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일상의 단조로움 속으로 찾아온 예기치 못한 기쁨.
티시 해리슨 워런 저, '오늘이라는 예배'를 읽고.
- 부제: 사소한 하루는 어떻게 거룩한 예전이 되는가.
늘 보던 일상, 늘 하던 일과, 지루하고 하찮아서 나 스스로도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하는 순간들. 아니, 그런 의미를 찾을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반복적이고 타성에 젖어버려 기억에서 곧바로 삭제되고 버려지는 시간들. 하지만 내 하루를, 내 인생을 압도적으로 채우고 있는 그 기계적인 시간들. 때론 순식간에 우리를 다 커버린 어른으로 만들어 버리고, 때론 인생의 덧없음을 곱씹는 철학자나 그 이면에 놓인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인으로 만들어주기도 하며, 때론 심리학자로, 또 때론 무면허의 상담가나 사설탐정으로 우릴 만들어 주기도 하는 그 숱한 시간들. 바로 일상의 다른 이름들이다. 나와 당신의 인생, 나와 당신의 하루, 그리고 나와 당신의 오늘.
그러나 그렇게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날, 심지어 일기장에 끄적거릴만한 내용조차 하나 없는 날에도, 갑자기 훅 들어오는 전율의 순간은 종종 나를 찾아온다. 믿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이러한 순간은 아까와 동일한 바로 그 시공간에서 일어난다. 이 설명할 수 없는 순간. 가끔은 입을 쩍 벌리고 두 손을 위로 높이 들고 머리를 조아리며, 한없이 겸허하고 한없이 경건한 자가 되어, 경이감에 휩싸인 채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순간. 원한다고 찾아오는 순간들이 아니기에, 내 의지와는 분명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다만, 나는 내가 그 순간을 맞이하기 이전에 화학적이고 전기적이며, 또 육적이면서 영적이기도 한 어떤 것들이 상호작용하였음을 대충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 신비라고 하자. 이런 신비로운 순간은 순식간에 나를 압도하여 내 입을 다물게 하고, 비상하게 돌아가던 내 논리와 비판을 멈추게 하며, 보이는 것들 이면에 놓인 세계를 보라고 말한다. 마치 그토록 찾아 헤매던 답을 엉뚱한 시간과 공간에서 엉뚱한 방법으로 찾아버린 것 같은 느낌이랄까. 내가 기억할 수조차 없는 오래 전, 마치 태곳적에 나와 연결되어 있었던 것 같은,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나의 이성과 감성을 단숨에 제압해버리고 나를 장악하고 지배하는 그 순간들. 아.. 어찌 이를 다 설명할 수 있을까.
신기하게도, 왜 나는 그러한 비논리적인 순간들 한가운데서 내 안의 세포들이 모두 깨어남을 느끼고, 그제서야 비로소 계속해서 뛰고 있었던 심장을 느끼며, 그 심장을 통해 전신으로 따뜻한 피가 흘러감을 느끼는 걸까. 왜 난 이러한 말도 안 되는 순간을 맞이할 때, 모든 것을 초월하는 듯하고, 또 궁극의 답을 얻은 지혜자가 되는 것처럼 느끼는 걸까. 왜 난 그 순간 인생의 굴곡진 곡면의 순간기울기를 살아내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걸까. 왜 난 그 순간 살아있음은 물론 행복까지도 느끼고 한없이 너그러워지는 걸까. 나의 존재 이유와 나의 정체성, 그리고 내가 품어야 할 마음과 해야 할 일들이 왜 그 순간 선명하게 분별이 되는 걸까.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나는 이러한 순간을 맞이할 때면, 혼자 중얼거리는 말이 있다. "아, 하나님, 이렇게 훅 들어오시다니..."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은, 이러한 순간들이 내가 성공을 거뒀거나 뭔가 특별한 일을 성취했을 때 찾아오지 않고, 따분할 정도로 평범한 일상 가운데 찾아오는 이유에 대해서다. 그리고 분명하게 아는 것도 한 가지가 있는데, 이러한 예기치 않은 기쁨의 순간들을 내가 점점 더 기다리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런 기다림은 나에겐 하나의 소망이 되어, 하찮을 만큼 평범한 내 일상에 밝고 아름답고 따스한 평안의 빛을 비춘다. 그렇다. 어쩌면 이러한 예기치 않은 시간과 공간에서 한 번에 훅 들어오는, 항복할 수밖에 없는 압도적인 순간들이 있어서 사소한 나의 하루가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 이 가슴 두근거리는 설렘. 당신은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일상에서 마지막으로 가슴 설레어 본 적이 언제인가.
