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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할 수 없는 구별됨과 상이함.
C. S. 루이스 저, '천국과 지옥의 이혼'을 읽고.
천국이 어떤 곳인지 묻기 전 그곳이 어딘지 묻는 것은 성급할 뿐 아니라 바람직하지 않은 질문이다. 예수는 복음서에서 하나님나라가 어떤 곳인지, 어떤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인지 말씀해주셨지, 덜렁 약도나 지도를 던져 주시거나, 어디에 그것들을 비밀스럽게 숨겨놓았는지, 혹은 어떡하면 그것들을 찾을 수 있는지 알려주시지 않았다. 따라서, 천국이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으면서 그곳의 위치만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십중팔구 기복신앙의 궁극적 버전일 것이며, 개인구원과 개인영성의 끝판왕일 것이다. 어쨌거나 천국이라는 장소에 가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냐는 식의 은밀한 욕망. 지옥을 심리 상태라고 본 루이스에 따르면, 그곳은 천국이 아닌 지옥이라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자기애에 갇힌 상태는 결코 천국일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천국이 구름 속 어딘가에 있을 새로운 공간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나, 마치 그들에게 자기는 답을 안다는 듯 천국은 마음 속에 있다고 알려주는 사람이나 차이는 크지 않다. 모두 천국의 공간 좌표를 구해서 그 좌표가 나온 지도만 구한다면 자기도 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천국은 은밀하게 숨겨진 보물지도를 구한 특별한 사람만 갈 수 있는 보물섬이 아니다. 공간을 가지지만, 공간에 제약되지 않는 하나님나라. 예수가 복음서에서 말씀하셨던 하나님나라의 의미는 결코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는 개념은 아니다. 구약의 빛 아래서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말씀을 해석할 때, 하나님나라의 커다란 두 기둥인 정의와 공의를 배제하고서는 결코 모든 율법의 완성이 사랑이라고 하셨던 예수의 말씀을 포함한 복음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개인구원과 개인영성에 천착한 기독교 신앙은 예수가 말한 복음과 같은 의미가 아닐 뿐더러, 그것의 절반도 담아내지 못한다.
지옥에 대한 질문도 마찬가지다. 무턱대고 지옥이 어디 있는지 묻기만 하는 건, 그곳의 위치만 알면 마치 피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는, 한 마디로 바보 같은 질문이다. 천국이 어떤 곳인지를 묻는 것이 먼저이듯, 지옥이란 어떤 곳인지 먼저 물어야 한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 루이스가 이 책을 저술하게 된 동기가 되었던 게 아닐까 싶다. 루이스가 머리말에서 이 책을 구상하게 된 이유를 윌리엄 블레이크의 '천국과 지옥의 결혼'이란 책이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그 책이 담고 있는 믿음, 즉 "숙련된 기술과 참을성과 충분한 시간만 있다면 양자를 다 포용할 수 있는 길을 언제든 찾아낼 수 있다는 믿음, 갖고 싶은 것을 철저하고 단호하게 거부할 필요 없이 그저 악을 약간만 발전시키고 조정하고 다듬기만 하면 선으로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파국으로 치닫는 실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선은 농익을수록 악과 구별될 뿐 아니라 다른 선과도 구별되며, 악을 무위로 돌릴 수는 있어도, 발전시켜 선으로 만들 수는 없을 뿐더러,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저절로 좋아지는 경우도 없고, 지옥을 붙들고 있는 한 절대 천국을 볼 수 없으며, 천국을 받아들이려면 지옥이 남긴 아주 작고 소중한 기념품까지 미련 없이 내버려야 한다면서, 천국과 지옥의 구별됨과 상이함을 강조한다. 이 구별됨과 상이함이 문학적인 표현을 입어 '이혼'이 되었고, 이 책의 제목이 되었다.
루이스가 강조하듯, 이 책은 신학적인 내용을 담고는 있지만, 결코 신학 책이 아니다. 상상력이 만들어낸 판타지 소설이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 그의 신학적 사상이 어떠했는지 왈가왈부하는 것은 확대해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린 그저 루이스의 성실하고도 창의적인 상상력과 그 안에 깃든 루이스만의 특유한 통찰을 즐기며, 마음에 와 닿은 부분이 있다면 잠시 멈추어 우리 자신을 비추어보면서 이 책을 읽어나가면 될 것이다.
