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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onologue

교만

가난한선비/과학자 2018. 5. 8. 03:54

교만.


A와 B는 동창이다. 동고동락하며 입시를 준비했다. 결과가 나왔다. A는 합격, B는 불합격. 그리고 하루 뒤, B는 2차로 지원했던 곳에서 합격 통지를 받았다. B는 이 사실이 기쁘지도 않았고, A를 전심으로 축하해 줄 수도 없었다. 여기까진 괜찮다.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후에 생긴다. 이 현상 또한, 안타깝지만, 드물진 않다.


A는 B의 불합격에 마음이 많이 쓰였다. 진심으로 자기를 축하해주지 못하는 B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했다. 입장 바뀌면 자기 또한 그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A는 혼자 합격한 사실이 B를 생각하면 전혀 기쁘지 않았다.


한편, B는 2차 합격한 곳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점점 A를 멀리 하기 시작했다. A는 B의 마음을 이해해주며 예전처럼 살갑게 다가가는데, B는 도저히 예전처럼 A를 대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려니 했지만, 시간을 변명거리로 삼을 땐 언제나 그 시간이 지나고나면 갑절 이상의 노력을 기울여야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법, 시간은 둘 사이의 멀어진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A는 안타까웠다. 그러나 스스로 멀어진 B에게 뭐라고 요구할 수도 없었다.


자, 여기서 교만한 자는 누구일까? 교만이라고 하면 와닿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이렇게 물어보겠다. 둘 중 열등감에 빠진 자는 누구일까? 이번엔 쉽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B이다. 그러나 두 질문은 같다. 열등감 역시 그 뿌리는 교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질문이 다르게 여겨진 건, 우리들이 교만을 항상 어떤 일에 성공한 자에게서만 찾기 때문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 교만은 성공을 기반으로 하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실패를 기반으로 하지도 않는다. 교만의 기반은 인간 그 자체다. 우린 인간이기 때문에 교만한 것이다. 성공과 실패는 내재되어 보통은 드러나지 않는 교만을 밖으로 꺼집어내는 문이 될 뿐이다. 위의 예에서 B는 입시 불합격이라는 문을 통해서, 그의 안에 내재된 교만이 열등감으로 드러난 경우가 되겠다.


여기서 재밌는 사실이 하나 있다. 우월감으로 자신의 교만을 드러낸 자보다 열등감으로 자신의 교만을 드러낸 자가 더 위험한 정신적 혹은 영적 상태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열등감으로 교만을 드러낸 자의 경우 보통은 자신이 교만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자기가 교만할 수 있냐고 펄쩍 뛰면서, 전적으로 부정한다. 이것은 우리가 앞서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을 다르게 느꼈던 이유와도 같다. 교만을 패자나 실패자에게서 아닌, 승자나 성공자에게서만 찾는 우리의 선입관이다. 또한 이들은 주위에서부터 주로 시기와 질투 보다는 동정이나 위로를 받는 편이기에, 이들의 교만은 공개적으로도 쉽게 가려지곤 한다. 약자 연대 역시 이들의 교만을 부추기는 역할을 뜻하지 않게 하게 된다.


열등감은 교만의 다른 모습일 뿐, 승자의 잘난 척이나 자기자랑과 다를 바 없다. 자기중심적인 핵심은 같다. 차라리 승자의 교만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혹독하게 혼자이기 때문이다. 물론 스스로 강한 자기 합리화의 굴레 속에 갇혀 있긴 하지만, 적어도 수동적인 태도로 교만을 타인에 의해서 보호받진 않기 때문이다. 승자의 교만은 강한 자가추진력이 필요하며, 시간이 가면서 스스로 고갈되는 반면, 패자나 약자의 교만은 가만히 있어도 그 교만은 끈질기게 유지되는 면이 있다.


강하거나 약하거나, 승리했거나 패했거나, 성공했거나 실패했거나... 아무 상관 없다. 교만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 어떤 옷을 입고도 삐져나올 수 있다. 진정한 영성은 그 어떤 컨텍스트에서도 교만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그 어떤 상태에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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