습관처럼 길들여진 반복적인 삶의 패턴 한가운데에 신비가 있다. 그 신비는 발견하는 자를 행복으로 맞아준다. 누구든지 찾을 수 있지만, 누구도 쉽게 찾아내지 못하는 그 순간들. 이 책은 우리가 누구나 경험하는 그런 사소한 하루를 특별한 (아니, 가장 평범하다고 해야 할까. 가장 평범해서 특별해져 버린 걸까) 시각으로 조명해준다. 부제인 '사소한 하루는 어떻게 거룩한 예전이 되는가.'에서도 간파할 수 있듯, 이 책은 하루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예전과 연결시켜 바라보며, 작은 순간들의 믿음과 자잘한 형태의 영적 성숙에 대한 생각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잠에서 깨어 침대를 정리하고, 이를 닦는 평범한 하루의 시작부터 끼니를 때우고 하루의 일과를 마친 후 잠자리에 들기까지의 24시간을 이 책은 섬세하게 다루고 있다. 저자의 평범한 일상에 대한 내밀한 관찰과 분석 및 해석은 그녀의 신학적 성찰로 승화되어 이 책을 잔잔한 한 편의 에세이처럼 만들어 놓았다. 그녀만의 수려하고 맛깔 나는 필력은 덤이다.
우리는 모두 아침에 잠에서 깨면서 의식을 되찾는다. 나 같은 경우는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한 아이의 아빠로서, 그리고 한 명의 생물학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보다 먼저 기억해야 할, 더 깊고 더 실제적인 정체성이 있다.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이다. 저자는 우리에게 다음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매일 아침 세례받은 자들로서 잠에서 깬다." 구약의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구원해주시고 보호해주신 일들을 기억하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신다. 성공회 사제로서 저자는 예배당에 있는 세례반을 지나갈 때 손가락을 살짝 담근 뒤 성호를 긋는 행위가 기억의 행위임을 알려준다. 자신이 받은 세례를 기억하고, 자신이 사랑받고 있으며, 예수님이 행하신 일 덕분에 받아들여졌음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모든 정체성을 무의식의 수면 아래로 내려놓았다가 다시 하나씩 주워 입게 되는 아침 시간. 나는 기억한다. 나는 사랑받은 자요, 용서받은 자요, 받아들여진 자라는 것을. 오늘 내게 주어진 하루는 또 다시 단조로운 일상으로 남겨질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은 오늘을 구별해 주셨다는 것을. 오늘은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나라를 살아낼 시간이라는 것을. 다시 시작할 날은 바로 오늘이라는 것을. 남편, 아빠, 과학자의 정체성보다 더 소중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기억하면서 말이다.
