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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onologue

빠름이 아닌 풍성함

가난한선비/과학자 2019. 2. 20. 01:57


빠름이 아닌 풍성함.


오늘은 역사와 역사가에 대해서, 그리고 그 해석에 대해서 같은 책을 읽고 각자의 다양한 생각과 느낌을 나누었다. 모임과 모임 후 뒤풀이에서 나누었던 다방면을 아우르는 풍성한 대화는 내겐 내면세계 성장의 자양분이 된다. 같은 직업이 한 명도 없는 독서모임에서의 적극적이고 진지하고 솔직한 나눔은 언제나 신선한 자극이 된다.


한때는 같은 분야 안에서 같은 수준이라 여기는 소수의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모임을 추구했었다. 그것을 특권이라 여겼고, 난 당연히 그것을 누려야만 한다고 믿었다. 말로는 다양성을 존중한다고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허세에 불과했다. 학식에 교양까지 갖춘 고급 인력으로 보이기 위해선 옹졸하게 보이는 것만큼은 피해야 했기 때문이다. 다양성 존중도 결국 나를 위해서였다.


역사에는 ‘만약’이 존재하지 않지만, 내가 만약 이삼십대 때 이런 다방면의 사람들과 함께 책과 일상을 나누었었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상상해봤다. 백이면 백, 지금보단 더 성숙하고 더 넓고 깊은 사람이 되어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란 인간은 언제나 지나고 나서야 뒤늦게 깨닫는 존재인가보다. 그땐, 풍성함은 배짱이가 기타나 튕기고 있듯, 시간이 남아도는 인간이나 하는 짓거리에 불과하다고 믿었다. 그런 걸 할 시간에 논문이나 하나 더 읽던지, 실험이나 하나 더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쓴웃음이 지어지지만, 그때 그렇게 한 면만 뚫어지게 쳐다보는 편협한 시선으로 저 높은 곳에 오르고자 고군분투했던 나의 옹졸함을 떠올리면 이젠 정말 몸서리쳐진다. 게다가 나의 소중한 일상을 그런 식으로 탕진했다는 생각에 이르면 분노가 생길 정도로 아쉬운 마음이 정말 크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선택하고 믿어왔던 삶에 대해 손해만 봤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다만 인생의 낮은 곳도 지나보고 나이도 마흔을 넘기고 이제 십대에 접어든 아이도 키워놓고 보니, 더 중요한 가치는 빠름보단 풍성함인 것 같다는 결론을 냐리게 됐다. 출세가 인생의 목적이라 여겼던, 그 불온한 사상은 그저 역사를 단선적으로 봤던 사람의 관점과 다르지 않다. 진화는 무작위적이다. 그 말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인생이 흘러갈 수 있다는 뜻이다. 언제나 이해할 수 있는 일들만 생기지 않는다. 언제나 감당할 만한 일들만 생기지 않는다. 이해하지 못해도, 혼자 감당하지 못해도 우리에게 상실과 고통까지 줄지도 모르는 그런 일들과 함께 일상을 살아내는 힘의 무게중심은 아무래도 빠름이 아닌 풍성함에 있다고 믿는다.


그나마 인생의 후반전을 시작하며 이런 삶을 살게된 것에 감사한다. 특정한 목적과 방향성을 지니지 않는 진화는 내 삶에서도 계속 진행 중이다. 이 길에 그분과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 밤 내 마음을 충만하게 채운다.


**사진은 간만에 맑은 날, 독서모임 가는 길에서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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