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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onologue

길 위에서

가난한선비/과학자 2018. 8. 6. 14:20


길 위에서.


돈을 벌기 위해 일한다고 하면, 어떻게 돈이 삶의 목적이나 이유가 될 수 있냐며 발끈하곤 했던 시절이 있었다. 속으로는 그들을 속물이라 치부하며 맘껏 조롱하기도 했다. 동시에 나는 넓은 길로 인도하는 속세의 유혹을 과감하게 뿌리치며, 애써 지고지순한 좁은 길을 고집하는 장인이자 고결한 학자여야 했다. 내 앞엔 반드시 오래 참음의 풍성한 열매가 기다리고 있어야 했고, 유혹에서 이겨낸 만큼의 합당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시간이 흐르고 가정을 가지면서 생각과 관점이 서서히 바뀌었다. 비로소, ‘넌 돈을 못 벌어도 일을 지속할 수 있겠냐?’는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질문을 스스로 하기에 이르렀다.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할 수 없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현실을 고려하는 것이 결코 꿈을 포기한다는 증거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그것이 허황된 꿈이 아닌 바른 꿈을 가지고, 허공에 발을 디디는 것이 아니라 땅에 발을 붙이고 살며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을 구하고 얻을 수 있는 길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렇다. 나는 돈을 위해 일을 하진 않지만,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한다. 이를 더 이상 부인하지 않는다. 돈은 내가 일하는, 유일하진 않지만 아주 중요한 이유가 된다. 


원래 내가 가졌던 옛 관점이라면, 난 결국은 속세의 유혹에 넘어가, 악마가 인도하는 넓은 길로 들어선 꼴이 된다. 기어이 배교한 신자요, 약해빠진 인간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난 유혹에 넘어간 게 아니라, 감고 있었던 눈을 이제서야 뜬 것이고, 무시하고 배척하려 했던 중요한 사실들을 내 삶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기에 이른 것이다. 난 배교한 신자가 아니라 성숙한 구도자로 진화한 것이며, 약해빠진 게 아니라 더 낮고 겸손한 마음을 가진 인간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하고 싶은 일에 몸을 담으며 십 수년을 살아왔다. 들인 공에 비해 돌아오는 보상과 대우가 다른 직업군에 비해 현저히 적은 생물학과 포닥 생활을 해왔던 나에게는, 반드시 내가 걷고 있는 이 아카데믹 커리어가 다른 길에 비해 더 숭고한 길이어야 했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가질 수 있었던 유일한 우월감이었을지도 모른다. 길을 함께 떠났던 동료들이 도중에 하나 둘 아카데믹 커리어에서 이탈하거나 중도 포기할 때조차도, 난 그들을 속으론 측은하게 여기는 교만함으로 똘똘 뭉쳐있었다. 난 생존자였고 영광의 면류관은 내 차지가 될 가능성이 더 높아지는 것이었다. 


관점이 바뀐 지금의 내 눈에는 정말 어처구니 없고 말도 안 되는 억지 논리에 불과하다. 가엾게까지 느껴질 정도다. 나란 인간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교만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면, 저 따위의 생각에 십 수년을 바칠 수 있었을까 싶다. 하지만, 어쨌거나 저 멍텅구리가 바로 나다. 과거를 돌릴 수도 다시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니, 후회하고 자책한다고 해서 좋을 건 없다.


여러 차례 비슷한 뉘앙스를 풍겼지만, 아카데믹 커리어가 내겐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다. 내가 얼마나 가련할 정도로 무식했었는지를 요즘 점점 더 깨닫게 된다. 이젠 몸이 기억할 정도로 실험은 거의 완벽하게 성공해내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몸과 마음이 분리된 상태에선 그런 성공조차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기쁨을 주지 못하는 성공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1-2년 안에 현재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들을 잘 마무리하자고 스스로에게 매일 다짐하면서도 일이 잘 진척이 되지 않을 때면 예전보다 더 자주 환멸을 느낀다. 그러나 아카데믹 커리어가 아닌 다른 다양한 루트들로 진입한다 해도 내가 먼저 얻어야 할 것은 '유종의 미'라고 믿는다. 마무리가 쉬울 거라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예측했다 하더라도 힘든 길 위에 서있으면 힘든 법이다. 또 다시 난 그 도상에 서있을 뿐이다. 끝내려는 마음이 이 길 위에 서있는 내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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