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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지만 나는 환대로 정의를 노래하련다."

강남순 저, ‘정의를 위하여’를 읽고.

“All are welcome.”
“모든 사람을 (혹은 누구나) 환영합니다.”

나도 인간이다. 그래서 위의 문장 속 ‘모든 사람’ 혹은 ‘누구나’에 포함될 게 분명하다. 그런데 왜 난 이 당연한 말을 듣게 될 때면 (특별히 교회 안에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걸까? 마치 환영 받길 기다렸다는 것처럼. 마치 그 동안은 환영 받지 못했던 것처럼.

아마도 사적인 감정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개인적인 모든 것은 정치적’이라는 말에서처럼,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내가 속한 시대와 장소, 그리고 그것들을 빼곡히 이루고 있는 인간들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사적인 감정뿐만이 아닌 구조적인 무언가가 내 가슴을 터치했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환영 받는다는 말에 눈시울이 붉어질 만큼 내 가슴이 뜨거워졌던 건 비단 환영 받고 싶은 나의 바람뿐 아니라, (정확히 그것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 공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환영 받지 못한, 이 세상 모든 곳에 흩어진, 억눌리고 소외 받고 외면 당한, 혐오와 배제의 타깃이 되어 차별의 억압적 폭력에 암묵적으로 시달린 모든 약자들에 대한 공감과 연민이 내 속에서 작동했음이 틀림없다. 그렇다. 알고 보니 나는 개인이기 이전에 인간이었던 것이다.

인간은 결국 홀로 선 ‘단독자’, 즉 사적이며 고독한 존재라는, 엄연한 철학적 진실과 더불어, 자신이 공적인 존재라는 사회정치학적 의미까지 깨닫는 것은 어쩌면 과거로의 회귀일지도 모른다. 이미 낡아 폐기 처분되어 버렸다는 의미에서의 과거를 일컫는 게 아니다. 평화로운 질서의 나라에 죄가 들어와 선과 악의 개념까지도 사적인 수준으로 끌어내려진, 죄악과 불의가 가득한 세상으로부터 다시 죄 이전의 나라로 회귀하고 싶어하는 것은 그저 단순한 ‘복고’를 의미하진 않는다. 오히려 그건 모든 사람이 가져야 마땅할 소망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때의 회귀는 곧 ‘회복’이다. ‘사적인’ 색안경을 벗어버리고, ‘공적인’ 맨눈으로 자신은 물론 이웃과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그날, 나는 그날을 꿈꾼다. 그날이 오면, “All are welcome”이라는 문구에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모든 열방과 민족과 사람들이 이미 환영 받고 있어 ‘환영’이라는 말조차 퇴색되어 버렸을 테니까 말이다. 난 그렇게 오늘도 불가능성을 꿈꾼다.

저자 강남순의 글을 읽을 때면, 나도 모르게 끼고 있었던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매트릭스와도 같은, 혹은 월터 윙크가 간파했던 ‘사탄의 체제’와도 같은, 구조적인 악으로 인해 각인된) 폭력적이고 위계적이며, 나와 다른 모든 이를 타자화하며, 나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타자들을 수단화하는, 그리고 수만 겹이 있어 떼어도 떼어도 다 떼어낼 수 없을, ‘사적인’ 색안경의 존재를 깨닫게 되어 겸손해질 수밖에 없으며, 겨우 한 꺼풀 매트릭스 밖으로 나와서도 내가 저질렀던, 이미 붉게 물든 폭력의 잔재들을 그제서야 깨닫고 또 참회하게 된다. 인간이 인간임을 깨닫게 되고 생각이 깨이게 되며 눈이 열린다는 게 어찌 보면 참 아이러니한 일일 수도 있겠지만, 세상살이에서 메말라가고 점점 기계화되어 가는 내 가난한 심령을 비추어볼 때 이는 참으로 고마운 글이 아닐 수 없다.

