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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고 온전한 사랑이란?
앙드레 지드의 ‘전원교향곡’을 읽고.
제르트뤼드가 눈을 떴을 때, 그녀가 본 것은 ‘죄’였다. “소경이었으면 죄 없으리라”는 예수의 말씀에 정확하게 역행하는 것이었다. 성인이 되어서야 그 동안 말로만 듣고 상상만 했던 아름다운 세상을 자신의 두 눈으로 처음 볼 수 있게 된 그 날, 그녀가 선택했던 것은 다름 아닌 자살 시도였다. 그리고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앙드레 지드의 ‘전원교향곡’의 절정 부분과, 해소의 과정도 없이 갑작스러우리만큼 빠르게 진행되었던 결말 부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 책은 스위스 알프스 산맥 자락에 위치한 어느 한 시골의 목사가 일기 형식으로 담담하게 자신에게 있었던 심리 변화를 기록한, 일인칭 주인공 시점의, 비교적 짧은 중편 소설이다. 사건은 어느 날 한 심부름하는 아이가 목사를 찾아오면서부터 시작된다. 그 아이는 목사가 어릴적 가 보고 한 동안 잊고 있었던 장소에 위치한 어느 집으로 안내했다. 그 안에는 죽음을 맞이한 노파가 있었고, 그 노파의 유일한 혈육인, 앞을 보지 못하는 열댓 살의 한 소녀가 벽난로 근처에서 몸을 구부리고 있었다. 죽은 노파는 말을 못하는 사람이었기에 그 소녀는 먹을 것만을 공급받으며 말도 배우지 못한 채 그렇게 살아왔다. 그리고 노파의 죽음으로 인하여 이제 그 최소한의 돌봄마저 끊길 판이었던 것이다. 하늘의 계시처럼 긍휼의 마음이 목사에게 찾아왔고, 목사는 그 아이를 집으로 데려간다.
목사 부부에게는 이미 아이가 넷이나 있었다. 결코 긍정적이지 않을 아내의 반응까지도 예측했으나, 목사는 데리고 온 소녀를 집에서 키우기로 결정한다. 제르트뤼드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친구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인내를 시험하며 헌신적으로 그녀에게 말과 글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의 끝이 보이지 않았던 헌신의 결과가 끝내 그녀에게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시종일관 무표정하기만 했던 제르트뤼드의 얼굴에서 마침내 웃음을 발견할 수 있었고, 동시에 드디어 말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이후, 목사가 가르치는 속도가 무색하리만큼 제르트뤼드의 발전 속도는 빨랐으며, 그녀는 생각과 의사 표현조차 너무나 솔직하고 논리적으로 잘 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이 모든 것은 아내의 관점에서는 못마땅한 일이었다. 친 자식이 넷이나 있었음에도 목사는 제르트뤼드에게 헌신하는만큼 아이들에게 시간과 사랑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목사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는 기쁨을 아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생각하며, 자신의 제르트뤼드에 대한 모든 사랑과 헌신을 거룩하게 합리화한다. 그러던 어느 날 둘만의 산책에서 제르트뤼드의 고백을 듣게 된다. “사랑해요 목사님.”
그 고백을 듣고 나서도 목사는 그 ‘사랑’의 의미를 자신의 거룩한 합리화에 맞춰 이해했고, 그래서 그의 일기에 은혜와 사랑으로 충만한 글을 썼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커질대로 커진 문제의 한 면만을 본 채 목사 혼자만의 거룩함에 휩싸여 있던 것이었으며, 끝내 제르트뤼드의 죽음을 막지 못했던, 재앙이 수면 위로 올라온 순간이었다.
내게도 아름답게만 느껴졌던 제르트뤼드는 그렇게 죽음을 선택했다. 자신이 목사의 아내가 받았어야 마땅했던 모든 사랑을 중간에서 낚아챈 것만 같은 생각이, 눈을 뜨고 나서 목사의 아내 얼굴을 보았을 때, 들게 된 것이었다. 그녀는 거기서 자신의 죄를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목사가 자기에게 주었던 그 헌신적인 사랑이 거룩하지만은 않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눈이 보이지 않았을 땐 남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눈이 뜨여졌을 때, 비로소 자신의 사랑했음과 사랑받음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그 사랑의 결핍을 맞이했던 타인이 보였던 것이다. 그녀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 자신만 사라지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진정 사랑했던 남자는 목사가 아니라 목사의 아들이었다고 했다. 눈이 보이지 않았을 때 상상했었던 목사의 얼굴은 바로 자크였던 것이다 (이미 목사의 아들, 자크는 제르트뤼드에게 사랑에 빠졌었지만, 목사에 의해, 목사의 그 혼자 거룩했던 잣대에 의해 제르트뤼드와의 사랑을 포기해야만 했었다). 또한 이 비극적인 사랑의 끝은 종교적인 실패를 가져왔다. 제르트뤼드는 죽기 전 이미 자크와 함께 카톨릭으로 개종했으며, 거룩함으로 일관했던 목사는 일기의 마지막에 자기의 마음은 사막보다 메말라 기도도 할 수 없는 상태에 다다랐음을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거룩함의 의미도 함께 생각해 본다. 목사의 사랑은 과연 누구를 위한 사랑이었던가.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은 기쁨으로 시작했던 목사가 결국 진행하여 다다른 종착지는 파멸이었다. 결국 그 찾은 양을 다시, 그리고 이번엔 영원히 잃어버리게 되는 상황을 연출하게 된 것이었기 때문이고, 또한 남은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돌볼 마음까지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되찾은 영혼을 사랑하되, 그 사랑은 그 한 영혼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 사랑은 모든 영혼을 위한 것이어야 했다. 백 마리의 양이 온전할 수 있는 사랑이 바로 거룩하고 온전한 사랑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살아남아 파멸에 이른 그 목사의 상실감도 그렇지만, 오늘 밤, 그렇게 죽어간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 제르트뤼드가 난 마음에 계속 걸린다. 아! 그녀가 눈을 떴을 때, 얼마나 내 심장이 요동쳤었던가!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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