21세기를 들어 스마트폰은 버젓이 일상으로 자리잡았다. 저자 역시 마찬가지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스마트폰 의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밤에 잠들기 직전, 그리고 하루 중, 예전 같으면 소위 '심심했을' 짬 시간의 모든 조각조각들 가운데 우리와 언제나 함께 하는 단짝은 스마트폰이 되었다. 스마트폰 덕분에 테크놀로지가 하루 중 비어있는 모든 순간을 채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우리가 깨닫지 못한 사이에 야금야금 우리의 습관을 형성해간다. 저자가 간파한 것처럼, 정말 마치 지루함에 대한 지속적인 저항과 두려움 때문인 것일까. 어느 사순절 기간, 그녀는 스마트폰을 침대 곁에서 치워버리고, 대신 아침에 잠에서 깨자마자 침대정리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몇 분 동안 가만히 앉아 이런저런 생각과 묵상,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별 것 아닌 그 행위 덕분에 얻은 유익을 나눈다.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작은 혼란 속에서 작은 질서를 만들어 내는 일. 어질러진 집 안에 하나의 작은 공간, 질서가 잡힌 사각 공간이 생겼다. 신비롭게도 이 사각형은 나의 어지럽고 산만한 정신 안에도 작고 질서 잡힌 공간을 만들어냈다." 제임스 스미스의 '습관이 영성이다'에서도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표방하는 세계관이나 특정 문화와는 상관없이, 검증되지 않은 매일의 습관들로 형성되어져 간다. 그녀 역시 이 통찰을 적극 동의하며 반복되고 단조로운 일상의 순간들이 가지는 의미에 신학적 성찰을 가한다. 반복성은 믿음의 리듬을 반영하는 것이며, 우리를 성숙시키는 훈련의 장은 바로 매일의 일상, 그 단조로움 안에 있다면서 말이다. 그리고 따끔하게 우리에게 도전도 가한다. 크고 즐겁고 극적이고 충격적인 것을 열망하는 문화에서, 침묵과 반복의 공간이 있는 삶을 일구는 것은 믿음의 삶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하다고. 나는 바로 그것이 일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작은 저항이라 믿는다. 거창한 대의를 위한 거창한 저항이 아닌, 아주 작고 작은 저항. 누군가의 말처럼 "모든 사람은 혁명을 원한다. 아무도 설거지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저자의 깨달음처럼 나 역시 기독교 신앙의 일상성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묵상하게 되었다. 아무리 혁명을 원하고 전복적이고 급진적인 기독교 세계관의 실천을 원해도, 설거지를 배우지 않고는 그것들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이어진 3장에서는 이 닦는 사소한 행위에서 '유지와 보수'라는 저자의 신학적 성찰을 만날 수 있다.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은 불가피하게 단순한 유지 보수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지적하며, 유한한 육체에 갇힌 우리 인간들의 한계와, 그 한계를 가지고 살아가고 또 예배하는 삶의 의미에 대해서 저자는 그녀의 묵상을 조곤조곤 나누어준다. 특별히, 인간의 제한된 육체 안으로 들어오신,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언급하며, 복음을 머리만이 아닌 몸으로도 믿는다는 것에 대한 것의 의미와, 이성적으로 바르게 믿는 신앙을 넘어서는, 즉 우리의 몸으로 드리는 예배의 실천에 대한 의미를 묵상한다. 몸과 기도의 관계에 대한 통찰은 나도 존경하는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말을 인용한다. "바닥에 엎드리지 않고도 기도할 수 있지만, 나는 사람들이 무릎 꿇는 법부터 배우지 않는다면 교회의 제도로서 기도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기도하는 법을 배우려면 몸을 구부리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기도의 몸짓과 자세를 배우는 것은 기도를 배우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 참으로 몸짓이 기도다." 몇 달째 나 역시 성공회 예배에 참석하면서부터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땐 누구나 꽤 괜찮은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남도 속이고 나도 속이는 그 교묘한 위장의 순간의 단점은 수명이 짧다는 것이다. 문제는 생기게 되어 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린 진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갑자기 모든 순조로움이 멈추고, 통제력, 여유, 특권이 사라지고, 대신 궁핍함, 죄성, 신경증, 연약함이 순식간에 드러난다. 4장에서 저자는 바쁜 순간, 열쇠를 잃어버리는 사건을 통해 우리가 정말로 은혜가 지속적으로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길을 잃었고 깨어진 존재였음을 기억하는 동시에, 다시금 하나님의 자비를 신뢰하고 그분의 용서와 죄사함과 사랑에 감사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도와준다. 바로 회개와 믿음의 반복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지속되는 일상의 리듬이자 호흡과도 같다는 것이다. 열쇠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사건들이 우리의 성숙과 성화를 위한 기회라는 신학적 성찰을 저자는 전혀 고리타분하거나 가르치려는 듯한 권위를 내세우지도 않고 조용히 아주 설득력 있게 풀어준다. 이 책을 읽는 묘미일 것이다.