‘정의를 위하여’라는 책에서 저자는 정의에 대한 정의를 함부로 내리거나, 경솔한 판단을 내려 대중들의 말초적인 감정을 자극하는 구호 따위를 외치지 않는다. 제목에서 자칫 느낄 수도 있는 선동적인 뉘앙스는 일체 찾을 수가 없다. 오히려 이 책은 정의가 무엇인지 묻고,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람들에 기반하여 스스로 사유하도록 유도하며, 비판적 성찰을 통해 치우치지 않는 분석과 더불어 정의 실현을 위한 대안을 진지하게 모색하게 만든다. 따라서 이 책을 읽고 나서, “정의를 위하여!” 라고 큰 소리로 일제히 외치며, 혹시라도 붉은 두건을 이마에 두르고 거리로 뛰쳐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진지하게 우리 자신의 모습과 타자와 세상을 함께 조화롭게 바라볼 수 있는 용기와, 또 그래야만 하는 이유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 책은 정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것만을 다루지는 않는다. 정의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시각이 형성될 수 있겠지만, 이 책에서 저자는 정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그보다 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는 ‘비판적 사유’의 필요성과 중요성, 그리고 비판적 사유가 멈추지 않고 전진해야 할 다음 단계인 ‘비판적 저항’이 무엇인지, 또한 그것이 가지는 측면을 네 가지로 분류하여 의미를 분석한다. 정의로운 정치를 위하여 정치적 저항을, 평등사회를 위하여 사회적 저항을, 연민의 종교를 위하여 종교적 저항을, 그리고 희망적인 삶을 위하여 윤리적 저항을 통해서 정의로운 세상을 소망하고 이루어내자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정의뿐 아니라 ‘보편적’ 인간의 범주로부터 배제되었던 ‘개별인’들로서의 다양한 인간들의 권리와 평등의 확장,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 확대까지 추구한다. 그리하여 인문학 정신에 충실하게 입각한 이 책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을 보다 정의로운 세상을 향한 여정으로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 오빠에서 청년 리더로, 그리고 중직자 추천까지 받았다가 지금은 가나안 성도의 한 부류에 합류한 일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한국의 여러 도시와 미국의 세 개의 다른 주에서 여러 교단을 경험하며 기독교 신앙의 여정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거쳐왔던 한 사람으로서, 내 마음 속에는 그 동안 조금씩 어떤 응어리가 쌓여왔었던 것 같다. 그 응어리의 많은 부분은 비기독교인이 기독교에 대하여 느낀다고 알려진 생각이나 감정과 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언젠가 스스로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다. 난 거룩함이 적대감으로 표출되는 것을 보았고, 순수함이 혐오감의 원인으로 작동하는 것을 보았으며, 구별됨이 배타적인 차별과 배제로 둔갑하는 것을 보았다. 물론 나도 피해자의 위치에만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피라미드의 시스템 안에서의 평화는 그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어야 하며, 이때 정의는 불의에 다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어느 날 무조건적인 환대를 접하게 되었을 때, 나의 온몸이 용솟음치는 심장이 된 듯, 가슴 저 깊은 곳에서부터 가장 말초의 피부에 이르기까지 소름이 돋을 정도로 뜨거운 눈물이 났던 것은.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의를 이루기 위한 헌신과 열정은 불의를 경험하는 타자의 고통을 함께하는 연민의 감정에서 출발한다." 또한 자크 데리다의 말을 빌어, "진정한 의미의 환대란 바로 그 타자들을 향한 연민, 그리고 그들의 존재를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환영하는 행위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의란 환대를 의미한다."라고 말을 맺는다.

평소에 가지고 있던 생각과 그 동안 겪어온 신앙 여정에서 받아온 상처가 한데 모여, 그렇지 않아도 내 안에서 갑갑한 우물을 만들고 있었는데,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내 안의 고인 우물에도 한 가닥 길이 난 것만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현실 가능성을 과학적으로 따져보자면, 여전히 누구에게도 확답을 줄 순 없을 것이다 (확답을 줄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인식론적 폭력일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에필로그에서 제안하듯, 그러한 불가능성의 영역에 존재하는 새로운 세계를 향한 '낮꿈 꾸기'를 해보며, 나는 무언가 돌파구를 하나 찾은 듯한 기분이다. 새로운 용기도 생겼다. 그래서,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환대로 정의를 노래할 것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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