이 책은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인 주인공의 꿈 이야기다. 소설의 도입부에서 '나'는 어딘가 낯선 시공간에 놓인 버스 정류장에서 낯선 사람들과 함께 줄을 서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때는 저녁 무렵인 듯했는데, 어스름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다시 밝아질지, 금새 어두워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미적지근한 상태,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은, 해가 곧 뜰지 질지 아리송한 상태, 이름하여 '회색 도시'라는 곳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줄을 스스로 이탈했고, 또 몇몇 사람들은 타자에 의해 강제로 이탈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버스는 꽉 차지도 않을 인원만을 싣고 이륙했다 ('출발'이 아닌 '이륙'이다. 하늘을 나는 버스이기 때문이다. 기억하라. 이 책은 판타지임을). 공중에서 본 회색 도시는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도시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곳은 텅텅 빈 도시이기도 했는데, 이유인즉슨, 정착한 사람들이 허구한 날 다투고 이사 가느라 서로에게서 점점 멀어졌고, 그에 따라 도시가 점점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회색 도시는 사람들이 절대로 함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갈 수 없는 곳이었던 것이다. 만약에 지옥이란 공간이 존재한다면, 아마도 좁은 불가마 안에서 박 터지게 바글바글 대는 모습보다는, 오히려 루이스의 상상처럼 서로 뚝뚝 떨어져 혼자 외롭게 살아가는 모습에 더 가깝진 않을까. 철저히 혼자서 맘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지만, 사실은 그 어떤 자유도 보장되지 않는.
시간이 흘러 버스는 목적지에 도착했고, 사람들은 모두 버스에서 내렸다. 그곳은 천국이라 불리는 공간의 일부였다 (얕은 천국, 천국의 입구, 혹은 대기 장소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즉, 이 버스는 지옥이란 곳에서 천국이란 곳으로 마치 소풍이나 견학 오는 사람들을 실어주는 통로였던 셈이다 (여기서, "지옥에서 천국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단 말입니까?"라고 신학적인 질문을 던질 필요는 없다. 기억하라.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것을. 오히려 우리는 그런 답도 없는 질문을 하며 시간을 소비하는 것보단, 루이스가 왜 이런 소풍 같은 장치를 마련해두었나 하는,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편이 더 낫다). 물론 버스는 의무 왕복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돌아가는 버스를 타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시 회색 도시로 돌아갔다. 그것도 '스스로의' '확고한' 선택으로). 사람들은 모두 각자 구경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주인공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실제 '사람'이 아니라, '유령'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밟고 가는 풀이 휘어지지 않았고, 풀잎에 맺힌 이슬 한 방울조차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체가 없는 존재, 즉 버스를 타고 내린 모든 이들은 죽음을 이미 거친 후 유령이 된 존재였던 것이다 (마찬가지다. 여기서도 "아니, 유령이 존재한단 말인가요?"라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오히려 이들을 통해 루이스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에 중점을 두고 읽어나가는 게 좋다).
그곳은 또한 도착한 유령들 각각에게 배정된 '영'과의 만남이 주어지는 접선 장소이기도 했다. 영은 깊은 천국으로부터 엄청난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마치 영혼을 구원하려는 듯, 마치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어린 양을 찾으려는 듯, 그곳에 도착한 유령들에게 다시 회색 도시로 돌아가지 말고 산맥 (깊은 천국을 의미한다)으로 가자고 인도하기 위해 기꺼이 희생을 하여 온 존재들이었다. 유령들 모두를 위해 준비된 영들의 친절한 제안만 받아들이고 그들을 따라 나서기만 하면, 천국이란 곳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모든 유령들에게 값없이 주어진 셈이었던 것이다. 이 부분부터 책의 내용은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의 플롯과 비슷해진다. 몇몇 유령들과 그들을 영접하러 나온 영들의 만남을 주인공이 관찰해나가는 과정이 전개되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우리로 하여금 각 유령과 영의 만남을 관찰하게 함으로써, 인간이 가진 죄와 악을 넌지시 드러내 보이며, 눈 앞에 천국이 버젓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당당하게 선택하여 지옥으로 회귀하고 마는, 인간의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여준다. 각 유령의 상황은 달라도 그들의 결정은 한결 같았다.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 자기들만의 타당한 이유를 대며 지옥을 선택했다.