5장에서 저자는 먹다 남아서 냉장고에 보관되어 있던 타코 수프를 먹는 행위에서 기독교 예배의 두 가지 요소, 즉 말씀과 성례전을 성찰한다. 두 가지 모두 음식처럼 우리에게 영양분을 공급하는 요소다. 그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직전 자신을 기념하기 위해 행해야 할 일 가운데서 어떤 특별하거나 거창한 행위가 아닌, 굳이 식사라는 평범한 행위를 선택하셨다는 사실에서 반복적 일상에 깃든 신비를 읽어낸다. 우리가 먹는 대부분의 식사는 너무나도 평범하여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 기억에서 곧장 사라져버리는 보통의 식사가 우리에게 영양분을 공급했다는 사실은 우리도 부인할 수 없다. 그 반복적이고 때론 지겹게까지 느껴졌던 식사가 우리의 일용할 양식으로써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예배에서 말씀과 성례전 역시 매 주일마다 반복되는 (적어도 성공회 예배에서는 참이다) 순서로써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만, 실제론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처럼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저자는 그 조용하고 기억에 남지 않는 행위들이 우리의 삶을 유지시켜주며, 우리에게 영적인 양식을 먹인다고 말한다. 흥분, 모험, 흥미진진하거나 충격적인 영적 경험 등을 파는 많은 현대 기독교 예배는 우리를 금방 목이 타는 영적 경험의 소비자로 전락시키지만, 말씀과 성례전이 중심을 이루는 기독교 예배는 우리의 정체성이 소비자가 아닌 영적 양식을 공급받는 사람으로 만들어준다고 역설한다. 전통적인 예전 안에 깃든 신비를 조금 맛본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6장에서 그녀는 스스로를 '남편에게 고함을 지르는 평화주의자'라고 소개한다. 사실, 나도 다를 바 없다. 나는 '아내에게 큰 소리치고 말과 글이 앞서는 몽상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큰 이념을 표방한다 해놓고서도 여전히 우리는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사로운 다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남편과의 다툼에서 저자는 '평화의 인사 건네기'와 '평화를 이루는 일상의 일'에 대해 묵상했던 것을 우리에게 나눠준다. 가장 가까운 이들을 돌보는 일을 소홀히 하면서도 세상을 위한 급진적 사랑을 부르짖고, 주위의 어려운 사람을 묵과하고 막연한 다수의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고 큰 소리치는 이들. 나 역시 자유롭지 못한 이러한 우리들의 현실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름 없고 그 자체로 눈에 잘 띄지도 않는 평범한 사랑이 바로 땅 위에 존재하는 평화의 실체이며 일상에서 통용되는 하나님의 은혜다."라고. 그리고 다음을 믿으라고 권한다. 믿는 것이 신앙의 행위라고 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일상에서 그분의 평화의 나라를 건설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신다." 그렇다. 내가 일상에서 실천하는 사소한 평화의 몸짓이 세상의 우주적 평화와 연결되어 있음을 믿기 위해서는 신앙이 필요한 것이다.
