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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와 새로운 시작.

무라카미 하루키 저,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고.

두 명의 여학생과 세 명의 남학생. 언뜻 봐도 짝이 맞지 않는다. 남학생 하나가 남기 떄문이다. 또 하나, 공교롭게도, 다섯 중 하나만 자신의 이름에 색이 없다. 나머지는 모두 이름에 색을 의미하는 단어가 들어있다. 레드, 블루, 화이트, 블랙. 그러나 그의 이름에만 색이 없다. 그의 이름은 다자키 쓰쿠루. 색채가 없는 이름이다. 운명이었을까. 대학에 진학할 무렵, 다섯 명 사이의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되고 유지되었던 도시 나고야를 떠나 그는 홀로 도쿄로 진학하게 된다. 그 결과, 나고야엔 다섯이 아닌, 넷이 남게 되었다. 그들이 대학교 2학년이 되기까진 공간만 떨어져있을 뿐 모든 게 똑같다고 여겨졌다. 방학 때 집으로 돌아오면 넷은 여느 때처럼 그를 반겨주었고, 마치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었던 것처럼 그들은 다시 다섯이 되었으며, 그래서 온전한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는 넷 중 하나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미안하지만 이제 더는 누구의 집에도 전화를 걸지 말았으면 좋겠어. 이렇게 되어 유감이야.” 그는 이유를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스스로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거라는 모호한 말밖에 없었다. 전화는 끊어졌고, 그 순간 하나와도 같았던 다섯은 넷과 하나로 분열됐다. 그리고 그 분열은 16년간 지속된다. 원인을 모른 채로. 아니, 원인을 알려고 하는 적극적인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로. 아니, 그런 시도조차 감히 할 수 없었던 채로.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중에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손에 집어 들었던 건, 어쩌면 내 몸이 보낸 절박한 STOP 사인에 반응한 나의 구체적인 행동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암묵적으로 내 몸이 보내온 일종의 신호를 나의 무의식이 해독한 뒤, 의식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곧장 나의 행동을 만들어낸 게 아니었을까.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기차의 엔진도 쉼이 필요하듯, 나의 머리와 나의 마음도 휴식을 취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누군가의 깊은 통찰로 인한 깨달음도 하루 이틀을 넘겨 지속적으로 반복되면 면역이 생기는 법이다. 인간의 익숙해짐이란 교활한 돼지와도 같아서 아무리 좋은 음식이 나와도 단 몇 차례면 그새 다시 새로운 영점을 가지게 되고, 더 좋은 음식을 탐하기 마련이다. 마치 한 번도 좋은 음식을 먹은 적이 없었던 것처럼, 감사함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늘 배고프고 불만에 가득 찬 채, 불평만 해대게 된다. 통찰이 성찰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이유다.