한 때 사장이었던 유령은 여전히 인간이었을 적 자기가 휘둘렀던 권력 (이 유령은 '권력'이 아닌 '권리'라고 했다)을 다시 찾아내고 싶어했고, 살아있을 때 성공회 주교까지 (알다시피 루이스는 죽을 때까지 성공회 신자였다) 지냈던 유령은 자유주의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 천국과 하나님의 존재가 실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믿음과 탐구의 대상, 즉 관념적인 존재로만 국한시키길 고수하려 하는 어리석음을 보였다. 또 어떤 유령은 폭포 근처에서 주워 든 황금사과를 불가능함에도 안간힘을 쓰며 지옥으로 가져가려고 했으며, 산전수전 다 겪은 유령은 모든 것을 자신의 경험에 의지하여 판단할 뿐 아니라 음모론에까지 천착하여 (아마도 인간들의 관점에선 노련하다거나 지혜롭다는 말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버스를 타고 천국의 입구에 온 것도 분명 배후에 어떤 음모가 있을 거라면서 자신은 결코 당하지 않겠노라 큰 소리치며 지옥으로 돌아가기를 결정했다. 또한 루이스는 주인공을 통해 우리들에게 겉모습에 모든 가치를 두어 수치를 죽음보다 더 싫어하는 여자 유령도 보여주고, 여전히 남들과 비교해 유명해지길 원하는 화가 유령도 보여주며, 남편에게 절절한 사랑과 희생을 바쳤다고 믿는, 그러나 실제로는 남편을 자기 뜻대로 장악하려고 했던, 아내 유령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편집광적으로 아들에게 집착하여 아들이 죽은 후에도 10년이나 애도의 의식을 치러온 엄마 유령도 보여주면서, 그 엄마는 아들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적게 사랑했기 때문에 잘못된 방법으로 슬픔에 대처했음을 일깨워준다. 상대방을 소유할 수만 있다면, 이른바 사랑하는 자의 영혼을 언제라도 한없이 비참한 나락으로 떨어뜨릴 태세를 갖추고 있는 사람의 유형을 보여주는 것이다 (참고로 '소유하는 사랑'의 비참함과 그릇됨은 루이스의 다른 작품,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에서도 잘 다뤄진다).
마지막으로 보여주는 남편 유령과 아내 영의 만남에서 루이스는 다른 만남보다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데, 아마도 이 만남에서 루이스는 뭔가 더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내가 파악한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천국에서의 사랑은 서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 이유는 그분 안에 있기 때문에 모든 걸 다 가졌고, 전혀 외롭지 않으며, 약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런 사랑을 아내 영이 남편 유령에게 제안했으나 남편은 부인의 기쁨을 거절하고야 만다. 두 번째, 동정심을 협박처럼 악용하는 것은 마치 기쁨을 인질로 잡아두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장 그만 둬야 하는 행동이라는 것. 이는 마치 아이가 미안하다고 말하는 대신, 다락방으로 올라가 심통을 부려서 누나들로부터 얻어낸 동정심을 무기 삼아 그들을 협박하고 그들로부터 항복을 받아내어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행위와도 같다. 그러나 자기 의지가 관철되지 않으면 차라리 불행을 택하는 사람들에게 매번 무방비로 당하기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매번 그런 협박이나 당하라고 기쁨이라는 게 창조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위에 언급한 두 가지의 메시지 중에서 두 번째에 더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왜냐하면, 그 메시지로부터 루이스는 다음과 같이 "지상의 사람들 중에는, 한 영혼이라도 멸망 당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구원 받은 사람들이 온전히 기뻐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그릇된 인간적인 요구들을 낱낱이 파헤치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피조물이 어두운 바깥에 버려진다면, 차라리 구원 받지 않는 편을 택하겠다는 말이 언뜻 보면 거창하고 근사하게 들리는 듯하지만, 실상은 궤변에 불과하다면서 우리들에게 루이스는 우리에게 주의를 주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 질문 이면에는 사랑 없이 자아에 갇혀 있는 사람들의 요구, 자기네가 우주를 협박할 수 있게 허락해 달라는 요구, 자기네가 행복해지는 데 동의할 때까지는 세상 어느 누구도 기쁨을 맛보아서는 안 된다는 요구, 자기네가 최종권력을 휘둘러야 한다는 요구, 지옥이 천국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요구가 숨어있기 때문이라고 알려주면서 말이다. 