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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
중학교 2학년 어느 날이었다. 자주 그랬듯 난 방과 후 컴컴한 방 한 구석에 놓인 책상에서 백열등이 달린 스탠드만 켜놓고 빨간색 표지의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을 읽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난 추리소설에 한동안 푹 빠져 살았다. 밤낮 가리지 않고 읽어댔다.
다음 날 아침 갑자기 눈이 잘 안 보이는 것이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처음엔 하루 아침에 시력이 이렇게 갑자기 떨어질 수 없다는 생각에 조금 지나면 괜찮아지겠거니 하며 며칠을 보냈다. 그런데 나아지지 않았고 책을 읽는데 방해가 되었다. 돈이 별로 없어 그때까지만 해도 푸세식 셋집에서 살던 우리집 형편에 안경을 맞춰달라고 부모님께 말씀드리기가 죄송스러워서 그냥 참으려고 했지만, 도저히 그럴수가 없었다. 무식하게 그냥 놔뒀다간 걷잡을 수 없이 더 나빠질 수도 있을 것 같았고, 그랬다간 더 큰 돈이 들어갈 상황이 충분히 생길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까지 미치자, 조심스럽게 부모님께 안경을 맞춰야겠다고 말씀드렸다. 부모님 얼굴에서 약간의 걱정스런 표정이 스쳤지만 나를 동네 안경점에 데리고 가셨다. 그리고 나는 그날 우리집에서 첫 안경잡이가 되었다.
1991년에 안경을 쓰기 시작했으니 지금까지 28년째 안경을 쓰고 있는 셈이다. 내 인생의 거의 4분의 3 정도의 시간을 난 안경과 함께 살아왔다.
그동안 수십 개의 안경이 나를 지나쳐갔다. 눈은 점점 조금씩 나빠졌고 아마 고등학교 2학년 무렵, 그러니까 나의 성장이 멈췄을 때 시력도 거의 고정되었다. 나이가 들며 근시안은 거의 나빠지지 않았지만 난시가 조금씩 더 생겨났을 뿐이다.
두 주전 미국에서 처음으로 안경을 맞췄다. 한국과는 달리 안경을 맞추는데 수백달러가 들거라는 주변에서 들려오는 얘기에 겁을 잔뜩 먹고 있었기 때문에 안경은 한국에 방문할 때나 맞추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여분의 안경이 부서지는 일이 몇 달 전 생겼고 내게 남은 건 쓰고있는 안경밖엔 없었다. 이것마저 부서지면 난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나가 더 필요한 상황에 처한 것이었다.
H마트에서 쇼핑도 할 겸, 설빙과 알라딘 중고서점을 즐길 겸해서 엘에이에 위치한 마당몰에 들렸었다. 거기에 마침 안경점이 하나 있었는데, 미국에 있을 뿐 미국 안경점이 아니라 완전 한국 안경점이었다. 가격이나 시스템이 한국과 똑같았다. 9월 한 달간 세일도 한다고 했고, 아내도 안경이 필요하다고 해서 들어가보았다.
그리고 아내와 나 둘 다 하나씩 맞췄다. 내 것은 모두 합하여 백 달러였고, 아내 건 선글라스 겸용 렌즈와 좀 이름있는 테를 하느라 내 것의 두 배였다. 삼 백달러로 우리 둘은 아주 흡족했다. 엘에이라 가능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미국 안경점에 대한 나의 선입견은 과감하게 깨지는 날이기도 했다.
아래 사진은 내가 새로 맞추고 쓰고 다니는 안경이다. 이걸 쓴 지 일주일이 다 되어가는데, 지금까지 안경이 바뀐 걸 알아보는 사람은 딱 두 명밖에 없었다 (독서모임 사람들도, 연구소 사람들도 모두 못알아봤다. 교회에서 단 두 명만이 알아봐줬다). 내가 볼 땐 예전에 쓰던 네모낳게 각진 테완 달리 둥그래서 많이 다른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은가보다. 약간의 실망감도 들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게 더 낫다는 생각이다. 처음으로 둥그런 테를 맞춰본 것인데, 은근 맘에 든다. 각진 인생이 아닌 둥그런 인생을 살고 싶은 내 마음이 담겨있어서 그런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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