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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혈관이 되어준 책
화창한 날이 다른 곳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여기, 캘리포니아에는 "희망의 도시 (City of Hope)"라는 이름의 병원이 있다. 이름이 주는 이미지와는 달리 이 '희망의 도시'에는 희망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없다. 대신 여기는 그런 희망이 간절하게 필요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곳이다. 그렇다. 내가 일하고 있는 City of Hope는 암 전문 병원이다.
내가 매일 복도에서 무심코 지나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음에 임박한 이들이 많다. 커피를 마시러 스타벅스에 가는 그 짧은 거리에도 매일 난 기쁨이 사라져 버린듯한 회색 빛의 앙상한 얼굴들을 만난다. 많은 이들이 모자를 눌러쓰고 있지만, 그 모자로부터 삐져나온 머리카락은 보이질 않는다. 너무 말라 골격의 구조까지도 쉽게 가늠할 수 있는 사람들도 많다. 내가 그들을 스칠 때 풍겨오는 병원 냄새는 그들의 고독이자 슬픔인 것만 같다.
어쩌다 나와 눈이 마주쳐 그들이 잠시 짓는 의례적인 눈웃음에서조차 난 내 안에서 커다란 안타까움이 밀려옴을 느낀다. 때론 그 웃음엔 슬픔만이 아닌 조소도 담겨 있는 것만 같다. 내가 그들을 공감하지 못함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 같다. 난 그들과 같은 캠퍼스 안에서 암 치료를 한답시고 기초과학자로서 일하고 있지만, 아! 과연 내가 그들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정도는 얼마나 될까? 나는 정말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오늘도 일터를 향하는 것일까? 약자의 아픔과 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이기적이고 기계적으로 실험대에 또 서고 있는 건 아닐까? 그저 밥벌이로써, 아니면 그저 소명의식으로써,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해 오늘도 땀을 흘리고 있는 건 아닐까? 도대체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하여 이 곳에 있는 것일까?
언젠가 김근주 교수는 '여호와의 공의 (체다카)'를 설명할 때 '공감'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적이 있다.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으로 죄가 시작되었던 창세기 3장에서 바벨탑 사건이 나오는 11장까지 끝이 나고, 창세기 12장에서 비로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신다. 만민에게 전할 복, 복음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을 창세기 18장 19절에서 여호와의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그 중 여호와의 공의를 공감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때, 나는 현재 내 이기적인 모습을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으며, 나의 정체성과 사명에 대해, 그리고 미래의 소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크리스토퍼 라이트도 그의 책 ‘하나님백성의 선교’에서 질문한다.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하여 이 곳에 있는가?” 우리는 제사장 나라로 부름받았던 이스라엘처럼 영적 이스라엘로써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통로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므로 우리 역시 거룩해야만 한다.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과는 다른, 구별된 존재로써, 비록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으로 이 땅을 살아가지만, 빛과 소금으로써 이 세상을 변화시키며 여호와의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것이 나의 정체성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통찰도 한계가 있었다. 신학책을 읽고 큰 울림으로 가슴을 치며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다 하더라도, 실제 나의 일상에서, 내가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일터에서 그것을 살아내지 못한다면, 울리는 꽹과리처럼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머리와 가슴으로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의 생명력은 땅 밑에 있는 뿌리로 하여금 대지를 뚫고 나와 싹을 틔울 때 비로소 세상에 보여지는 것이다. 뿌리 역시 생명이지만, 복음이 만민을 위해 존재할 때 본질적으로 복음을 전해야 하는 하나님백성은 세상에 보여져야만 한다. 즉 머리와 가슴에서 넘쳐나는 그 뜨거운 피는 혈관을 타고 반드시 손과 발로 전달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늘 우린 괴리감으로 인하여 이중적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여러 책을 읽어나가던 중 새물결플러스에서 출판한 이철규 원장의 책, ‘오늘을 그날처럼’을 만나게 된 것은 내겐 정말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일면식도 없었던 이철규 원장의 책은 페이스북에서 만난 새물결플러스의 신간 소식에서부터 나의 관심을 강하게 끌었다. ‘일터신앙’이라는 단어를 본 순간 마치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순간 정지되는듯한 느낌이었다. 평소에 늘 고민하던 문제에 대한 해답이 들어있을 것 같은 생각이 강렬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이라 어쩔 수 없이 온라인 서점에서 구매를 해야 하고 국내에서보다 배송 기간도 길기 때문에 출간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루라도 빨리 책을 읽기 위해서였다. 결국 주문을 했고 일주일 정도 뒤에 내 손에 책이 들어왔다. 기뻤다. 나는 감히 이것을 성령의 인도라고 부르고, 또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다. 이 책은 내게 있어 머리와 가슴이 손발과 따로 노는 이중적인 삶에서 오는 불쾌하고도 비밀스러운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받을 수 있는 통로가 되어주었다.