저자는 이메일을 싫어한다. 이메일은 그녀를 인생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실패자라고 느끼게 만든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녀는 이메일 확인이 자신에게 부여된 거룩한 임무라고 고백한다. 노동하는 것과 예배하는 것, 즉 일과 신앙 혹은 삶과 신앙의 조화에 대한 저자의 성찰이 여기 7장에서는 소개되어 있다. 일과 성취감을 우상으로 여기는 것에 저항하면서도, 우리의 일 안에서, 우리의 일을 통해 직업적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은 일하는 삶을 기도의 형태로 살아내도록 도와준다고 그녀는 고백한다. 특히 베네딕트회 영성의 특징을 잘 대변해주는 로렌스 형제의 예를 들면서 말이다. 성과 속을 구별하는 것에 길들여진 보수 신앙인들은 마치 목회자가 시장에서 반찬 파는 직업을 가진 서민보다 더 거룩하다는 생각을 가지기 쉽다. 목회자 스스로도 교회에 관계된 일이 아닌 일을 할 때면 마치 세속적인 일을 한다고 여기기 쉽다. 그러나 나는 아니라도 믿는다. 거룩하다고 규정해놓은 일을 해야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존재로서 성실히 일에 임하고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려고 하는 마음과 의지를 가지고 일에 임한다면 그 어떤 일이라도 거룩한 일이 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저자가 싫어하는 이메일 확인 작업에서도 그녀는 거룩할 수 있듯이, 우리가 싫어하거나 귀찮아하는 혹은 속되다고 단정했던 일에서 우리는 거룩할 수 있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듯, "우리의 임무는 하나님을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일에 끼워 넣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분이 우리의 직업 안에서 그리고 우리의 직업을 통해 행하고 계신 일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8장에서 저자는 시간 통제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나눈다. 우린 모두 우리의 시간을 우리가 통제하며 산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대부분의 시간은 반복된 습관과 무의식의 세계가 깊숙이 침투해있음을 알 수 있다. 통제는 보통 실행을 의미하지 기다림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준비하고 기다리는 삶. 저자는 교통 체증 가운데 모든 것이 묶여있는 경험으로부터 인내와 소망을 읽어내고 그 인내와 소망은 부활에 근거한다고 밝힌다. 그리고 이미와 아직 사이의 중간 시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작전 개시일과 전승 기념일 사이의 삶으로 비유한다. 이미 가졌다 함도 아니고 아직 얻지 못했다 함도 아닌, 언제나 길 위에 서서 기다리고 인내하고 소망하는 순례자.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중 하나임을 믿는다.
9장에서는 개인영성, 즉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 개인의 회심과 영적 성장에만 배타적으로 치우친 복음주의권 문화에 일침을 가하며, 저자는 기독교가 개인영성 뿐만이 아닌 한 민족을 부르시고 형성하시고 구원하시고 구속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것이라면서, 교회와 공동체에 대한 의미를 성찰한다. 그리스도는 단지 개인들에게 성령을 보내시지 않았으며, 그분은 추종자들과 단지 개인적 관계를 추구하지 않으셨음을 저자는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교회의 죄와 실패 안에서 어두움과 추함을 보는 그녀는 또한 하나님은 죄인들 한가운데서 구속과 회개와 변화를 가져오실 수 있다는 빛나는 소망도 본다. 그리고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짚어준다. 손이 몸의 일부이듯, 나 역시 교회의 일부라는 것. 즉 내가 교회 안에서 죄를 볼 때, 나도 그 죄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 나도 교회의 깨어짐에 한몫 거들고 있다는 것. 이 찔림에 자유로운 그리스도인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레슬리 뉴비긴이 이야기했듯, "우리가 함께 온전함을 이룰 때까지 우리 중 누구도 온전함을 이룰 수 없다." 아멘.
10장과 11장에서는 각각 차를 마시고 쉼을 얻는 시간과 하루를 마감하며 잠자리에 드는 시간에 대한 저자의 성찰을 만날 수 있다. 쉼은 연습이 필요하다면서, 그녀는 다시 한 번 일상에 깃든 아름다운 작은 순간들에 주목하여, 그것들이 맞닿아있는 신성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우리들에게 제안한다. 쉼과 잠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의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나의 단조로운 일상을 찾아오는 예기치 못한 기쁨. 그 기쁨이 가리키는 하나님의 임재. 나도 그 기쁨을 맞이하는 순간뿐 아니라, 그 기쁨을 마음 설레며 기다리는 시간에서도 저자처럼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김영웅의책과일상
'김영웅의책과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레프 톨스토이 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고 (2) | 2019.08.09 |
---|---|
C. S. 루이스 저, '천국과 지옥의 이혼'을 읽고 (2) | 2019.08.07 |
짐 월리스 저, '회심'을 읽고 (0) | 2019.07.27 |
헤르만 헤세 저, ‘요양객’을 읽고 (0) | 2019.07.13 |
김영봉 저, '사귐의 기도'를 읽으며 (0) | 2019.07.02 |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