 시원케 해주는 사이다 같은 존재에 그치지 않는다. 소망은 그 이상이다. 마셔도 마셔도 계속 목이 마른 이유는 바로 소망이 결여된 차가운 지성과 소망이 결여된 거룩한 분노, 소망이 결여된 정의 실현의 외침, 그리고 소망이 결여된 공감 능력이 우리의 내면과 외면 모두를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점점 기계적인 느낌마저 묻어나는 차가운 그들의 글을, 이제는 읽기가 힘들다. 결여된 소망이 그들의 글에 소환되어진다면 나는 사이다와 같은 시원함은 느끼지 않아도 좋다. 대신 따뜻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뜻함이 진작에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다면, 사이다와 같은 존재는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이다는 답답할 때 필요한 것이니까). 그렇다. 난 따뜻함이 좋다. 따뜻한 글을 읽고 싶다. 기쁨이 묻어나는 글을 읽고 싶다. 가상 공간인 이 페이스북이 아닌 현실에서의 그들이 실제로 따뜻해졌으면 좋겠다. 적어도 복음을, 하나님나라를 누리며 소망하고 있는 기독교인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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