알고보니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신앙과 삶의 일치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이 허다하게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들 나처럼 고전하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신앙과 삶의 불일치를 살아가는 일터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이 결코 그것을 비밀로 지속해서 간직하거나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음도 알게 되었다. 오히려 우린 교회 공동체에서 그것을 숨김없이 나눠야 한다.또한 이 책을 통해, 여전히 불일치의 삶을 살아가지만 일치의 삶을 소망하며 하루하루 고전분투하는 삶이야말로 대다수의 그리스도인이 현장에서 겪고 있는 적나라한 삶의 모습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가 잘못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책을 곱씹으며 천천히 읽어나가면서 내게 먼저 찾아온 것은 죄책감으로부터의 해방감이었다. 그러나 이 책이 선사해 준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 책은 내가 늘 가지고 있었던 정체성과 사명, 그리고 소망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내 일터 현장에 맞는 답을 손에 잡힐 정도로 실제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이 책을 관통하는 큰 물줄기가 있다면 그것은 저자의 신학적 배경의 중추를 이루는 종말론적 삶과 신앙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미래적 관점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것, 즉 오늘 나의 일상적 삶이 곧 완성될 하나님나라에 속함을 드러내는 것이 되는 것이다. 오늘 나의 삶은 더 이상 소비적인 개념에 머물 수 없었다. 머리와 가슴으로 내가 깨달은 하나님백성,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과 함께, 여호와의 공의와 정의를 행하며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는 깨달음이 드디어 나의 일상적인 세세한 부분까지 침투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뜨거워졌던 머리와 가슴으로부터 차가웠던 손발로 온기가 전달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책은 내게 있어 그 따뜻한 피를 전달해 준 혈관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삶의 예배와 일상의 거룩함은 주일 예배나 수요 예배, 금요 철야와 같은 공예배의 연장선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개개인의 삶의 현장에 침투하여 일터신앙이라는 모습으로 이루고 있는 작은 하나님나라에도 있을 것이라 믿는다. 내게 있어 복음이란 늘 사적인 영역에 속하는 은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철규 원장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은 나의 현장에도 동일하게 찾아오신다는 사실과, 그렇게 찾아오시는 이유는 결코 나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로 하여금 여호와의 공의와 정의를 올바르게 행하게 하려 함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복음이 사적인 영역에만 머문다면, 그것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과 하등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복음은 공공성을 띠어야만 하고, 그렇게 될 때 복음이 복음다워진다고 믿는다. 그 과정의 일환으로 종말론적 삶과 신앙의 자세가 일터신앙으로 침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침투된 작은 현장 중 하나가 바로 나의 일터라고 생각한다. 나는 오늘도 이 사실을 되새기며 일터로 향한다. 신앙과 일치된 삶을 위하여, 오늘을 그냥 흘려보낼 또 하나의 하루로 방치하지 않고 마치 오늘을 두 번 사는 것처럼 소중히 살아갈테다. 마음의 성실함과 손의 공교함을 가지고 현장 한 가운데서 복음의 빛을 밝힐테다. 힘들다고 도망가지 않고, 그곳이 바로 빛과 소금이 필요한 곳임을 인지한 채, 바로 그 곳에서 나를 통해 하나님나라가 드러나게 하겠다. 그리고 다양하고 다채로운 일터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인 우리 모두가 제 2의 이철규 원장이 되어 오늘을 그날처럼 살아내는 하나님백성이 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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