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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onologue

추억

가난한선비/과학자 2019. 2. 20. 01:59


추억.


일주일에 용돈 오백원 하던 시절, 꼬박꼬박 돈을 모아 부푼 가슴을 안고 늘 달려갔던 곳은 동네 슈퍼마켓도 만화방도 아니었다. 주머니를 빵빵하게 동전으로 채우고 내가 향한 곳은 헌책방과 레코드집 (카세트 테이프나 시디를 팔던 곳, 가끔 악기를 같이 파는 곳도 있었다)이었다. 헌책방에서는 주로 아가사 크리스티의 빨간색 커버로 된 추리소설을 찾았고, 레코드집에서는 숨을 죽이며 노란색 커버로 된 클래식 카세트 테이프 하나를 골랐다. 추리소설과 클래식 음악. 이 기이한 조합이 나의 중학교 시절이었다.


오케스트라나 현악 삼사중주로 구성된 클래식 음악, 피아노 독주나 콘체르토, 혹은 첼로 독주곡이나 협주곡을 난 좋아했다. 전문적인 지식 없이 그냥 느낌에 끌려 클래식 음악을 주먹구구식으로 접했던 시기였기에 내가 남다른 귀를 가지고 있거나 독특한 취미를 가졌던 건 아니었다. 내겐 아무런 음악적 배경도 없었다. 사실 돌이켜보면 나도 왜 그때 그런 음악을 좋아했는지 정확히 이유를 알 수는 없다. 하지만 클래식 음악이 책과 함께 혼자 있는 시간을 좀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던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학교 음악 시간에 배웠던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슈베르트나 쇼팽도 들었지만, 난 더 이전 음악이 좋았다. 바흐와 비발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뭔가 내게 좀 맞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틀에 박히고 고리타분하고 창조성이 없다고 치부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난 그런 정형화된, 다시 말해 교과서처럼 짜임새가 있어 하나의 완전함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음악이 좋았다. 그러면 혼자 있을 때의 시간이 안전하게 느껴졌고 외롭지 않았다. 오히려 많은 사람과 웃고 떠들 때보다 풍요롭고 즐거웠을 만큼.


고독을 즐기고 싶다면 침묵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침묵은 나의 침묵이지 배경의 침묵이 아니다. 주위가 온통 적막한 상황에서는 오히려 고독을 즐길 수 없다. 재미있게도, 언제나 고독은 적당한 소음이 배경음악으로 있어야 한다. 단, 그 배경음악은 침묵을 방해하지 않아야 한다. 이를테면, 자연의 소리나 클래식 음악 같은.


작은 것들에 주목하고 귀 기울이게 도와주면서, 영감을 떠오르게 만들어주는 그런 소리. 세상을 감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나를 통해 여과된 세상을 표현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드는 소리. 혼자이지만 외롭지 않고 오히려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 되어 세상을 받아들이고 그 일부가 되어가도록 돕는 소리. 그럴 때면 난 시인이 되어보기도 하고 음악가가 되어보기도 하며 마음껏 공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었다.


헤세와 지드를 읽고 카뮈와 지브란을 읽으며 그때 난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그렇게 써대던 일기장엔 무슨 내용을 남겼을까? 대학생 시절 혼자 아파치 서버를 돌리며 개인 홈페이지를 만들어 올려대던 글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언제 그것들을 다시 방문할 수 있을까? 추억 돋는 밤이다. 바람이 차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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