그리고 루이스는 이러한 궤변에 조심하지 않으면, 못 먹는 밥에 재나 뿌리는 우주의 폭군을 만들어내게 될 거라고 친절하게 경고까지 해준다. 루이스는 천국의 기쁨의 의미를 구별시키고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말한다. "지옥은 지상 세계의 자갈 하나보다 작지. 지옥에 있는 모든 고독과 분노, 증오, 질시와 참을 수 없는 갈망을 다 하나의 경험에 뭉쳐 저울에 올려놓는다 해도, 천국에서 가장 작은 존재가 느끼는 찰나의 기쁨에도 미치지 못한다네. 선이 선에 충실한 데 비해, 악은 악에도 충실할 수가 없어."
그리고 책의 중간 쯤, 주인공이 그에게 배정된 영, '조지 맥도널드'과의 만남에서도 루이스는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해준다. 지옥에서 빠져 나와 천국으로 올 수 있냐는 주인공의 질문에 답하는 조지 맥도널드의 답변에서 이를 찾을 수 있다. 다음과 같다. "그건 자네가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네. 그 회색 도시를 버리고 떠난 사람에게 그곳은 지옥이 아닐세. 그 사람들한테는 연옥인 셈이지. ... 거기 머무는 사람들에게는 처음부터 지옥이지만,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이 골짜기뿐 아니라 지상에서 살았던 과거도 모두 천국이 되는 거라네. 저주받은 자들에게는 회색 도시의 황혼뿐 아니라 지상에서 살았던 삶 전부가 지옥이 되는 거고. 인간들이 오해하는 게 바로 이 부분이야." 그러면서 지옥은 심리 상태가 맞지만, 천국은 실재 그 자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 지나치게 관심을 기울인 나머지, 하나님의 존재 외에는 아무것에도 신경 쓰지 않게 된 사람들이나,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 너무나도 몰입한 나머지 그리스도는 아예 쳐다볼 생각도 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언급하며, 인간들은 천국이나 기쁨과 같은 '실재'보다 더 좋아하는 것을 늘 가지고 있음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유령들 모두는 지옥을 스스로 결정했다. 아무도 등 떠밀려 가지 않았다. 천국의 입구에서 자신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여 마중 나온 영의 영접을 스스로 거부했다. 그들은 모두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이유들은 한결같이 자기중심적인 자기애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놀랍고도 슬픈 사실은, 그들 스스로는 자기네들의 구구절절한 이유들이 자기애에 뿌리박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는 점이다. 하기야 그렇게 당당하지 않고서야 어찌 스스로 지옥을 택할 수 있겠냐마는 말이다. 인간의 나약함은 자기 뜻을 관철시킬 수 없다는 데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렇게 하려는 의지가 자기애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모르는 데에 있다고 난 생각한다. '구원'과 '영성'은 참 좋은 말이지만, 그 앞에 '개인'이란 단어가 붙으면 그 순간 죄악이 되는 것 같다. 이런 인간의 죄악됨은 루이스의 다른 작품,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노련한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조카이자 초보 악마인 웜우드에게 해주는 충고를 떠올리게도 한다.
루이스의 이 책 덕분에 지옥이 어떤 곳인지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되었다. 자기애에 갇힌 상태. 바로 지옥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동시에 구원과 천국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자기애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구원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고, 그런 사람들의 모인 공동체가 곧 하나님나라, 즉 천국일지도 모르겠다. 나를 넘어 남에게로 향하는 삶은 분명 천국으로 향하는 삶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벌써 천국을 살아내고 있는 삶일지도.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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