이럴 때면 난 늘 해독제로써 누군가의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접한다. 보통은 읽는 것으로 의외로 많은 문제가 해결되곤 한다. 정갈한 문장으로 가득 찬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은 이에 아주 적합한 소재다. 비록 소설이지만, 그리 특별하지 않은 사람의 일상적인 이야기. 그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나와 다른 세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내 마음엔 자유와 여유가 깃든다. 타자를 공감하는 일은 언제나 나 자신의 세상에 갇히는 위험에서 빠져 나오거나 미연에 방지해주는 좋은 해독제가 된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 그는 하나와도 같았던 다섯 명의 공동체에서 원인을 알지 못한 채 배제 당한 뒤 수개월 간 죽음에게 온통 마음과 생각을 빼앗겼다. 그러나 어느 날 꾼 꿈을 계기로 그는 현실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으며, 한층 성숙하고 새로운 자아로 삶을 시작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겐 여전히 그때의 일이 마음의 걸림돌이었다. 다행히도, 사라를 만난 후 그 응어리는 비로소 풀리기 시작했다. 16년이나 지난 현재, 쓰쿠루에게서 여전히 어딘가 묶여 있는 듯한 모습을 간파한 사라는 그에게 네 명의 이름과 기본 정보를 알려달라고 요구한다. 그를 돕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쓰쿠루가 감히 용기내지 못했던 일들을 수 일만에 해낸다. 현재 그들이 사는 곳과 일하는 곳, 가정의 현황 등의 정보를 알아내어 그에게 내민다. 그 다음은 쓰쿠루의 차례였다. 그는 용기를 내어 그들을 만나보기로 작정한다. 이 책의 절반 이상은 그와 한 명씩 만나는 그들 간의 재회를 통해 그때 그 일의 진상과 그 진상 이면에 감춰졌던, 지금은 세상에 없는 다섯 중 하나, 시로의 마음에 생겨났던 상처를 가늠하며 자신이 왜 배제되어야 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이해해나가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고야는 물론 핀란드까지 직접 찾아가 자초지종을 알게 되는 쓰쿠루. 거기엔 전혀 상상치도 못했던 사정이 있었다. 그가 배제되어야만 했던 이유. 그 정황. 비록 못내 아쉬운 부분이 없을 수는 없었지만,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어버린 시로의 입을 열게 할 수는 없었기에, 쓰쿠루는 살아남은 셋과 회포를 풀며 정면으로 과거에 맞서서 16년 간 가슴 속 깊숙한 곳에 앙금으로 남아있던 문제로부터 비로소 해방 받게 된다. 물론 이때의 해방이란 모든 것이 회복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미 잘려나간 것들을 보내주고 틀어졌던 마음을 바로잡으며 서로 간의 오해를 해결하는 기회가 되었다.

한때 몸과 마음을 가득 채웠던 그 무언가가 어느 날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쑥 잘려나가게 되는 경험. 그 경험이 남긴 흔적, 죽음의 냄새까지 맡을 정도로 깊숙했던 마음의 상흔. 어쩌면 우리는 모두 저마다 이런 미해결의 문제들을 한 두 개씩 가슴 속에 안고 살아가고 있진 않을까. 석연찮은 일의 잔재들이 기억 속에 잊혀지지 않고 꼿꼿이 남아서 어느 순간 그때와 비슷한 정황에 처해질 때마다 유령처럼 불쑥 나타나 괴롭힘을 당하고 있진 않는가.

한편, 사라와의 만남은 우리 모두에게도 존재한다. 그러고 보면, 인생이 그렇게 형편없을 만큼 불공평한 건 아닐지도 모른다. 떠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나를 찾아주는 사람도 있다. 아픔을 주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 아픔을 치유해주는 사람도 있다. 과거의 아픈 상처를 보듬어주는 다리가 되어주는 사람. 참 고마운 사람. 그건 분명 은혜일 것이다. 언제나 구원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법이다. 자꾸만 안으로 침잠하려는 자아에 거스르는 희망의 빛. 진정한 새로운 시작은 과거의 유령으로부터 피하는 게 아니라 정면으로 맞서서 매듭을 지을 때 시작되는 게 아닐까. 단순히 그 일이 생기기 이전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다. 치유와 회복은 '과거의 나'가 아닌 '현재의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마음 속 교통 정리랄까. 조그만 상처에도 필요없이 부풀어오른 딱지를 제거하는 작업이랄까. 외부의 도움으로 인해 과거의 자아와 마주하여 치유를 받고 현재를 새롭게 시작하는 우리들의 평범한 이야기. 이게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양장본인 이 책을 감싸고 있는 컬러풀한 껍데기를 벗기면, 무채색의 하드커버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 알고 보니 그는 색채에 둘러싸여 있었다. 어쩌면 그는 애초부터 색채가 없었던 게 아니라, 색채를 가진 이들과의 진정한 교류를 하지 못했던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인간 관계에서 스스로를 소외시킨다면, 그 어떤 아름다운 색채도 무채색으로 변색되어 버리지 않을까. 색채가 있든 없든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루어지는 관계. 사라를 만나고 쓰쿠루는 그제서야 그런 관계를 시작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를 해보며 마지막 책장을 덮는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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