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자와 건너지 못한 자와의 소통
살다 보면 여러 번 강을 건너게 된다. 강은 저마다 의미를 가지지만 모두 다 같지는 않다. 어떤 강은 한 번 건너면 돌아갈 수 없다. 영원히.
다양성이 공동체에서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지에 대한 이야기는 많다. 나 역시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다른 감정을 느끼며 반응하는 이들과 언제나 함께 해야 건강한 공동체가 된다는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이런 다양성을 어떻게 끌어안을지에 대해서는 좀처럼 이야기되지 않는다. 이 글은 이 점에 대한 나의 사견이다.
문제는 이것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 가운데에는 그저 여러 다른 강을 건넌 이들만이 아니라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사람들이 언제나 소수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수평적인 다양성만이 아닌 수직적인 다양성도 생겨난다는 말이다. 크기와 색이 다른 양파들끼리의 다양성만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겹이 만들어내는 다양성도 생겨난다는 말이다. 다른 언어권, 다른 문화권에서 온 사람들과 이루는 다양성도 있지만, 같은 언어권, 같은 문화권 안에서도 서로 다른 층위의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이루는 다양성도 존재한다는 말이다. 전자가 풍성함을 지향한다면 후자는 깊이를 나타낸다고 할 수도 있겠다.
시대가 많이 바뀌어 수평적인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데에 이제는 사람들이 많이 익숙해진 것 같다. 예전보다 많이 개방되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어쩌면 더욱더, 수직적인 다양성은 깊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수평적인 다양성 차원에서 서로를 받아들이고 대화하고 소통하는 분위기가 수직적인 다양성의 실체를 접하게 되면 주춤하게 된다. 그리고 더 이상 진전되지 않거나 무너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수평적인 다양성은 의외로 어렵지 않다. 익숙하지 않을 뿐이지 한 번 맛을 보면 금세 익숙해진다. 물론 익숙해진다는 말이 아무런 거리낌이 없을 정도가 된다는 말은 아니다. 어느 정도 예의를 갖추고 형식적으로라도 상대방을 대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조금 비딱하게 말하자면 가면을 쓰고도 충분히 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수직적인 다양성과의 조화는 쉽지 않다. 언어가 다른 것도 아니고 문화가 다른 것도 아닌데 오히려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보다 더 어렵고 힘들다고 느끼게 된다. 뭔가 벽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이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상태이고, 상대방은 아직 강을 건너지 않았거나, 강의 존재를 알고는 있지만 건널 용기가 없다거나, 혹은 강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는 상태다. 이 두 사람 사이의 소통은 단순한 형식적인 예의 정도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일상에서 이런 경우가 발생하면 대부분은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하게 된다. 하나는 관계 단절, 다른 하나는 날씨 얘기 정도만 하는 형식적인 관계 유지. 자, 당신은 어느 쪽인가? 솔직히 말하건대 나는 주로 두 번째를 선택하고 살아간다. 가끔 첫 번째를 택할 때도 있지만.
그렇다면 언제나 옵션이 이 두 가지밖에 없는 걸까? 아니다. 아니라고 나는 믿고 싶다. 세 번째, 네 번째 옵션도 있다고 믿고 싶다. 그런데 과연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사람과 아직 건너지 못한 사람 사이의 소통이 서로를 존중하고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며 서로 진정성을 느끼는 동시에 건강할 수도 있을까? 인간관계가 힘든 것은 솔직히 이것 때문 아닌가.
생각해 보면 강을 건넌 사람이 건너지 못한 사람을 계몽시킨답시고 선동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고, 거기에 대항하여 강을 건너지 못한 사람이 건넌 사람을 잘난 척한다거나, 뭐 그렇게 특별나게 구냐고 구박하거나, 저 사람은 우리완 달라,라고 하면서 낙인을 찍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일반적으로 강을 건넌 사람보다 건너지 않은 사람 수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건넌 사람은 배제되고 소외되기 쉽다. 그러다가 내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두 부류는 단절되거나 형식적인 관계 유지로 끝나게 된다. 다시 말해, 두 부류 간의 진정한 소통은 쉽지 않은 것이다.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사람이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문제가 해결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니, 돌아갈 수는 없더라도 강을 건너지 않았을 때의 기억을 되살려 아직 건너지 못한 사람들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그들의 사정을 헤아리는 마음으로 그들을 대하면 어느 정도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지만 이런 경우에서조차 진정한 소통이라고는 할 수 없는 관계가 될 확률이 높다. 특히나 강을 건넌 사람이 마음의 여유가 없거나 그날 기분이 좋지 않을 경우엔 더욱더. 수평적인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강을 건넌 사람이 늘 뭔가 들어주고 받아준다는 식으로 해야 관계가 유지된다면 이는 오래갈 수 없다. 자명한 사실이다.
반대로 강을 건너지 못한 사람이 강을 건넌 소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강 건너의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 강 건너기를 다짐하거나, 건너지 않기로 결정한다고 해도 강의 존재를 알기 전의 자신의 상태를 절대화하지 않고 언제나 소수인 강 건넌 사람들을 존중하며 대하는 방식도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강 건넌 사람 역시 강 건너기 전의 상태가 낙후되었다거나 악하다거나 무지하다거나 하는 생각을 삼가고, 강을 건너기 전의 세상도 나름대로의 유익이 있음을 인정하고 수평적으로 여기는 방식이 따라준다면 더할 나위 없지 않을까. 즉 서로가 서로의 존재와 세상을 인정하고 상생하는 방식으로 나아간다면 진정한 소통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그러나 많은 경우, 강을 건넌 사람은 건너지 못한 사람들을 향해 우월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건너지 못한 사람은 건넌 사람을 이단아 취급을 하거나 소수라는 이유로 무시하거나 배제시키려고 한다. 나는 이런 현실이 안타깝다. 정말 안타깝다. 특히 나는 주로 강을 건넌 부류에 속하는 경우가 많아 대다수의 강을 건너지 못한 사람들과의 원만한 소통이 주는 가벼움에 아쉬울 때가 많아서 더욱더 안타깝다.
'in monologue'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진짜 비극 (0) | 2026.03.24 |
|---|---|
| 버려라. 취하기 전에. 변화하고 싶으면. (0) | 2026.03.19 |
| 달리기, 잠 그리고 감사 (0) | 2026.03.18 |
| 안주는 안전하지 않다 (0) | 2026.03.16 |
| 사소한 것들 (0) | 2026.03.15 |
- Total
- Today
- Yesterda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